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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담 Aug 24. 2023

괴상한 슈퍼맨 할아버지의 진짜 정체[3편] 마지막

우리 고시원엔 10년째 괴상한 슈퍼맨 할아버지가 산다: 후속 편

그날 이후 시작된 슈퍼맨의 활약


그날 이후부터는 반전의 나날이었다. 어르신은 선의의 제안에 보답이라도 하듯 고시원 곳곳에서 눈부신 활약을 하고 다녔다. 첫 번째 역할은 바로 '청소반장'이었다.


분명 그 어떤 다른 일도 하지 마시라고 말씀을 드렸건만 어르신은 틈 날 때마다 고시원 곳곳을 누비며 청소반장을 자처했다. 복도에 떨어진 쓰레기를 수시로 줍거나, 옥상에 버려진 담배꽁초 등을 수거하시곤 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고마운 일은 매일같이 출근길에 음식물쓰레기를 들고나가신다는 점이었다. 음식물 쓰레기는 다른 쓰레기들보다 몇 배는 가벼웠지만, 냄새는 결코 가볍지 않은 궂은일이었다.


허나 아쉽게도 주방에서는 2인자였는데, 이미 주방을 주름잡는 요리왕 청년이 있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어르신은 한시도 가만히 계시질 않았다. 아주 가끔, 아니 종종 주방에서 구수한 된장찌개를 끓여 고시원 전체를 된장 범벅으로 만들기도 했지만, 식기들을 늘 반듯하게 정리했으며 밥통에 밥이 비는 날 없이 매일 아침저녁으로 쌀을 짓는 우렁각시 역할을 했다.


그 덕에 고시원 사람들은 언제 어느 때나 어르신의 손에서 고슬고슬하게 지어진 따신 밥으로 든든하게 아침을 시작하기도 하였고, 허기진 하루를 채울 수도 있었다. 참고로 우리 고시원에는 무언의 국룰이 있는데, 맨 마지막에 밥솥을 비운 사람이 다음 사람이 먹을 수 있도록 밥을 하는 것이었다. 난 큼지막하게, 프린트를 하여 "마지막에 드신 분이 밥을 해주세요!"라고 써붙여두었지만 곧 무용지물이 되었다. 사람들은 알까? 고시원 생활을 하는 내내 군소리 없이 늘 밥심을 챙겨준 누군가가 있었다는 것을.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간밤에 어떤 여학생이 새파랗게 겁에 질려 파르르 떨리는 목소리로 전화를 해서는, 자기 손바닥만 한 바퀴벌레가 출몰했다며 발을 동동 굴렀다. 곧 울기 직전이었다. 나도 울뻔 했다. 밤11시였으니까 말이다. (왜 항상 야밤에만 이런 일이 생기는지 모르겠다.) 바퀴벌레 한 마리를 박멸하러 고시원으로 출동하기에는 그날 하루가 너무 고단했다. 간신히 아이들을 재우고, 달콤한 맥주 한잔을 목구멍으로 막 밀어 넣으려 참이었다.

출처: 픽사베이

이번에도 어르신 나섰다. 어르신은 이 황당하기 그지없는 사건에도 비장한 각오로 임하셨다. 위풍당당하게 여학생의 방으로 가서, 단번에 바퀴벌레 녀석을 무찔러주셨는데 이럴 때는 마치 영웅이라도 된 듯 의기양양한 목소리로 "다 해결했어~ 걱정하지 마셔~~ 원장님~~!!" 하며 씩 웃으시곤 했다.


비슷한 사건으로는 대망의 '쥐'사건이 있었다. 서울 한복판 몇십 년의 세월을 견딘 고시원 건물은 매우 낡았으며, 주변엔 온갖 식당과 술집 카페들이 뒤섞여 있었기에 가끔 쥐가 출몰하곤 했다. 지금까지 딱 한번 쥐를 실제로 맞닥뜨렸는데, 그 쥐를 맞닥뜨린 것도 말끔히 해결해 준 것도 다름 아닌 어르신이었다.

