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의 시선이 머무는 곳

아주 느리게 엄마가 되어가는 중입니다

by 황사공




아기의 첫 돌을 끝내고 나서 아기와 함께 여행을 떠났다. 일 년간 자라느라 고생한 아기와 키우느라 고생한 나에게 선사하는 선물이었달까? 아빠 없이 아기와 둘이서 떠나는 첫 여행의 시작은 그러했다.


목적지는 강원도 양양. 새로 고속도로가 뚫려 2시간 30분이면 도착할 수 있는 가장 가까운 동해바다를 여행지로 선택했다. 아침 일찍 졸려하는 아기를 깨우고 차에 태워 출발한 지 얼마 안 되어 아기는 잠이 들었다. 잠든 아기를 룸미러로 바라보며 울긋불긋 물든 가을산 사이로 난 도로를 운전하는 일은 생각보다도 더 평화롭고 좋았다. 목표인 숙소까지 두 시간 반, 아기는 크게 울지도 않았고 잘 먹고 잘 놀았다. 너무 쉽게 도착하는 바람에 아기와 함께 하는 여행 별거 아니구나 싶은 생각을 하는 우를 초장에 범해버리고 말았다.





아기와 함께 할 호캉스를 준비했기 때문에 숙소는 거실이 넓은 곳으로 골랐다. 테라스에서 바다가 보이는 숙소에 들어서자마자 너무 즐거워 아기를 얼싸안고 소리를 지르고야 말았다.


"너어어어어어무 좋다!! "





느긋하게 짐을 풀고 산책로를 따라 바다로 내려갔다. 날씨가 흐리더니 이내 비가 왔지만 그마저도 좋았다. 잠시 바닷가에서 논 다음 저녁거리를 사러 근처 시내로 이동을 했다. 그리고 여기서부터 문제가 시작되었다.


지금껏 차를 잘만 타던 아기가 갑자기 울어대기 시작했지만, 여행 와서 먹을 것들을 고대하고 있던 나는 저녁거리를 사러 나가는 것을 포기할 수 없었다. 우는 아기를 태우고 동영상을 틀어줘 가며 달래 보았지만 달래지지 않았고, 아기의 울음소리에 머릿속이 하얘진 나는 도로 하단 회전 구간을 제때 감지하지 못해 차 하단을 방지벽에 스치고야 말았다.


안 그래도 하얗던 머릿속이 더 새하얘졌다. 아기는 울고 차도 긁히고.. 이런 와중에도 차를 돌리지 않은 채 목표했던 음식들을 사서 숙소로 돌아오고 나니 온 몸에서 힘이 다 빠져버렸다.


침대에 널브러져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가만히 있고 싶었지만 울고 보채는 아기는 나에게 그런 자유를 허락하지 않았다. 배고픈 아기에게 밥을 먹이고 씻기고 나니 어느덧 밤 열 시.. 힘들게 사온 저녁거리를 그제야 먹을 수 있었다. 그마저도 아기를 안고 어르며 달래가면서 말이다.


차갑게 식은 닭강정과 찬 기를 잃고 팅팅 불어버린 물회의 조합은 허기진 배는 채워주었지만 기대에 부풀었던 내 마음을 완전히 꺼뜨려 버렸다. 이 까짓게 뭐라고 그 고생을 하며 사러 나갔을까.. 그냥 룸서비스나 시켜 먹을걸. 싶은 후회만 파도소리와 함께 밀려왔다.


그래도 아기와 함께하는 아름다운 여행을 꿈꿔왔던 나를 위로해 주는 바다가 있었기에 괜찮았다. 조금 무리해서 좋은 숙소로 오길 참말로 잘했다. 잔잔하게 밀려왔다 쓸려가는 파도소리가 지친 내 마음을 달래준다. 참 다행이다.



짧은 하룻밤을 보내고 체크아웃 시간을 끝까지 채운 다음 숙소를 나와 인근에 있는 카페로 향했다.


맛있는 커피 한잔을 먹고자 한 것이 그리 큰 사치였을 줄이야...


낯선 곳에서의 하룻밤이 못내 불편했던지 아기는 아침부터 짜증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달래느라 이것저것 먹였더니 배탈이 났는지 기저귀도 계속 갈아주어야 했고 원래도 껌딱지였던 아기는 오늘따라 더 엄마 곁에서 떨어지려 하지 않았다. 수유실도 기저귀 갈이대도 따로 제공해주지 않던 카페에서 울고 불며 버둥대는 아기를 힘겹게 끌어안고 기저귀를 갈아주다 보니 이러다 맘충 소리 듣는 거구나.. 싶은 생각이 절로 든다. 맘충이 될 수밖에 없는 이런 상황이 너무 싫었지만 피할 길이 없었다.


