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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진강 은어 낚시

by 물구나무

토요일이다. 학교에 가지 않아도 된다. 더구나 놀기에 기가 막히게 좋은 날씨다. 허클베리를 꼬셔서 해적 놀이를 하면 더없이 좋고, 낚시로 잡은 물고기를 장작불에 구워 먹어도 좋을 것이다. 아니면 그냥 수영만 해도 부족할 하루였다. 근질근질해진 톰의 마음은 벌써 폴리 이모의 눈을 피해 미시시피강으로 내달리고 있었지만, 오늘은 아니다. 꼼짝없이 붙들려 울타리 페인트칠이나 해야 할 판이다. 높이 3미터, 길이만 해도 30미터에 달하는 담장은 감옥 담벼락처럼 톰을 마주 보고 섰다. 하루 종일 칠해도 끝낼 수 있을지……. 일도 일이지만 친구들 놀림을 어떻게 당해낼지……. 시작부터 막막하다. 한숨이 먼저 터져 나왔다. 억지로 붙들린 마음을 붙잡아 둔 몸도 축 늘어져 붓질은 그냥 건성이다. 그때였다. 하필이면 벤 로저스가 나타난다.


멀리서 톰을 발견한 벤, 사과를 입에 배어 물고 증기선 흉내를 내며 서서히 다가온다. 날씨 좋은 토요일 오후에 페인트칠이나 하는 톰, 다시없이 좋은 놀림거리를 그냥 지나칠 수 없다. 목표물을 발견하고 천천히 접근하는 벤과 이미 벤의 출현을 감지한 톰 사이에 신경 줄이 팽팽하게 당겨진다.

“여, 톰! 안 됐구나.”

예상대로 벤이 미끼 질을 시작하지만, 톰은 못 들은 척한다.

“강으로 수영하러 가는 길인데, 보아하니 넌 못 가겠구나. 불쌍한 톰!”

“어? 벤이구나.”

방금까지도 마치 피조물에 혼을 불어넣으려는 화가가 삼매경에 빠져 있었던 것처럼 시치미를 뚝 떼며 톰은 무뚝뚝하게 대꾸한다. 이러쿵저러쿵. 일이나 하고 있으려니 안쓰럽다고 말하는 벤에게 톰은 반박한다. ‘이 단순하고 지루해 보이는 일이 실은 얼마나 심오하고 재미있는 작업인지 벤, 너는 아마 죽었다 깨어나도 모를 거야.’ 마음으로 자기 최면을 걸어가며 시종일관 표정 하나하나 목소리 톤까지 능청스럽게 벤을 낚는다. 울타리에서 한 걸음 물러서 지긋한 눈으로 살펴본 후 잠깐잠깐 덧칠을 해가며, 짐짓 벤의 존재를 외면하면서도 톰은 알고 있다. 벤은 이미 바늘을 깊이 삼킨 물고기라는 걸.

“톰, 나도 좀 칠해 보자.”

걸렸다 싶은데, 영악한 톰은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줄을 감아올리며 마지막 뜰채를 준비한다.

“글쎄……. 폴리 이모가 싫어할 텐데……. 너도 알겠지만, 담장 바깥쪽 칠은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니어서…….”

결국 벤은 손에 들고 있던 사과 하나를 다 넘겨주고서야 겨우 톰의 붓을 넘겨받을 수 있었다.


