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진담 Aug 21. 2023

괴상한 슈퍼맨 할아버지의 진짜 정체[2편]

우리 고시원엔 10년째 괴상한 슈퍼맨 할아버지가 산다: 후속편

드디어 어르신이 '집'으로 돌아왔다.


어르신의 입원소식을 들은지 2주가 흘렀다. 어르신은 '집'에 돌아오면 연락을 주신다고 했는데, 소리 소문 없이 복귀하셨다. 어느 날 우연히 CCTV를 확인하다가 낯설고 흔치 않은 쨍하디 쨍한 초록색 운동복 바지를 입고 서성이는 남자를 발견했는데, 굳이 누구라고 설명하지 않아도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바로 그 어르신이라는 것을!


원색의 바지가 어찌나 핏한지 살짝 민망할 정도였다. 생각보다 육중한 체격의 어르신은 아슬아슬하게 골반에 걸쳐진 츄리닝을 입고 주방과 복도를 이리저리 활보하고 계셨다. 웃옷은 하얀색 러닝을 입은, 그야말로 대략 난감의 패션이었다. 화면을 보고 있자니 탄식이 절로 나왔다. 앞으로 젊은 친구들을 많이 받아야 하는데, 방 구경 온 친구들이 어르신과 마주치기라도 하는 날엔 그날 장사는 공칠 것이 분명해 보였다.


이내 그 어르신의 아찔한 뒤태를 보며, 얼마 전 어르신 방에서 보았던 사진 속 젊은 날의 장발머리 사내를 떠올렸다. 사진 속 남성과 현재의 어르신은 그야말로 상상도 안 되는 모습이었다. 퇴원 후 어째서 연락을 하지 않으신 것인지 모르겠지만, 그날 저녁 먼저 전화를 드려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사이 어르신에게 집이라 불리는 고시원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세 번째 고시원 원장이 나타났으며, 캐캐묵은 주방은 의욕 넘치는 신입 원장의 손길을 거쳐 반짝반짝 빛이 나고 있었다. 비록 다이소에서 구비한 초저렴 프라이팬과 냄비였지만 변신은 대성공이었다. 식기건조대에 어지럽게 쌓여 있던 그릇들은 새하얀 도기들로 교체되고 각각의 제자리를 찾아갔다. 꾸질꾸질했던 각종 양념장들은 아기자기한 공병에 담겨 '소금', '설탕' '참기름' 등과 같은 단정한 이름표를 달고 다소곳이 정리되어 있었다.


한결 깨끗해진 주방이 낯설었는지 이곳저곳을 꼼꼼히 살피며 어색한 동작으로 주방을 빙빙 돌고 있었다.  10년이란 세월 동안 생활하면서, 매우 익숙한 본인만의 패턴이 있었을 것이다. 그릇은 왼쪽 위, 숟가락은 오른쪽 서랍, 물컵은 선반 위와 같이 굳게 지켜온 사소한 습관들 말이다. 하지만 이제는 새로운 규칙에 따라 습관도, 세 번째 원장과의 관계도 원점으로 돌아가 다시 만들어야 할 시점이었다.



어르신과의 기싸움이 시작되었다.


우리에게도 고민이 있었다. 이 어르신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우리는 고시원을 인수하면서 낡고 오래된 시설과 흔적들은 깨끗이 지우고, 저렴한 입실료 또한 인상시킬 원대한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우리가 원하는 수준의 입실료를 낼 수 없거나 가격 인상을 수긍하지 않는 사람들은 자연스레 이곳을 떠나게 될 것이었다. 시설도 사람도 입맛대로 바꾸고 싶었다.


하지만 이 어르신의 경우 조금 특별 사연을 가지고 있었다. 무려 10년 동안 이곳을 지켜온 일종의 터줏대감이었고 1대 2대 전 원장들을 거치며 고시원 안팎의 상황을 꿰뚫고 있었다. 게다가 각종 분리수거는 물론 쓰레기 뒤처리를 도맡아 하다가, 계단에서 사고를 당하신 분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새로운 원장이랍시고, 입실료를 따블로 올릴 것이니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라는 매정한 말은 차마 할 수가 없었다. 입실료를 최대한 끌어올려 빠른 시일 내에 수익률을 높이는 것이 응당 사장의 일이었지만, 고시원을 인수하자마자 악덕 사장이 되긴 싫었다.



남편과 나는 머리를 맞대고 어르신의 거취에 대해 몇 가지 안을 생각해 보았다.


1. 20만 원이라는 입실료를 유지하고, 기존처럼 일을 도와달라고 한다.

그런데 기존처럼 일을 도와달라고 하기에는, 예전에 비해 몸이 많이 불편해 보이셨다. 거동도 수월하지가 않고 팔도 아직 성치가 않으신 것 같았다.


2. 20->40만 원으로 입실료를 인상하고 다른 입실자들처럼 동등하게 지낸다.