유명하다는 커피집의 커피를 제대로 음미하지도 못한 채, 젊은 관광객들의 눈살에 괜스레 홀로 쫓겨 서둘러 카페를 나오고 말았다. 그리고 집까지 돌아오는 시간은 중도포기를 하고 싶을 만큼 괴로운 여정이었다.


이런 여행이 될 줄은 정말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었다.






혼자 훌쩍 떠나는 여행을 즐기곤 했었다. 아무와도 대화를 하지 않는 그 시간 동안 나는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하고 일상을 힘차게 살아가기 위한 충전을 했다. 낯선 곳에서의 하루는 늘 나에게 설렘이었고 일상이 아닌 곳에서 이방인이 되어 지내는 기분을 즐기곤 했었다.


아기와 함께 떠나는 여행은 확실히 예전의 그것과는 달랐다.

나의 모든 주의는 아기에게 쏠려있었고, 우선순위의 1번은 항상 아기였다. 이제 간신히 혼자 걸으려 하는 돌쟁이 아기에게는 한 시도 눈을 뗄 수 없었고, 아기의 컨디션과 수면 패턴에 따라 모든 일정은 조정되어야 했다.

내가 그렸던 여행의 모습이 아니기에 나는 상심했고, 무엇인가가 불편한 아기는 자꾸만 투정을 부렸다. 그렇게 둘 다에게 힘들었던 여행은 끝이 났다.


집으로 돌아왔을 때 만난 남편이 어찌나 반갑던지. 남편의 소중함만 얻고 돌아온 듯한 아기와의 첫 여행이다.





하루 동안의 짧은 여행이었지만 아기도 나도 고단했던지 며칠을 골골대며 보내고선, 나가자 보채는 아기를 데리고 동네 산책을 나갔다. 여행 때까지만 해도 양 손을 붙잡고서나 걸어 다니던 아기는 그 며칠 사이에 더 자라 한 손만 잡고서도 곧 잘 걸어 다녔다.


한 손은 유모차를 밀고 한 손은 아기의 손을 잡고 슈퍼마켓엘 다녀왔다. 스스로 걸어서 이 길을 가는 것은 처음인 아기의 눈에는 온통 신기한 것 투성이라 연신 내 손을 잡아끌며 무엇인가를 만져댔다.


이모티콘이 들어있는 바닥 하수구, 가게에서 내어다 놓은 커다란 고무 뚜껑, 인도 옆 난간에 매어놓은 자전거 등 아기의 손 끝엔 지금껏 수없이 지나다녔지만 내 눈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놓여 있었다.




하나하나 다가가서 만져보고 또 가만 바라보고.

그렇게 걷다 보니 50m 정도의 거리를 걷는데 10분이 훌쩍 넘게 걸렸다. 아기의 속도는 아직 이리도 느렸다.





문득 며칠 전 우리의 여행이 다시 떠올랐다. 아름다웠던 야경과 바다, 그리고 파도소리를 배경으로 떼쓰고 울던 아기의 모습이 나타났다. 그리고 그런 아기를 보며 힘들어하고 속상해하던 내 모습도 보였다.

그리고 이제야 나의 속도에 아기를 맞추려 욕심냈던 건 아닌가 싶은 후회가 밀려든다. 아직 모든 것이 새로워 느리기만 한 아기에게는 버거웠을 나의 속도가 아기도 나도 힘들게 만든 건 아니었을까?


걷고 보고 만지는 모든 것이 처음이라 새로울 아기에게 충분한 시간을 주지 않고 그저 들고 안고 짐짝처럼 옮기기만 했던 엄마가 아기는 원망스럽지는 않았을까?


바다를 처음 보는 아기와 함께 떠난 첫 여행을 엉망으로 만든 게 나인 것만 같아 아기에게도 나에게도 미안한 마음이 든다. 예전의 나와 지금의 내가 같을 수 없음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 모든 것을 애써 부인하며 예전의 나를 흉내 내려 한 내가 부끄럽다. 엄마가 되어 가는 나의 속도도 느리기만 한 것 같다. 지금 아기의 속도처럼.


한없이 느린 아기의 옆을 걷는 나에게도 갑자기 모든 것이 새롭게 다가온다.


하루하루 체크리스트를 그어가며 키워내는 육아가 아닌, 아기가 스스로 잘 자라게 잡아줄 수 있는 엄마가 되어야지. 빨리 가자고 손목을 잡아끌지 않고 아기가 충분히 보고 느끼도록 기다려주는 엄마가 되어야지.



그리고 내년 이맘때 즈음, 다시 한번 둘이서 여행을 떠나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