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은, 말할 준비가 안 됐어요

타인의 언어는 비수가 되어 날아와 꽂힌다

by 진달

| 내 소식을 전하지 않기 시작했다


"나 퇴사했어"

"음? 갑자기? 너무 갑작스러운데 ㅋㅋ 어디 이직해?"

"아니, 그건 아니고"

"그럼 뭐 하게?"

"그냥 좀, 음..."



고등학교 친구와의 실제 대화 내용이다. 왠지 나를 설명해야 할 것 같은 압박감이 느껴졌다. 멀쩡하게 대기업 잘 다니고 있는 친구의 입장에서는 내 결정이 아주 뜬금없어 보였을 수도 있겠다. 퇴사 소식을 비롯해 어떤 중대한 결정을 내렸다는 사실을 주변 사람들과 공유하는 건 참 조심스럽다. 상대방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모르기 때문이다. 내 결정에 대해 100% 확신이 없는 경우라면, 다른 사람의 반응을 듣고 결심과 감정을 가차 없이 흔들리기도 한다.


퇴사하고 정말 잠깐동안 환기를 위해 여행을 떠나겠다고 했을 때, "그렇게 놀고 싶어?"라는 말을 들었다. 어딘가 한 대를 얻어맞은 것 같이 벙쪘다. 도대체 뭘 안다고 그렇게 말씀하셨을까. 내가 어떤 고민을 하고 있는지, 왜 떠나는 것밖에는 선택지가 없다고 느꼈는지를 이해해 보려는 제스처 없이 그저 하나의 색안경을 끼고 나를 바라보는 기분이었다. 못난이가 된 것 같은 기분. 상대방은 구체적인 설명을 요구했지만, 내 말에 뒤이어 나오는 상대방의 반응은 내 입을 닫게 만들기 충분했다. 그 이후로 점차 나를 설명하거나, 이해시키려는 노력을 그만두기 시작했던 것 같다. '그래, 그냥 그렇게 보세요.'


그런 리스크를 지고서라도 내 결정을 지인과 공유하려는 이유는 뭘까. 상대가 나를 기억해 주고 이해해 주길 바라기 때문이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과의 대화는 항상 서로의 소식 업데이트하는 것부터 시작된다. 요즘 근황, 다니는 회사는 어떤지, 요즘 새로 시작한 취미가 있는지 등등. 서로의 인생이 너무 멀어지지 않기 위해 서로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따라잡으려는 마음이 크다. 하지만 그 대화가 판단과 평가로 점철되는 순간, 대화는 살얼음판을 걷는 듯 아슬아슬해지기 시작한다. 상대와의 관계를 다시 생각해 보게 되기까지 한다.




| 모두에게 이해받지 않아도 괜찮다


타지에서 만난 50대 부부와 식사를 할 기회가 있었다. 두 분 다 은퇴는 아니고 1년간 재정비를 위해 퇴사를 하셨는데, 아직 주변에는 말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심지어 부모님에게까지도. 자식의 앞날을 부모님이 걱정하는 건 나이를 불문하고 똑같은가 보다.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는데, 내가 퇴사 소식을 거의 알리지도 않았고, 다른 나라에 와있다는 것도 아예 알리지 않았다고 말하자, 너무 잘했다며 칭찬을 해주셨다. 그게 현명한 거라고. 예쁜 것을 보면 인스타에 올리고 싶지만, 그때 마주할 법한 반응들은 "어디 갔어?", "얼마나 있으려고?", "그만 일할 때 됐다, 돌아와라" 등등. 그런 반응들에 일일이 해명하거나 설명할 자신이 없어서 지금은 소셜미디어를 끊은 상태다. 그 질문들이 관심과 애정인지, 호기심을 빙자한 날카로운 평가의 시선인지는 받아들이는 사람이 제일 잘 느낀다. 아직은 그런 반응들을 다 받아들일 정도로 마음이 단단하지 못하기 때문에, 나를 보호하려는 발악이기도 하다.


고마웠던 건, 내가 믿고 이야기를 터놓은 몇 명의 친구 중 어느 하나도 "도대체 왜?"라는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럴 것 같은 친구들만 무의식적으로 이미 알고 있었던 걸지도. 놀라긴 해도 너무 잘했다고, 뭘 해도 잘할 거라고 이야기해 주고, 주변에 비슷한 결정을 내린 사람들이 얼마나 잘 살고 있는지 안심시켜주기까지 했다. 섣불리 조언을 하려 하지도 않았고, 그저 가만히 이야기를 들어주고 자신도 비슷한 고민을 했던 경험을 나누며 그렇게 따뜻하게 안아주었다. 예전에는 친구들과 어느 정도 가볍도 얕은 주제들에 대해 많이 나눴지만, 이렇게 깊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친구들과 한 뼘 더 가까워진 기분이 들었다.


취직을 아예 하지 않고 처음부터 창업에 길에 뛰어들었던 친구도 그렇게 말했다. 가치관이 달라지면 어쩔 수 없이 만나는 사람들도 달라진다고. 주변에서 계속 안될 거라고, 취직이나 하라고 말하는 사람들과는 연을 끊었고, 처음부터 아예 취업이라는 길을 선택한 사람들과도 대화가 잘 통하지 않아 서서히 멀어졌다고 말한다. 예전에는 '다 나 잘되라고 하는 말'이라고 생각하며 쓴소리도 받아들이려고 노력했지만, 그런 부정적인 면을 내가 생각해보지 않은 것도 아니었기에 그저 불안감만 가중시키는 역할밖에 되지 않았다. 자신이 확고하게 옳다고 생각하는 잣대로 남을 평가하는 사람을 만나는 것이 이제는 많이 불편하다. 몇 년을 알고 지냈든, 심지어는 가족이라고 해도 말이다.


전후 사정을 다 알지 못하는 이상, 그리고 그렇게까지 그 사람에게 관심이 있지 않은 이상, 자신만의 가치관으로 남을 바라보기란 참으로 쉬운 일이다. 대부분은 특별히 악의가 있다거나, 상대방을 괴롭히려는 의도는 없고 그저 별 생각없이 툭 말을 내뱉는 경우가 많다. 그들을 탓할 생각은 없지만 그런 말로부터 나를 보호할 건 역시 나밖에 없다. 그들에게 이해받지 않아도 괜찮다.


내가 되고 싶은 사람은 별거 없다. 그냥, 대화하는 게 즐거운 사람.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힘이 돼줄 수 있는 사람. 그냥, 그거면 된다. 그리고 나를 믿고 어떤 얘기도 할 수 있도록 다정한 사람이 되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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