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쿤밍-카트만두
눈 덮인 큰 산을 보고 싶었다.
이 생각은 질척대며 끈질기게 나를 따라다녔고, 설산을 볼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가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지경에 이르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눈 덮인 큰 산. 고작 하루만 걷고 돌아오는 건 아쉬웠다. 검게 물드는 산속에서 밤을 보내고, 금빛으로 깨어나는 산과 함께 아침을 맞이하고 싶었다. 히말라야와 몽블랑, 두 곳이 떠올랐다. 몽블랑 트레킹은 1년 전부터 산장을 예약해야 한다는 점이 걸렸고, 비싼 물가도 부담이었다. 그렇다면 히말라야 트레킹? 얼굴이 하얗게 얼어붙은 황정민 배우의 영화 포스터가 떠올라 잠시 겁이 났지만, 목숨을 걸어야 하는 극한의 코스만 있는 건 아니라는 걸 잠깐의 검색으로 알 수 있었다.
국민 트레킹 코스라 불린다는 ABC 코스가 눈에 들어왔다. ABC는 'Annapurna Base Camp'의 약자로, 네팔 포카라에서 출발해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4,130m)까지 갔다가 돌아오는 코스라고 했다. 안나푸르나라니! 풍요의 여신이 사는 곳. 신비롭고 예쁜 이름 앞에 가슴이 뛰었다. 길이 어렵지 않고, 하루 고도차를 무리해서 높이지 않으면 비교적 안전하다는 후기가, 선뜻 무대 앞으로 나오지 못하고 커튼 뒤에서 서 있는 어린 소녀에게 보내는 응원처럼 읽혔다. 나는 떨고 있는 어린 소녀였다. 누군가 그랬다. 용기란 두려움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두렵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보는 것이라고. 그래, 그곳에 가보자. 연일 산행은 처음이라는 점을 고려해, 평균 5박 6일이 걸린다는 코스를 6박 7일로 늘려서, 안 되면 8박 9일로 다녀오면 된다는 마음으로, 넉넉하게 총 15일간의 네팔 여행을 계획하기에 이르렀다.
카트만두행 항공편을 찾기 시작했다. 대한항공 직항 노선이 있었지만, 비용을 줄이기 위해 중국을 경유하는 중국동방항공을 선택했다. 한 번도 이용해 본 적 없는 중국 항공사를 큰 고민 없이 단번에 선택할 수 있었던 건, 히말라야 트레킹을 마음으로 결정한 순간부터 생겨난 약간의 도전 정신 덕분이었으리라 짐작해 본다. 쿤밍에서 1박을 해야 하는 저렴한 경유 항공편의 가격은 50만 원도 채 되지 않았다. 중국 항공기와 쿤밍(?), 그리고 너무나도 낯선 땅, 네팔. 항공권 결제를 마치고 맥주 한 캔을 땄다. 시원한 맥주 한 모금은 설렘, 두려움과 뒤섞여 취기가 돌 듯 온몸으로 퍼졌다.
등산다운 등산이라곤 단 한 번의 한라산뿐이었기에, 준비물부터 막막했다. 필요한 것들을 하나씩 알아보고 구매하는 데에도 시간이 꽤 걸렸다. 등산화, 등산 배낭, 등산복은 새로 장만하고, 등산 스틱과 침낭은 현지에서 대여하기로 했다. 그 밖의 자잘한 준비물들을 챙기고, 체력 관리를 하고, 등산화에 발을 길들이기 위해 북한산을 몇 차례 오르다 보니 어느새 넉 달이 훌쩍 지나 있었다. 그리고 드디어 2017년 10월 11일. 난생처음 큰 등산 배낭을 짊어지고 비행기에 올랐다. 도토리처럼, 조금쯤은 둥글둥글 단단해져서 돌아오리라 다짐하며 네팔로 향했다.
혼자 계획하고 준비한 여행이었지만, 떠날 때는 혼자가 아니었다. 비행기 옆 좌석에는 나와 함께 산에 오를 동행자가 앉아 있었다. 지금 생각해도 참 신기한 일이다. 출발을 한 달쯤 앞둔 어느 날, 전 직장 동료에게서 느닷없이 전화가 왔다. 7년 만의 연락이었다. 그녀는 연인과의 이별 후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다고 했다. 이야기를 들어주고 위로를 건넸다. 전화를 끊으려는 순간, 트레킹은 어디로 가느냐고 그녀가 물었다. 네팔에 간다고 하자, 그녀는 같이 가도 괜찮겠느냐고, 커피 한잔 마시자는 제안을 하듯 가볍게 물어왔다. 나는 항공편 일정을 공유했다. 그렇게 갑자기 뜻밖의 동행자가 생겼다.