출처:픽사베이


뭐 이런거 쯤이야, 하는 천하태평한 목소리로 전화를 거셔서는, "내가 아까 창고에서 우연히 쥐를 발견했는데 말이야~ 쥐덫이랑 쥐 끈끈이를 쥐새끼 동선에다가 똬악 놓고 잡아줄 테니까 걱정 마셔 원장님~~." 하고 으름장을 놨다. 며칠 후 정말 망할 놈의 쥐새끼를 잡았다는 기쁜 소식이 들려왔다. 만일 그것들이 돌아다니다가 여학생들 눈에 띄기라도 했다면.... 생각만 해도 아찔한 일이었다.


또 한 번은 한파가 불어닥쳐 서울이 꽁꽁 얼어붙은 어느 날 밤 황급히 전화를 걸어오셨는데, 전화를 받은 날 중 가장 당황했던 날로 기억된다. 고시원에 소방 비상벨이 쩌렁쩌렁 울려 퍼지고 있다는 믿지 못할 소식이었다.


비상벨이 울리면 정말이지 긴장되지 않을 수 없다. 2018년, 대한민국을 떠들썩하게 만든, 안타까운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간 '종로 고시원 화재 사건'이 있었다. 기억하시는 분들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35년 된 건물에 스프링클러도 화재감지기도 없어 대처가 늦었고 비상구는 단 한 개였으며, 완강기를 타고 탈출해야만 했다고 한다. 그마저도 5만 원 더 저렴한 창문조차 없는 미니룸에 살던 사람들은 더 많은 피해를 입었다고 들었다. (그 이후로 신소방법이라는 새로운 소방법이 생기면서 고시원 건물을 신축할 때는 신소방법을 적용하는 것으로 바뀌었고, 고시원 허가가 까다로워졌다.)


아무튼 이러한 이유 때문에 비상벨이 오작동이라도 하는 날에는 나도 입실자들도 모두 혼비백산되기 일쑤였다. 비상벨이 종종 오작동을 할 때면 어르신은 어김없이 우리에게 전화로 이 사실을 알렸다. 마치 24시간 초소를 지키는 믿음직스러운 보안관처럼 빈틈없는 순찰을 한 뒤, 큰일이 아님을 확인하고는 가장 먼저 안심시켜주시곤 했다. 대부분의 사건은 욕실에서 비롯된 뜨거운 수증기 때문이거나, 머리를 말리면서 천장 방향으로 쐬게 되는 헤어드라이기 열기가 오작동의 주된 원인이었다.


특히 한여름엔 혹독한 폭염과 장마, 살벌한 태풍을 지나며 온갖 사건들이 터지는 통에 원장의 멘털이 쿠쿠다스처럼 바사삭 부스러지는 날이 잦았다. 정말 당장이라도 팔아넘기고 싶은 충동이 불쑥불쑥 찾아오는 계절이었다. 역대급 사건은 아래층 누수였다. 몇 주간 비가 내리 오는 통에 마음을 졸이며 조마조마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는데 역시나, 그냥 지나갈 리가 없었다. 아래층 상가 천장으로 물이 줄줄 새는 바람에 당장 영업에 지장이 간다며 탁구장 사장님이 단단히 화가 나신 것이었다.


이 소식을 들은 남편이 황급히 아래층으로 출동했다. 사장님은 남편을 보자마자, 얼굴이 시뻘게져 화산처럼 참았던 분노를 폭발시키려던 참이었다. 사람 좋은 남편은 원래 싫은 소리도 잘 할 줄 모르고, 남들과 부딪히는 걸 싫어하는데 물이 새서 남의 업장에 피해까지 끼쳤으니 미안해서 어쩔 줄 몰라했다.


그런데 그때! 어디선가 구세주처럼 어르신이 나타났다. 알고 보니 어르신은 그 업장에서 오랫동안 소소하게 일을 봐주시고 계신, 일명 초장기 아르바이트생 신분이었다. 매일 같이 출근을 하시더라니, 아래층인 줄을 꿈에도 몰랐다.


