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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니 Dec 19. 2022

너 정말 죽을 때까지 그렇게 살아도 괜찮아?

나를 찾기 위한 '창조적 퇴행', 그 여정의 기록

어릴 적 나에겐 사춘기가 없었다. 남들 다 겪는 사춘기를 겪지 않았던 사실에 감사했었던 시간들이 있었다. 인생에서 낭비된 시간이 없었다 여겨졌기 때문이다. 효율성과 실용성을 최고의 미덕으로 여기며 살아온 자의 생각답지 않은가? 하지만 그것이 어릴 때부터 시스템에 순응하며 살아온 모범생들의 비애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사춘기에 대해 머리로만 이해한 범생이들에겐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야 그 시간에 대한 청구서가 날아오는 듯하다.


‘나는 누구인가?' 

'난 어떻게 살아야 의미 있는 삶을 살았다 할 수 있을까?’

'나'다운 삶을 살기 위해서는 반드시 직면해야 할 질문들이었다. 사춘기를 거치지 않아 시간을 아꼈다 생각했는데 오히려 낭비되고 있었다. 오랜 시간 나 자신에 대한 이해도 없이 남들 사는 마냥 살고 있었으니 말이다. 사춘기 때 잠시 방황했어도 자신의 길을 찾아 잘 살고 있는 이들에 비해 얼마나 시간을 손해 본 셈인가? (우리네 인생이 이렇다. 단기적으로 나아 보이는 것들이 장기적으로 보면 도리어 손해일 때가 있다. 그러니 혹 지금 안 좋은 일이라 여겨지는 일들도 좋은지 나쁜지 누가 알겠는가?)





인생 중반에 들어서면서 내 안에서 이상한 목소리들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외부에서 바라볼 때는 늘 새로운 도전을 거듭하며 성장하고 있는 듯했다. 사회적으로도 존경받을 만한 직업군에 속해 있었고 경제적으로도 나쁘지 않았다. 먹고사는데 문제가 없었고 나 나름대로는 하고 싶은 일들에 도전하며 삶을 잘 꾸려가고 있다고 믿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하는 일에서 의미를 찾지 못해 갑갑해하는 나 자신이 보였다.


머릿속에서 이상한 열차를 타고 있는 내 모습이 그림처럼 떠올랐다. 흡사 영화 '부산행'의 장면들 같았다. 어디로 달려가고 있는지도 모르는 열차 안에서 난 다른 이들과 함께 점차 좀비 같은 모습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누가 심어 준 희망인지 모르겠으나 조금만 더 참고 위칸으로 올라가면 일순간 이 모든 힘든 감정들이 사라질 것이라 믿고 있는 듯했다. 여정을 즐기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열차에서 뛰어내릴 수도 없어 끙끙거리고 있었다. 처음에는 분명 내 의지로 이 열차에 몸을 실었던 것 같은데 어느새 내 생각이나 의견 따위는 상관없이 열차는 무서운 속도로 달려가는 듯했다. 속도가 가파르게 올라갈수록 무서워졌다. 내가 여기서 뛰어내릴 수 있을까?



"이 미친 열차에서 빨리 뛰어내려야 해."



어느 순간 내 안에서 이런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이 미친 열차에서 뛰어내려야 해. 도무지 너에게 생각할 시간을 주지 않아. 이 열차의 종착점이 네가 원하는 곳이 아니면 어떡할 거야? “


그러다 어느 날 마음속 깊은 곳으로부터 '너 정말 죽을 때까지 이런 식으로 살아도 괜찮겠어?‘라는 질문이 들려왔을 땐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처음엔 내가 너무 지쳤나 보다 했다. 하지만 지속적으로 들려오는 그 목소리를 계속해서 무시할 수는 없었다. 나 자신에게 대답해 주어야만 했다. 나는 왜 이렇게 살고 있는 것인지? 이런 삶이 나에게 정말 의미가 있기는 한 것인지 말이다.






일어나야 하는 일은 반드시 일어나게 되어 있다고 했던가? 누군가는 이것이 어떤 일이 발생하기에 조건과 환경이 충분히 만들어졌기에 그러하다고 했다. 그렇다면 나를 방황으로 이끈 조건과 환경은 무엇이었을까?   


