젖을 문 아기는 평온하다. 아이의 표정은 세상 어느 말보다 분명하고 또렷하다. 누가 가르쳐준 것도 아닐 텐데, 엄마 품에 안긴 이 작은 생명은 젖을 더듬어 찾으며 살아가는 법을 배운다. 젖을 삼키며 더도 덜도 없이 충만한 얼굴에서 나른한 평화가 읽힌다. 곁에 앉으면 모든 시름도 잊게 하고, 어떤 쇠붙이마저도 녹여 버릴 듯한 웃음이 번진다. 자연스럽다.
운조루(雲鳥樓)가 앉은자리가 그렇다고 한다. 멀리 백두산에서부터 이어온 백두대간이 섬진강을 목전에 두고 멈춰 서면, 지리산이다. 노고단에서 뻗어 내린 형제봉을 주산으로 하고, 아이를 품듯 좌우로 팔을 벌린 어미처럼 왕시루봉과 천왕봉을 각각 좌청룡 우백호로 둘렀다. 마주 앉은 유모처럼 오봉산이 안산이 되고, 병풍을 두르듯 계족산이 조산을 이루어 고택이 자리한 오미동은 젖을 문 아이처럼 평온해 보인다. 오른편 먼발치로 섬진강은 에돌아 가는데, 왼편으로 문수골 골짜기에서 흘러들어 들판을 가로지르는 토지천을 끌어안는다. 산을 등지고 물을 마주하며 넉넉한 들을 이루니 풍수를 모르는 눈에도 더할 나위 없어 보인다. 사람을 살리는 땅이다.
혹자는 선녀가 금가락지를 떨어뜨린 금환락지(金環落地)와 더불어 3대 진혈(眞穴)인 금구몰니(金龜沒泥, 금거북이 진흙에 묻힌 자리)와 오보교취(五寶交聚, 다섯 가지 보물이 모인 자리)가 이곳에 모여있다고 한다. 아무개는 남한의 3대 명당 중 하나로 꼽힌다고도 한다. <조선의 풍수>를 쓴 어느 일본인은 운조루가 비기(祕記)에 전하는 금구몰니 터에 앉았으며, 집을 지을 때 실제로 거북을 닮은 돌이 나왔다고 한다. 이런 명당에 집을 짓고 살면 천운을 얻어 힘들이지 않고 부귀영달을 누린다고 말한다. 일제강점기에 각처에서 이 소문을 들은 사람들이 몰려들었으며, 지체 높은 양반들도 앞다투어 집을 지었다는데 그런 집이 일백여 호에 달했다고 책에 적혀 있다.
구례군 토지면 오미리, 고택 운조루는 조선 영조시대 사람인 유이주가 지었다. 무관 출신이었던 그는 호랑이를 채찍으로 때려 쫓을 만큼 대담했다고 하는데 남다른 그의 경력이 눈길을 끈다. 마흔두 살에 수어청 성기별장으로 남한산성 축성에 관여하고, 쉰 하나에는 정조의 부름으로 함흥 오위장이 되어 함흥성을 쌓았다는데, 탁월한 능력이 있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맹수를 쫓을 담력을 가졌던 유이주도 사색당파 싸움의 소용돌이를 피하지는 못했다. 영조 말기에 유배를 받았다. 귀양살이에서 풀려나며, 가족들과 함께 구례로 들어와 터를 잡고 운조루를 지었다. 1776년이다. ‘구름 속의 새처럼 숨어 사는 집’, 운조루. 당호는 도연명이 지은 귀거래혜사에서 따왔다. 세상 풍파에 시달린 그가 어떤 심정에서 집을 지었을지 짐작이 간다.
섬진강과 나란히 흐르던 19번 국도를 벗어나면 노고단에서 천왕봉으로 이어지는 마루금이 먼발치로 펼쳐진다. 담장이 따로 없다. 커다란 연못을 앞에 두고, 고택의 19칸 행랑채는 커다란 솟을대문을 중심으로 좌우로 길게 서 있다. 주로 일꾼들이 머물던 행랑채의 규모만으로도 아흔아홉 칸 전성기 시절 저택의 당당했던 위세가 만만치 않았을 듯싶다. 열린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바로 사랑채다. 왼편으로 트인 마당 너머 사랑채는 정면 5칸, 측면이 2칸으로 대청마루를 사이에 두고 사랑방과 누마루가 있다. 그리고 책방과 제실로 쓰던 2칸이 북쪽으로 뻗어 있고, 3칸 반짜리 작은 사랑채가 남쪽으로 이어져 전체적으로 사랑 마당을 끼고 ‘ㄱ’ 자 형태를 이루고 있다. 기단을 높여 쌓은 사랑채의 대청마루에 오르면 행랑채 용마루 너머 구만들 들판까지 시선은 막힘이 없다.
