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팔 여행기 #2] 깨달은 자의 여유, 붓다 에어

카트만두-포카라-시와이

by 진초록


불편함도 안락함도 없는 낯선 침대 위로 카트만두의 아침 햇살이 비쳐 들었다. 피로감에 몸이 무거웠다. 익숙한 내 방의 침구가 아니면 깊은 잠에 들지 못하는 유형의 인간이라 여행지에서의 피로는 낯설지 않은 감각이었지만 이런 식으로는 여행도 점점 쉽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로부터 8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강하고 뚜렷한 욕구가 생기지 않는 한 여행을 떠나지 않게 된 것을 보면, 그날의 나는 오늘을 예견했던 것 같다. 어디서든 잘 자는 사람이 부럽다.


늦은 조식을 먹고 쇼핑을 하러 나섰다. 흥정해야 하는 로드숍에서의 쇼핑은 은근히 재미가 있었지만, 흥정에 약한 나에게는 허탈한 소모전에 불과했다. 용기와 눈치를 겨우 짜내, 숫자로 줄다리기를 한 끝에 합의된 금액이, 옆집에서는 흥정을 시작도 하기 전 가격이라는 걸 알아차리는 식이었다. 이웃한 상점마다 똑같은 디자인의 옷들이 즐비했고 부르는 게 값이었다. 역시 나 같은 인간에게 최고의 딜은 정찰제였다. 그렇게 번번이 굿딜에 실패하고 들어선 필그림 북 하우스는 내게 마음의 평화를 안겨주었다. 제품에 붙어있는 가격 스티커의 친절함에 감개무량했다. 가격 밀당의 피로가 녹아내린 나는 긴장을 푸는 것을 넘어 지갑의 고삐마저 풀고 있는 평화의 소행을 허락하였다. 네팔 물가치고는 꽤 비싼 에스닉풍 원피스 하나를 집어 들었고, 기념품도 이것저것 듬뿍 골라 담았다. 마음의 평화란, 때로 이렇게 무서운 것이었다.



다음 날 아침, 트레킹의 출발지인 포카라로 이동하기 위해 택시를 타고 공항에 도착했다. 카트만두의 국내선 터미널은 큰 배낭을 짊어진 사람들로 북적였고 무척 더웠다. 우리는 예상보다 일찍 도착한 덕분에 정오에 출발하는 예약 편을 10시 50분 출발 편으로 앞당겨 발권했지만, 연착 끝에 결국 정오가 되어서야 비행기에 오를 수 있었다. 국내선은 연착이 잦다고 익히 들었던 터라 탑승할 때까지는 맥주 한 캔을 나눠마시며 즐기는 마음으로 기다릴 수 있었다. 문제는 그다음부터였다.

조그만 비행기에 승객이 모두 오른 뒤에도 한참 동안 이륙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실내는 더워도 너무 더웠고, 에어컨 같은 건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 분위기였다. 시간은 계속 흐르고 비행기는 계속 그 자리 그대로다. 그러다 땅콩을 나눠준다. 또 시간이 지나 이번엔 물을 준다. 승무원들이 다시 한 바퀴 돈다. 이번에는 사탕이다. 비행기는 여전히 움직이지 않는데, 그들은 이상하리만치 여유가 넘쳤다. 붓다(Buddha) 에어. 이름처럼 깨달은 자의 여유인가 싶었다. 찜통 같은 비행기 안에서 정확히 한 시간 동안 푹 쪄지고 나서야 마침내 이륙했고, 30분을 날아서 포카라에 도착했다.



포카라 공항은 예상보다 깨끗했다. 수도인 카트만두 공항보다 훨씬 쾌적해서 조금 의아할 정도로 정돈된 풍경이었다. 공항을 빠져나오자 맑은 하늘이 우리를 반겼다. 기분이 상쾌했다. 내 이름이 적힌 종이를 들고 있는 사람이 눈에 띄었다. 예약해 둔 숙소의 스태프였다. 숙소는 등산 장비 대여와 포터 섭외를 한 번에 할 수 있는 게스트 하우스였다. 우리는 그의 차를 타고 10분도 채 걸리지 않아 그곳에 도착했다.