중국동방항공은 염려했던 것보다는 쾌적하고 괜찮았다. 하지만 쿤밍 창수이 공항은 인파로 난리였고, 조금만 신경을 건드려도 화를 버럭 낼 것 같은 공항 직원들의 고압적인 분위기는 한밤중에 도착해 피곤한 여행객들을 거칠게 환영해 주었다. 죄라도 지은 사람처럼 바짝 긴장이 됐다. 다행히 영문도 모른 채 끌려가는 불행은 나에게 찾아오지 않았지만, 그날의 공항 풍경은 놀랍도록 신기해서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단체로 얼차려를 받고 나온 기분이랄까. 어서 호텔로 가서 개운하게 씻고 잠들고 싶었지만, 중국의 환영식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기대라고는 전혀 없이, 오로지 하룻밤 잠만 자기 위해 예약한, 쿤밍의 공항 근처 호텔은 바닥에 깔아둔 기대보다도 더 아래에서 우리를 맞이했다. 허름하고 냄새나는 로비와 방, 물이 내려가지 않는 변기, 씻고 나면 더 오염될 것 같은 샤워실. 그 와중에 배까지 몹시 고팠다. 한밤중이었지만 편의점이라도 찾기 위해 주변을 둘러보러 잠깐 나와 보니 근처에 작은 구멍가게가 있었다. 그 앞에서 꼬치구이도 팔고 있었다. 청결해 보이는 곳이 아니었지만, 위생 같은 걸 따지며 고를 수 있는 선택지는 없었다. 우리는 호텔에 사정을 얘기하고 가까스로 달러를 위안화로 환전해, 그 가게에서 파는 미지근한 맥주와 수상해 보이는 꼬치 몇 개로 허기를 달랬다. 숙소로 돌아와 샤워도 하지 않고 잠깐 눈만 붙였다가 이른 아침 탈출하듯 그곳을 빠져나와 공항으로 향했다.
학창 시절 교련 수업의 추억을 불러일으켰던 쿤밍 공항. 쿰쿰했던 쿤밍 호텔. 지나고 떠올리니 웃음이 난다. 바로 눈앞에서 펼쳐지는 믿기 어려운 낯선 풍경을 바라보고, 예기치 못한 경험을 하는 것이 여행의 묘미니까.
쿤밍 경유를 통해 이국적 정취를 호되게 맛보고 드디어 우리는 네팔 트리부반 공항에 도착했다. 후텁지근한 공기에서 향신료와 먼지 냄새가 났다. 공항은 작고 혼잡했다. 택시 호객꾼들 사이에서의 혼란을 피하고자 호텔에 공항 픽업을 예약해 두었고, 나의 이름을 들고 기다리고 있던 친절한 호텔 직원 덕분에 공항 신고식은 치르지 않고, 부드럽게 타멜 거리로 향할 수 있었다.
카트만두 타멜 거리에는 음식점과 숙소, 트레킹 용품점, 캐시미어 상점, 옷 가게들이 빽빽하게 모여 있었다. 거기에 자동차와 오토바이, 자전거, 보행자가 뒤엉켜 잠시라도 한눈을 팔면 자동차 타이어가 발등을 살포시 지르밟고 갈 것처럼 복잡하고 아슬아슬했지만, 신기할 정도로 큰 소란 없이 모든 것이 슈욱, 슈욱 돌아가는 재미있는 곳이었다.
호텔에서 잠깐 여독을 풀고, 우리는 저녁으로 커리와 달밧을 먹으며 에베레스트 맥주 한 병을 주문했다. 컵 위에 덮인 맥주 거품이 하얀 눈처럼 보였다. 드디어 내가 카트만두에 왔구나! 이틀 뒤면 트레킹의 출발지인 포카라로 떠난다. 안도감과 기대감이 동시에 밀려와 가슴이 벅차올랐다.
이 글은 2017년 10월의 여행을 기록한 것으로, 지금의 현지 풍경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