그렇다고 해서 40만 원으로 가격 인상을 하는 것도 무리가 있어 보였다. 모르긴 몰라도 주머니사정이 깃털보다 가벼워 보이는데, 하루아침에 길거리로 내모는 것 같아 오장육부가 까슬까슬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결국 새로운 관계를 모색하기 위한 제3안을 생각해 냈다.


3. 20만 원이라는 입실료를 유지하고, 아주 비상시에만 도움을 받기로 한다. 훌륭한 생각이었다. 어차피 우리는 24시간 고시원에 상주할 수 없는 입장이었다. 피치 못할 순간에 손과 발이 되어줄 조력자가 필요했다. 서로에게 윈윈 하는 관계가 될 것이며, 선의를 가진 좋은 원장의 이미지도 줄 수 있을 것이다.


"어르신, 안녕하세요? 언제 돌아오셨어요. 말씀 안 하셔서 몰랐어요."

"아.. 어어, 원장님. 어제저녁에 왔어요. 정신이 없어서 연락도 못했네요. 미안합니다. 그 사이에 고시원이 많이 바뀌었네요. 반짝반짝 해지고~ 신경 많이 쓰셨네요 원장님. 앞으로 잘~좀 부탁드립니다."

무엇을 잘 부탁한다는 걸까? 사이좋게 지내자는 건지, 지금처럼 저렴하게 지내게 해 달라는 건지- 그야말로 아리송한 말이었다.


"아.. 네, 여기저기 손 볼 곳이 좀 많더라고요. 그래서 말인데, 제가 한 가지 제안을 드리고 싶은데..."

"뭐든지 편하게 말씀하십시오! 원장님"

어르신이 있는 힘껏 힘주어 대답했다.


"사실 앞으로 저희가 입실료를 순차적으로 인상할 계획입니다만, 어르신은 20만 원만 내시고 계시잖아요... 기존 입실료 그대로 내시고, 다만 저희가 없을 때 아주 가끔 일을 좀 도와주실 수 있을까요? 기존에 하시던 쓰레기 정리랑 분리수거 등등 그 외 다른 일은 일절 하지 마셔요. 몸도 불편하신데 왔다 갔다 하시다가 다치시면 오히려 곤란해요. 대신 정말 꼭 필요할 때 한 번씩 연락드릴게요. 자주는 아닐 거예요."


"아이고~ 원장님, 그래주시면 감사하죠... 나이 먹으니까 안 아픈 데가 없네요. 아들놈이 월세를 보내주고 있는데, 병원비까지 나가서 요즘 여간 미안한 게 아닙니다. 여긴 내 집이나 다름없어요.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제 집처럼 신경 쓰겠습니다."


마지막 말이 자꾸 마음에 걸렸다. 제 집처럼 신경 쓰겠다니... 말끝마다 원장님, 원장님 하며 극진한 어조로 대꾸하는 것도 부담스러웠다. 게다가 20만 원짜리 월세는 아드님이 내준다고? 경악할 일이었다. ‘뭐야? 아들이 돈을 내주고 있었어? 왜 모시질 않는 거지?‘ 하는 생각을 하다가 불현듯 20대 내내 극심한 생활고에 나를 떠밀었던 못난 아빠 생각이 나서, 빠르게 모진 아들 편을 들기로 했다. ‘20만 원이라도 다달이 부치는 게 어디야. 누구나 속사정이 있는 법이니까.'


아무튼 원장의 공백을 서포트 해줄 든든한 수비수를 얻었으니 나로서는 다행인 일이었다. 나는 누군가의 소중한 보금자리를 하루아침에 박탈할 수 있는 권력자였고, 생존문제와 직결된 중대사항을 쥐락펴락 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돼있었다. 몰랐다. 내가 그런 우위를 점할 수도 있다는 것을 말이다. 회사에선 늘 누군가의 권력 아래 있었던 적이 많았던 것 같다. 아니 늘 그랬었다. 그럴 때마다 얼마나 내가 무기력해졌었는지를 회상하자, 잠깐의 우월감은 곧 알 수 없는 혐오감이 되어 부메랑처럼 돌아왔다. 차갑게 날이 선 부메랑이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어르신과 우리는 철저한 갑을 관계처럼 보였다. 괴상한 슈퍼맨의 진짜 정체를 알기 전까지는 말이다.




분량 문제로 나눠서 업로드 합니다.


어르신의 이야기를 쓰는 내내 마음이 좀 울컥울컥하더라구요. 지금도 현재진행중인 이야기들이라서 아마도 더 그러한 감정이 들었던것 같습니다. 괴상한 어르신의 진짜 정체, 슈퍼맨이라고 불리게 된 진짜 사연이 궁금하시다면 다음 편을 이어서 봐주세요:) 다음 글도 빠른시일 내에 업데이트 하겠습니다.


이전글: 우리 고시원엔 10년째 괴상한 슈퍼맨 할아버지가 산다. [1편]


구독&라이킷은 병아리 작가에게 큰 힘이됩니다.

감사합니다.

작가의 이전글 우리 고시원엔 10년째 괴상한 슈퍼맨 할아버지가 산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