다음부터는 쉬었다. 벤의 붓질을 바라보며 나무 그늘에서 사과를 씹고 있는 톰을 발견한 아이들은 줄줄이 낚여 들었다. 줄을 세우고 순서를 기다리게 했다. 빌리 피셔에게 종이 연 하나, 조니 밀러에게는 죽은 쥐 한 마리와 꼬리에 묶을 노끈 하나를 받았다. 구슬이 12개, 요지경을 만드는 거울 조각, 호루라기, 양주병 유리 마개, 양철 병정, 애꾸눈 새끼고양이 인형, 놋쇠로 만든 문고리 등등. 톰은 곧 부자가 되었다. 게으름을 피운 것도 아니고 친구들과 웃고 떠들면서 담장을 세 번이나 덧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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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인 마크 트웨인의 천재성이 돋보이는 장면이다. 그는 말썽꾸러기 톰을 통해 일과 놀이를 눈 깜짝할 순간에 뒤집어 놓는다. 지루하고 따분할 것만 같았던 토요일이 더없이 경쾌하고 즐거운 하루로 바뀌는 마법을 건다. ‘톰 소여의 모험’은 결코 아이들만을 위한 동화가 아니다. 숨 막히는 일상에 갇힌 독자들의 마음은 허클베리가 사는 미시시피강으로 달려가는 톰을 뒤쫓는다. 고집스러운 유물론자든 어중이 유심론자든 상관없다. 갇힌 일상을 벗어나 자유를 목말라하는 아무개의 멱살은 작지만 다부진 톰의 아귀에 꽉 잡혀 책 속으로 빨려든다. 미시시피강물에 풍덩 뛰어들고야 만다. 강물 속에서 톰은 자신에게 잠재된 사람 낚는 법을 깨우쳐가며 어른으로 자라 간다.


섬진강의 여름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다. 은어 때문이다. 지리산 정상에 눈이 녹기 시작하면 바다에서 은어가 오르기 시작한다고 하기도 하고, 누군가는 섬진강 벚꽃이 절정을 이루면 쌍계천 강물부터 들썩거린다고 한다. 섬진강 은어 무리의 소상을 목격한 사람들은 강물에 비친 산 그늘 자락을 따라 화살처럼 오르는 행렬이 이제 막 전쟁터로 향하는 신병들의 발걸음처럼 들떠있다고 하기도 하고, 햇빛 부서지는 여울에서 그들의 귀환은 눈이 부셨다고도 했다. 하지만 기다려야 한다. 이제 막 오르는 은어는 겨우 어른 손가락 정도밖에 안 된다.


은어는 한해살이다. 늦가을 강의 하구에서 알에서 깬 어린 새끼들은 가까운 바다에서 겨울을 난다.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거라고는 지난해 삶의 기록이 더해진 유전자뿐이다. 새끼 은어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스스로 삶을 감당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구상에 남겨진 은어의 발자취는 만년이나 된다. 그들은 전생의 기억을 더듬어서 강줄기를 거슬러 오른다. 물길을 가로막은 댐과 보가 아니라면 은어는 수십 킬로미터까지도 헤쳐간다. 먹는 것도 달라진다. 바다에서는 동물성 플랑크톤을 주로 먹고살지만, 강으로 오르기 시작하면 흔히 돌이끼라고 부르는 부착조류를 먹는다. 은어의 주둥이는 강바닥 돌에 붙은 이끼를 훑어 먹기 적합하도록 진화했다. 옆으로 눕다시피 훑어 내려가며 먹이를 뜯는 습성 때문에 짙은 궤적이 남는데 노련한 낚시꾼은 그 색깔과 크기를 보고 은어를 추적한다. 일생에 단 한 번뿐인 여름 내내 은어는 많이 먹고 크게 자란다. 어른 손가락 크기만 하던 은어가 8월이면 두 손으로 잡아야 할 정도로 몸집을 키운다. 은어를 기다려온 낚시꾼들은 이미 채비를 챙겨두었고 숙소 예약도 미리 마쳐 놓았다. 그들의 마음은 섬진강이 들썩거리던 이른 봄부터 이곳을 어슬렁거리며 포인트를 훑어 오고 있다.


강물이 몸살을 앓는 여름 장마가 끝나면 마침내 운명적인 만남은 재현된다. 주로 곡성과 구례 어디쯤이지만 기록에 따르면 남원 요천이나 순창 적성강 부근에서도 은어를 낚았다고 한다. 흔히 ‘놀림낚시’라고 알려진 은어 낚시와는 다른 방법이었겠지만 자세한 기록은 없다. 대신 조정에 진상품으로 바칠 은어가 백성을 낚았다는 이야기는 남아있다. 어느 임금이 피난길에 맛보았던 그 맛을 못 잊어 해마다 은어를 찾았다고 하는데, 병자호란 때 인조를 두고 하는 말인지 임진왜란 때 선조를 두고 하는 말인지는 확실치 않다. 혹자의 논문에는 도루묵이 많이 잡히던 함경도 지역으로 잠행했던 태조 이성계라는 주장도 있다. 여하튼 민폐를 이유로 1864년 고종 황제에 의해 진상품 목록에서 빠지기 전까지 은어가 출몰하는 지역의 관리들은 앞다투어 은어잡이를 독촉했다. 잘 잡히든 안 잡히든 지정받은 수량을 채워야 했으니 정해준 은어 마릿수만큼 은어를 잡아야 했다. 흉년이 들어 허기가 져도 은어잡이는 계속됐다. 제때 목표량을 채우지 못했던 지방 수령들이 탄핵당했다는 기록도 있다고 한다. 사람 잡는 은어였다.