안채는 사랑채 사이 중문을 통해 들어가는데, 대문에서 중문으로 이어지는 길은 계단대신 비스듬한 경사로다. 무거운 짐을 지거나 몸이 불편한 식솔을 위한 마음이 읽힌다. 중문을 지나면 안채 마당은 ‘ㅁ’ 자 중정이다. 대청마루를 중심으로 크고 작은 방이 마주하고, 오른편으로는 부엌 칸이 놓였는데 우물이 있는 큰 사랑채 북쪽 마당과 연결되어 있다. 왼편은 2층 구조로 헛간과 행랑채 위로 이어진 계단이 있어 다락방으로 오를 수 있다. 가벼운 살림살이들을 보관하는 용도라고 하는데, 사랑 마당 쪽으로 자그마한 창이 뚫렸다. 나들이가 자유롭지 못했던 시절, 안채 사람들의 숨통을 틔워주던 장소라고 한다. 사랑채 마당에 이런저런 나무들이 많은 데 비해 안채 마당은 실용적이다. 마당 한편 심긴 나무 한 그루는 목련이고, 장독 단지들이 크기별로 정갈하다. 조상들께 제사를 지내는 사당은 북동쪽에 별도 담장을 둘러 마련해 두었다.
사랑채와 안채 그리고 행랑채와 사당으로 이뤄진 운조루는 전형적인 조선시대 양반집이다. 하지만 운조루에 감춰진 진면목은 따로 있다. 나눔과 배려의 철학이다. 이웃과 함께 살아가겠다는 집주인의 생각은 훔칠 수는 없어도 챙겨 나와야 할 보물이다. 타인능해他人能解, 통나무를 깎아 만든 허름한 나무 뒤주는 ‘누구든 열 수 있다’는 글자를 품고 2백 년이 넘도록 이 집을 지켜왔다. 쌀 두 가마니 반이 들어가는 쌀독은 끼니가 어려운 이웃들을 위한 것이다. 누구든 집안사람 눈치를 보지 않고 가져가도록 했다고 한다. 높이 솟은 굴뚝 대신 마당 한쪽에서 간신히 찾아볼 수 있는 키 낮은 굴뚝 또한 배고픈 이웃에게 밥 짓는 연기가 날리는 것조차 조심스러워했던 사대부가의 마음 씀씀이를 엿보게 한다.
운조루와 함께 섬진강에는 이름난 고택이 또 하나 있다. 하동에 있는 화사별서(花史別墅)다. 조선의 개국공신이자 영의정을 지낸 조준의 직계 손인 조재희가 낙향하여 1850년경 지은 집이다. 악양벌에서는 알아주는 천석꾼 집안이었다는데, 마을에서는 ‘조부자집’으로 통한다. 고 박경리 작가의 대하소설, 『토지』의 무대가 되는 최참판댁의 모델로도 알려져 있다.
집이 앉은자리는 천하명당이다. 나라의 풍수를 보는 국풍이 점찍어준 터라고 한다. 고택은 지리산의 또 다른 형제봉에서 뻗어 내린 산자락에 감싸듯 안긴 채, 낮은 경사를 따라 대문에서 집안으로 들어갈수록 점층 되는 위엄을 갖췄다. 안채 역시도 열려있어 맞은편 구재봉 너머 너른 하늘과 악양천이 흘러 나가는 벌판이 한눈에 담긴다. 내다보이는 전답이 모두 조부자 네 땅이었다. 상류사회 세도가의 집답다.
하지만 격랑의 현대사에서 고택의 운명은 순탄치 못했다. 동학농민혁명 당시 조부자 집은 화재로 소실됐다. 다시 손을 봤지만, 한국전쟁 때에도 적지 않은 피해를 입었다. 봉건 신분제가 허물어지듯 화사별서는 초라해지고, 사랑채와 행랑채, 후원에 있던 초당과 사당은 불타 없어졌다. 현재는 안채와 연못, 흙담 그리고 늙어가는 집이 품고 살았던 사람들의 이야기만 남아 드문드문 찾아오는 이의 귀가 닳도록 되풀이된다. 호기심으로 기웃거리던 발걸음마저 뜸해지면 집을 지키는 핏줄의 온기만을 품은 집은 짊어진 기와지붕이 버거울 만큼 고단해 보인다. 고택을 돌아 나오는 길에 고 박경리 작가의 인터뷰 한 대목이 문득 떠 오른다.
“제 삶이 평탄했다면 글을 쓰지 않았을 겁니다. 삶이 문학보다 먼저지요. 모든 인생이 그렇잖아요. 중간중간 불행도 있고……. 인생은 물결 같은 것이 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