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한 직장 동료가 자신을 '알부남'이라고 소개한 적이 있다. ‘알고 보면 부드러운 남자’라는 것이다. 외모는 우락부락 보여도 마음은 한없이 부드럽다고 강조(?)해 다들 웃음을 터뜨렸다.
그 알부남을 야구에서 찾았다. 양의지다. 그의 타격자세는 부드럽기로 소문났다. 그의 표정이나 동작을 보면 건성건성 하는 것 같기도 하다. 심지어 싫은데 마지 못해 하는 것 같기고 하다.. 그런데 당대 최고의 몸값을 받는 선수 중 한 명이다. 2017년과 2021년을 제외하고 2014년부터 매해 골든글러브 포수상을 수상했다.(2021년에는 골든글러브 지명타자상을 받았다.) 두산에 있을 때 두산의 우승에 기여했고 NC로 이적해서는 NC 의 우승에 기여할 정도로 영양가 만점의 활약을 보여주었다.
<양의지의 모습은 어딘가 어색해 보이나 알고 보면 고수의 그것이다>
체격도 크지 않고 발도 빠르지 않은 그가 발군의 타격 실력과 높은 도루저지율을 보이는 것은 부드러움에서 오는 것일까. 야구 해설가들이 그의 스윙을 ‘무심타법’이라 하지만 이 표현은 양의지를 이해하는데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무심타법’은 어떤 것이며 어디에서 오는가를 다시 물어야 하기 때문이다. 다만 부드러워서 힘의 전달이 잘 돼 큰 타구가 나올 수 있다는 김태형 전 감독의 해설은 그나마 이해할만하다.
흔히 힘빼는데 3년 걸린다고 한다. 그만큼 힘을 뺀다는 게 어렵다는 말이다. 양의지가 힘을 빼고 방망이를 휘두르는 건 확실하다. 그런데 양의지는 좀 억울하다. 겉으로 보이는 모습 탓에 스윙이 느리고 힘이 없다는 오해를 받기 때문이다. 한 인터뷰에서 양의지는 기계 측정 결과를 보면 자신의 스윙 속도가 빠르게 나온다고 반박한다.
힘을 빼니 부드러워지고 부드러우니까 힘의 전달이 잘 돼 결과적으로 스윙도 빠르고 힘이 있다. 참으로 역설적이다! 힘을 빼니 힘이 나온다는 게. 힘을 빼고 부드럽게 휘두르는 타격자세는 아주 드문 경우이다.(이 글을 쓰는 이유이다) 다시 말하면 힘빼고 치라고 해도 막상 그렇게 하는 선수는 아주 드물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의 겉 모습을 보고 그가 느리다고 하면 틀린 말이다. 그는 결코 느리지 않다. '겉느속빠'라고나 할까. 물론 양팔을 옆구리에 바짝 붙이고 뛰는 모습을 보면 느리디는 말이 저절로 나오긴 한다. 그가 2023년 시즌에 8개의 도루(개인 최고 기록)를 성공시키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그의 발이 빠르다고.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는 스윙 속도나 송구 속도에 있어서 누구보다 빠르다.
느리면서 빠르다. 모순이 성립될 수 있을까. 귀신 시나락 까먹는 소리일까. 꼭 그렇지는 않다. 사실 우리도 그렇치 않은가. 이성적인 좌뇌와 감성적인 우뇌를 함께 갖고 있지 않은가. 그래서 낮에는 의사가 되고 싶다가도 밤에는 가수가 되고 싶지 않던가. 분명 야채를 사겠다고 집을 나섰는데 마트에 가서는 막상 짚는 건 달달하고 알록달록한 도너츠 아닌가.
경기를 보면 많은 타자들이 ‘나 힘 좀 쓰는데 어디 한번 맛좀 볼래?’하는 것처럼 어깨나 몸에 힘이 잔뜩 들어가 있다. 결국 헛스윙이나 파울로 끝나거나 잘해야 외야플라이인데 무시무시한 스윙에 비하면 비거리가 시원찮은 경우가 많다. 시작은 호랑이인데 끝은 파리다.
그런데 그가 정말 빠른 게 또 있다. 타격과 도루 저지에서 겹치는 점은 상대 선수의 다음 플레이를 예측하는 능력이다. ‘저 투수가 다음에 어떤 공을 던질까’ ‘저 주자가 언제 도루를 감행할까’를 잘 예측하려면 해당 선수의 특성과 컨디션, 상대 팀의 작전 스타일, 경기의 흐름과 패턴 등을 파악해야 하는데 이걸 줄여 말하면 야구지능(야구 센스라고 해도 좋다)이다. 그는 이게 좋은데 머리 회전이나 눈치가 빠르다는 말이다. 타석에서는 ‘이 쯤에서 이런 공이 들어올꺼야’ 예측하고, 포수로서는 ‘타자가 이런 공을 기다리고 있을테니 거꾸로 가자‘한다. 야구 해설가들이 “양의지 선수 또 허를 찌르네요!”라는 말을 자주 하는 이유다. 곰의 탈을 쓴 여우’라는 별명이 그냥 붙쳐진 게 아니다.
양의지는 타고난 것일까. 남다른 고민과 연습으로 도달한 것일까. 아니면 둘 다 일까. 어느 정도 타고난 것에 단련을 통해 이룬 경우 말이다.(현실적으로 이런 경우가 많다고 할 수 있다) 그가 프로야구(두산)를 시작한 해가 2006년인데 출중한 실력을 보여준 때는 그로부터 10년쯤 지난 2010년대 중반이니 재능만으로 볼 것은 아니다. 그의 도루저지 능력도 비슷하지 않을까. 결국 타고난 재능에 남다른 연습(양적 측면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이 비결일 가능성이 높다.
부드러움의 또 다른 장점은 체력 소모를 줄일 수 있다는 것이다. 144게임을 치루려면 체력 관리가 무엇보다 중요한데 몸에 힘이 들어가면 체력이 빨리 소진되는 것은 물론 부상을 입을 확률도 높을 수밖에 없다. 부상을 당하지 않는 것도 실력이라고 하듯 팀 입장에서는 빼어난 선수라고 해도 자주 부상을 당하는 선수를 높게 평가하기는 어렵다.
포수 양의지는 어느 선수보다 체력 소모가 크다. 타자의 타격스타일과 컨디션을 파악해 투수의 공 배합을 이끌어야 하고, 언제 나올지 모르는 반대투구에 대비해야 하고, 홈으로 대시하는 주자와 몸싸움을 마다하지 않아야 하고, 호시탐탐 도루를 노리는 주자를 지켜보다 도루를 감행하는 순간 재빨리 그리고 정확히 송구를 해야하는 포수는 야구계의 극한직업이다. 몸과 마음이 눈코 뜬 새 없이 분주하다. 그의 타격이나 미트질이나 주루는 이러한 자신의 처지를 감안해 스스로의 여건에 맞게 최적화시킨 자세 아닐까. 오랜 시간 동안 갈고 닦아서 도달한 경지임은 물론이다.
체력이나 노고를 최소화하면서 그 결과를 극대화하는 전략, 그게 양의지의 생존전략인 것이다. 찰스 다윈 식으로 말하면 부자(부드러운 자)생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