미국에서 박사 학위를 마치고 홍콩에서 근무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시위 사태가 있었다. 곳곳에서 기습적으로 발생하는 폭력 시위로 인해 학교 측은 재택근무를 통보해 왔다. 그 기간 동안 많은 학생들과 시민들이 다쳤다. 비디오로만 보던 우리나라 민주화 항쟁 때 모습 같았다. 다시 학교로 돌아가자마자 함께 일하던 박사생 하나가 죽음을 당했다는 소식이 들렸다. 늘 웃으며 사무실 분위기를 밝게 하던 친구가 하루아침에 사라져 버렸다.


그의 죽음을 애도할 새도 없이 듣도 보도 못한 코로나라는 녀석이 전 세계 사람들의 삶을 휘저어 놓았다. 누구에게는 더욱 가혹한 모습으로 생채기를 만들어 놓았다. 실험기반의 연구를 진행하는 우리로서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모든 실험이 취소되고 연구실은 다시 봉쇄되었다. 프러포즈하는 연구를 실행할 수 있을 수 없을지, 한다면 언제나 가능할 것인지 알 수 없는 날들의 연속이었다. 그러니 작업 중이던 연구 프로포절과 콘퍼런스 준비도 의미가 없게 되었다. 시위 사태 이후 코로나로 인해 다시금 홀로 작은 아파트에 감금되었다. 미국에서 알고 지내던 지인들의 부고 소식이 연이어 들려왔다. 2년 넘게 혼자 아파트 안에서만 지내는 생활에 지쳐가던 중 가슴 먹먹한 소식들이 이어지자 나의 멘털 건강에도 빨간불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우울증이 찾아온 것이다.



너 정말 계속 이렇게 살아도 괜찮아?



나 또한 언제 이 세상을 떠날지 모른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우는 듯했다. 지식적 차원에서만 머무르던 ‘유한한 삶’에 대한 이해가 비로소 내 몸을 관통하는 듯했다. 그때쯤이었던 것 같다. 내 깊은 곳 알 수 없는 곳에서 이런 목소리들이 들려왔다. '네 삶이 얼마 남지 않았다 해도 이렇게 살고 싶은 거야?' '네가 생각하기에 삶의 밸런스를 맞추지 못하고 매질할 정도로 이 일이 정말 의미 있어?' 이런 질문들로 방황의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결정적 사건이 발생했다. 오랜 시간 우리 곁에 머무를 줄 알았던 엄마가 갑작스럽게 떠난 것이다. 


교통사고로 너무나 황망하게 엄마를 보내고 나서야 깨달았다. 이제껏 내 삶을 움직인 원동력은 엄마였음을... 난 평생 고생만 한 엄마에게 자랑스러운 딸이 되고 싶었다. 엄마의 자랑이 되어 줄 수 있어야 엄마의 고생이 그나마 보상받을 수 있다고 여겼던 것이다. 한국에서는 자식 자랑이 부모님들 행복 아닌가? 우리 부모님도 예외는 아니었기에 내가 열심히 무언가를 이뤄낼수록 당신들의 노고가 보상받는다 느끼시는 듯했다. 그런데 그런 엄마가 세상을 떠나자 누군가를 위해 살 필요가 없어졌다.


그렇게 난 모든 걸 멈추고 내 삶을 돌아보기로 했다. 무엇보다 나에게 남은 나머지 인생 후반을 의미 있게 살기 위해선 철저히 '나 자신과 독대'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느껴졌다. 나를 제대로 이해하고 싶었다. 사춘기 때 미처 하지 못하고 미루어 두었던 숙제를 꺼내야 할 시간이 된 것이다. 인생 중반에 이런 퇴행적 과정을 거치는 것이 다른 이들의 눈에 한심하게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들이 내 인생을 살아줄 것이 아니니… 이제라도 내 삶의 주도권을 찾기 위해 나를 찾는 여정을 시작해야 했다. 이 과정이 녹녹지 않을 것임을 안다. 역사를 봐도 주인의 권리를 찾는 과정들은 그리 순탄하지 않았다. 그래서 난 내 삶의 주인이 되기 위한 이 창조적 퇴행 과정을 기꺼이 받아들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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