"아이고 사장님, 원장님이 뭐 일부러 그랬다나요? 비가 이렇게 많이 오는데 이 낡은 건물이 당해낼 재간이 있나, 근데 일단 이거는 호스로 이렇게 물을 쭉~~ 빼서 말리면 되고, 건물주한테도 이야기를 해보자고요~~"


사장님은 오랜 기간 신뢰를 가지고 일을 도와주고 있는 장기 아르바이트생의 말에 금세 화가 조금 누그러진 듯했고, 어르신은 그 찰나를 놓치지 않고 얼른 건물 시설 관리자에게 전화를 걸어보라며, 남편 옆구리를 콕콕 찔렀다. 참으로 노련한 처사였다. 


이 웃지 못할 시트콤의 마지막 관전 포인트는 따로 있었다. 어르신은 심란해하는 아들뻘의 원장을 위로라도 하려는 듯, 두툼한 한쪽 어깨를 한껏 내밀어 어깨를 퉁- 마주치더니, 은근슬쩍 세 손가락으로 엉덩이까지 톡! 톡! 토닥이며 찡끗하며 웃어 보이는게 아니겠는가. 그야말로 압권이었다.


"씨익-(찡긋)."


그날로 남편은 어르신의 마력에 완전히 홀린듯 보였고, 우리의 갑을 관계는 90%정도 허물어졌다. 늙은 슈퍼맨의 KO승이었다.

출처:픽사베이


어르신의 다짐은 진심이었다. 정말로 고시원 곳곳을 '제 집처럼' 여기며 더럽진 않은지, 불편한 점은 없는지, 수상한 사람은 없는지 살뜰히 살피고 있었다. 때때로 자신이 생각하는 '집'의 기준에서 벗어나는 일들이 벌어진다 느끼면 마치 자신의 삶의 균형을 되찾으려는 듯 슈퍼맨처럼 나타나 모든 일을 해결했다.


자신의 엉덩이를 토닥이며 익살스럽게 웃던, 어르신과의 그날 일을 떠올리며 당사자인 남편은 그때의 상황을 이렇게 평가했다.


"아니.. 엉덩이를 톡톡 치시면서~ 수고했다는 듯이 찡끗 웃으시는데. 기분이 그렇게 나쁘지가 않더라고. 마치 우리 부모님에게 위로를 받는 기분이었어."

"위...로?"

"응, 위로. 회사만 다니다가 고시원 인수해서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자질구레한 일부터 대형사고까지. 일 터질 때마다 솔직히 멘붕이잖아. 근데 어르신이 뭐랄까.. 뒤에서 조용히 받쳐주고 있는 것 같아서. 든든하기도 하고."

"그렇구나, 나도 솔직히 이렇게까지 진심으로 도와주실 줄은 몰랐어."

"아직도 걷는 게 많이 불편해 보이시더라. 안 아프셨으면 좋겠네."


우리가 언제까지 이 고시원을 운영할지 모르겠다. 아마도 그리 길게 운영하지는 못할 것 같은 슬픈 예감이 든다. 우린 아직 젊고, 천년만년 고시원만 하다가 늙어 죽을 순 없으니까 말이다.우리가 이곳을 떠나고 4대 5대 원장이 새로운 주인으로 나타나는 그날까지 과연 어르신은 이곳에 여전히 머물러 있을까? 아니면 더 좋은 보금자리를 찾아서 새 출발을 하실 수 있을까? 잘 모르겠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 어떤 사람이 오더라도 슈퍼맨 유니폼 대신, 초록색 운동복 바지를 장착한 괴상한 슈퍼맨의 매력에 빠지게 될 것이며, 그의 진정성에 환호하게 될 것이라는 근거 있는 확신이었다.

출처:구글이미지/내용과 사진은 무관합니다.


남편의 말처럼, 이왕이면 오래오래 건강하셨으면 좋겠다. 그리고 부디 우리가 이곳을 떠나는 날, 함께 이곳을 떠나 더 나은 보금자리에서 새로운 출발을 하셨으면 한다.



어르신에 관한 에피소드를 우선 3편으로 마무리 합니다. 이 글의 주인공이 더 늦기 전에, 다시 한번 힘껏 날아오르길 진심으로 바래봅니다.


구독&라이킷은 병아리 작가에게 큰 힘이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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