떨어지는 잎은 나무가 손을 놓은 것일까 잎이 손을 놓은 것일까? 바람을 등지고 가는 낙엽은 낙엽이 등을 돌린 것일까 바람이 등을 떠민 것일까?
시에 있어서 주제를 선택할 때 발견한 현상에서가 아닌 그 현상의 원인이 되는 시점을 고민하는 것이 중요한 것 같습니다. 그 시점에서 주체가 어디에 있는 지가 화자와 어투를 결정하는데 큰 역할을 합니다.
가령 떨어지는 잎은 나무가 손을 놓은 것이라면,
너의 무게를 감당할 수 없어 차라리 가지째 부러뜨릴 것을 뒹구는 괴로움은 보기 안쓰럽다
떨어지는 잎이 손을 놓은 것이라면,
미련 없다 너를 지키느라 지나친 바람이 아쉽더라 뿌리치고 바람에 몸을 뉘였더니 떨어지는 것의 무게를 잊고 잔다
두 경우 모두 가을 낙엽을 보고 떠오른 시상을 노래하였지만 처음 표현은 나무의 시각에서 낙엽을 바라보고 있고, 두번째는 낙엽 스스로의 시각에서 자신의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만약 이것을 멀리서 바라보는 제3자의 시선으로 표현해본다면,
말릴 틈이 없다 바람이 부추긴 다툼은 서로를 움켜쥐고 흔들다 흔적만 남겼다 상기된 너는 바람따라 떠나고 남겨진 너는 이야기를 귓볼에 걸었다 지나던 새가 간혹 말을 건다
미묘한 차이지만 화자와 시점에 차이가 나면서 완전히 다른 글이 되는 것 같습니다. 어떤 글에 대해 간혹 독자들이 작가에게 낯선 시선에 대한 칭찬을 하는 글을 보면 현학적인 표현이나 어려운 비유를 통한 감탄이 아니라 낯익은 글에서의 낯선 시점에 의한 표현이 이유가 아닐까 합니다.
내가 전세로 마당이 있는 멋진 집에서 살고 있었다고 합시다. 집주인의 배려로 평생을 살다가 그 집에서 죽었다면 그 집은 집주인의 집일까요 내 집일까요?
나무에서 뿜어져 나오는 좋은 공기를 마시고 뱉아내는 내 숨에 섞여있는 공기는 나무에서 나온 공기일까요 나에게서 나온 공기일까요?
집주인과 나무의 입장에서와 나의 입장에서는 보는 시선이 다르니 다른 위치에서 이야기를 하겠죠. 아마도. 하지만 누구의 이야기도 틀린 것은 아닐 겁니다. 그에 따라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식이 다를 뿐이죠.
다시 돌아와서, 행동의 주체가 누구냐에 따라 시상의 입장이 다르고 어투가 다르고 다른 글이 됩니다. 여러 가지의 방향에서 사물과 현상을 관찰하고 사유하는 것이 새롭고 낯선 글을 쓰는데 많은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출발이 달라야 같은 곳에 도착하더라도 다른 풍경을 이야기 할 수 있다고 합니다. 같은 곳을 여행하더라도 감동이 다른 여행이 있듯이 우리 함께 새롭게 사물을 보는 연습을 하다보면 남들과는 다른, 그래서 더 좋은 글을 쓸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아빠, 꽃게는 빗이 없어. 하지만 두 손으로 가위질을 할 수 있어. 그래도 괜찮아. 바람이 앞에서 불면 드라이기처럼 이렇게 서 있으면 돼. (손가락을 이렇게 해서 보이며) 이렇게 하면 이게 뭔 거 같아? 아빠는 그것도 몰라. 빗이잖아. 그냥 빗이라고 생각하면 돼
당시 여섯 살이었던 저의 딸은 오늘도 아빠를 비웃는 듯 낯선 말들을 내뿜고는 혼자 방으로 들어갑니다. 또 다른 저의 딸은 3인칭 관찰자 시점으로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다가와서는 지금 미용실 놀이 중이라며 웃으며 그 방으로 따라 들어갑니다. 이렇듯 누가 보느냐에 따라서 아무 것도 아닌 것에 의미가 부여되기도 하고, 시점의 대상에 따라서 다른 현상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여러분은 어떠신가요? 시가 어렵게 느껴지시나요? 그렇다면 위의 제 딸의 시각처럼 조금은 다르게 사물을 바라봐주시고, 추가로 바라보는 대상에 대한 시점을 다각화해본다면 조금은 다른 글을 쓸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먼저 머리에 떠올리셨던 글을 써내려가신 후 조금씩 퇴고해가며 여러분의 글을 완성시켜 가시기 바랍니다.
티 없이 맑은 딸들의 반짝이는 생각과 말에 늘 시 같은 하루가 또 지나갑니다. 또 다른 시점을 찾아 헤매는 일상이 즐겁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