한식으로 차려진 밥을 먹고 조금 쉬다가 포터와 미팅을 했다. 6박 일정 동안 묵게 될 롯지와 대략적인 동선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고 나서 대여할 장비를 고르고, 숙소에 미리 요청해 둔, 입산 허가증인 퍼밋과 팀스를 전달받은 것으로 트레킹을 위한 모든 준비는 끝이 났다. 내일은 드디어, 트레킹을 시작하는 날이다. 무탈하게 잘 다녀올 수 있기를 기도하는 마음으로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포카라의 아침이 밝았고, 창밖의 새소리를 들으며 잠에서 깨어났다. 선잠을 자 눈에서 미열이 느껴지는 듯했지만, 아침 햇살이 드리운 숙소의 싱그러운 마당을 보고 있자니 정신이 맑아지고 기운이 돋았다. 나설 채비를 마치고 여유롭게 아침 식사를 했다. 전날 사전 미팅했던 포터가 도착해, 우리 셋은 지프를 타고 시와이로 출발했다. 굽이굽이 비포장 산길을 덜컹덜컹 출렁출렁 꼬박 2시간 반이나 달려 트레킹의 출발점인 시와이에 도착했다. 차에서 내려 시달린 허리를 풀어주는 잠깐 사이 내리쬐는 땡볕에 머리가 뜨거워졌다.





지난 저녁, 엄마로부터 본가가 팔렸다는 연락이 왔다. 본가가 있는 동네는 뉴타운으로 지정된 지 15년을 넘기면서부터 재개발 반대사무소가 차려졌고, 찬성과 반대로 편이 나뉘면서 생겨난 갈등으로 동네에 긴장감이 감돌았다. 집을 팔고 이사를 가는 이웃이 늘어갔고, 급기야 재개발에 반대 의사를 표시하는, 살풍경한 빨간 깃발이 이 집 저 집 내걸리면서 동네는 흉흉해졌다. 더는 그 분위기를 견딜 수 없었던 부모님도 결국 이사를 결정하게 된 것이었다.

집을 내놓았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골치 아픈 낡은 집이 빨리 팔리기만을 바랐다. 그런데 막상 집이 팔렸다는 소식을 들으니 기분이 이상했다. 유년기부터 성인이 되어 늦은 독립을 결정하고 나오기까지, 참 긴 세월 추억이 덕지덕지 묻은 집인데… 그 집에서 기뻤던 그리고 아팠던 기억이, 순수하고 연약했던 어린 날의 이기심과 뒤엉켜 마음이 조금 아려왔다. 시원섭섭했다.

노인이 되면 변화를 감당하기가 젊은이들보다 훨씬 어려운 법인데, 그 어려운 선택 앞에서 큰 용기를 내야 했을 부모님을 생각하니, 아쉬움은 가라앉고 감사한 마음이 떠올랐다. 단단한 껍질이 조심스럽게 부서지고 곧 햇빛으로 모습을 드러낼 무언가를 기대하는 것 같은 희망찬 기분도 들었다.

옛것을 정리하고 과감히 박찰 용기를 내지 않으면, 새로운 출발지 앞에 설 기회도 얻지 못한다. 당장은 두려울지라도, 낯선 것들을 만나며 너덜너덜 경험치를 늘리고 살아가는 것이 삶을 건강하게 해주고, 그러한 삶이 한 사람이 지닌 색깔을 아름답게 빛내줄 것이라 믿는다.



나는 등산화 끈을 단단히 묶고, 눈부신 태양이 쏟아지는 산길을 보며 긴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를 향해 힘차게 첫걸음을 내디뎠다.

출발이다. 낯선 길을 향한 새로운 출발!


이 글은 2017년 10월의 여행을 기록한 것으로, 지금의 현지 풍경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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