민물고기이면서도 비린내가 없다. 오이나 수박에서 풍기는 계절을 품은 향기 때문에 더 입소문을 탔겠지만, 장작불에 후드득 소금을 쳐서 구워 먹는 맛을 즐기는 사람도 많다. 하지만 정작 낚시꾼을 사로잡는 은어의 맛은 손맛이다. 미끼를 써서 잡는 여느 물고기와 달리 은어 낚시는 방법부터 독특하다. 은어를 은어로 낚는다. 씨은어라 부르는 살아 있는 은어의 코를 걸고 뒷지느러미 뒤에 역침을 건 다음, 꼬리 아래쪽에 서너 개 미늘이 달린 바늘을 단다. 씨은어는 훌치기낚시로 따로 잡기도 하지만 인근 횟집에서 서너 마리 구입하거나 급하면 옆 사람에게 빌리기도 한다. 낚싯대는 10미터 가까이 기다란 전용 낚싯대를 쓰는데 조심성이 많아 여간해서 빈틈을 보이지 않는 은어의 습성 때문이라고 한다. 성장기 은어는 돌이끼가 많이 붙는 자리를 차지하려고 텃세를 심하게 부리는데 낚시꾼은 바로 이 욕망을 미끼로 건다. 은어가 있음 직한 포인트를 찾아 씨은어를 살살 몰아가는데 강바닥에 붙은 먹이를 먹기 위해 옆으로 누울 때 햇빛에 잠깐 반짝이는 신호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 자기 영역에 침입한 씨은어를 몰아내려고 뒤를 쫓다가 저도 모르는 순간 은어는 미늘에 걸리고 만다. 바늘은 등이고 배를 가리지 않고 파고든다. 일단 걸리면 낚싯줄이 팽팽하게 당겨지며 껑충한 낚싯대가 휘청거리지만, 노련한 낚시꾼의 손은 한 발 앞서 그 전율을 감지한다. 예기치 못했던 생과 사의 갈림길에 직면한 은어가 ‘앗차!’라고 느끼는 찰나의 짧은 몸부림, 순식간에 몰려드는 두려움을 피하려는 작은 생물체의 공포가 일으키는 떨림은 오랫동안 이 순간을 노려온 포식자를 감전시키고 만다. 순간의 경험은 치명적이다. 불꽃은 낚싯대를 손에 쥔 포식자의 유전자에 감춰진 전생의 본능을 깨운다. 단 한 번의 희열이지만 은어에게 낚인 낚시꾼의 남은 생은 운명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고 매년 여름 섬진강을 찾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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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불구불 흐르는 강물의 안쪽을 따라 여울이 자라고 여울 자리를 따라가며 은어를 낚으려는 사람들로 여름 섬진강은 빼곡하다. 인간과 은어가 벌여온 전쟁사의 결론은 그리 단순하지 않다. 은어들은 각개전투에서 낚시꾼의 포로로 잡히는 패배를 계속해왔지만, 통사通史적 시각에서 보면 누가 누구의 포로가 되었는지 말하기 어렵다. 섬진강 은어는 인간의 입과 손을 길들여서 종족을 보존하고 자신의 길을 지켜왔다. 낙동강과 금강, 영산강에 하굿둑이 들어서고 대형 보가 막아섰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섬진강은 예외였다. 은어를 잡으려고 몰려든 낚시꾼들과 그들이 있어 먹고살 수 있는 섬진강의 생태계에서 이미 은어에게 잡힌 인질의 수를 헤아리기가 쉽지 않다. 인질의 수가 많고 인질들의 영향력이 클수록 바다로 이어지는 은어의 길이 순탄할 것임을 은어도 아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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