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아와 기억력의 상관관계
아기를 낳고 나서 부쩍 기억력이 안 좋아졌다.
같은 고통을 토로하는 엄마들을 쉬이 만날 수 있는 것을 보면 비단 나만 겪는 문제는 아닌 듯하다. 아주 사소한 일상의 것들 - 물건을 둔 장소, 영화나 배우의 이름, 친구의 생일 등을 문득 떠올리려 할 때 머릿속이 하얗게 비워져 당황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휴대폰을 세탁기 위에 두고선 한 시간여를 찾아 헤매다 이쯤 되니 사태가 정말 심각하구나 싶은 마음에 우울함이 밀려왔다.
10년 전 일도 거뜬히 기억해 친구들이 제발 좀 잊으라 부르짖던 난데, 지나가는 말로 내뱉은 지인의 이야기도 다 기억해 사람들을 놀라게 하곤 했던 난데...
아기를 낳고 키운 일 년 동안 내 머리에 대체 무슨 일이 생긴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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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증상을 마미 브레인 신드롬이라 부른다고 한다. 검색은 이럴 때 참 편리하다. 신드롬이라는 이름까지 붙여져 있는 걸 보니 이 문제는 정말 나만의 것이 아닌 듯 해 어쩐지 위로가 된다.
출산 후의 여성들이 겪는 기억력 감퇴, 활동력의 저하 등을 일컫는 마미 브레인 신드롬은 출산 후 겪는 수면부족, 에스트로겐의 저하, 급격한 환경변화로 인한 충격 등에서 그 이유를 찾고 있었다. 뭐 과학적으로 근거가 있는 얘기들이려니 그런가 보다 싶다.
시간이 지날수록 이 모든 증상들은 좋아진다고 하는데 어쩐 일인지 출산한 지 일 년이나 지난 나의 기억력은 아직도 좋아질 기미가 안 보인다. 아니 오히려 잊어가는 것들이 더 많게만 느껴진다. 특히 사람 이름을 기억해 내는 것이 가장 심각하게 어려워졌는데, 예전엔 분명 명확히 알던 사람도 그때 뭘 하던 안경 쓰고 키 큰 남자 등으로 묘사하기 일쑤다.
하... 기억력이여! 대체 어디로 사라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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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의 거의 모든 시간을 아기와 함께 아기를 위해 보내는 엄마의 삶을 살아가다 보니, 내 머릿속은 온통 아기로 가득 차 버렸다.
몇 시에 일어나야 하는지
아침 점심 저녁 간식으로 무엇을 얼마큼 먹일지
기저귀에 묻은 응아의 색깔은 어떤지
아기가 열은 없는지
옷은 무얼 입힐지
외출은 어디로 할지
무엇을 사서 냉장고를 채워 넣어야 할지
청소기는 언제 돌려야 할지
환기는 언제 시켜야 할지
낮잠은 언제 재우고 언제 깨울지
오늘은 무얼 하고 놀아줄지
...
...
하루 종일 이런 생각들로 분주한 머릿속엔 예전 가십걸의 여자 주인공 이름 따위가 갑자기 떠오를 여유가 없다. 참 좋아하던 배우였는데도 말이다.
머릿속이 육아와 살림으로 가득 차 버리는 바람에 다른 대부분의 것들은 저 밑바닥 기억의 저장창고에 처박혀버린 게 틀림없다. 출산 후 머릿속 우선순위가 재 정렬된 느낌이랄까?
0순위 아기의 의식주
1순위 아기의 건강
2순위 아기와 놀기
3순위 집안 살림
4순위 남편
5순위 이웃 육아 동지
6순위 가족 및 친구
7순위 기타 등등
7순위 밖으로 밀려난 사소한 모든 것들은 너무 멀리 밀려나버려 쉽게 끄집어낼 수 없는 게 내 기억력 저하의 원인이 아닌가 싶다. 온통 아이로만 가득 차 다른 것들은 챙겨볼 여유가 없는 게 초보 엄마의 머릿속일 것이라 믿고 싶다. 나만의 것이 아니길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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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무료함을 달래러 아기와 함께 마트엘 갔다.
이제 마구 걸어 다니기 시작한 13개월의 아기에게서는 한 시도 눈을 뗄 수가 없었고, 장은 보는 둥 마는 둥 아기를 쫓아다니느라 진이 다 빠져버렸다. 다시는 아기와 둘이서 장을 보러 가지 않겠노라 속으로 다짐을 하며 집 앞에 와서 잠시 문을 여는 새에 옆에 있던 아기는 순식간에 뒤로 돌아 엘리베이터로 돌진을 하고 있었다.
닫히는 문 사이로 손을 뻗고 가고 있는 아기가 눈에 들어온 순간, 머릿속에 번개가 치는 듯 번쩍이더니 어느새 나는 "안돼~~"라는 비명과 함께 몸을 날려 엘리베이터를 누르려 했다. 내 목소리에 놀란 아기는 그대로 손을 접었고, 나는 버튼에 닿지도 못한 채 그대로 바닥에 자빠져버리고 말았다.
분명 점프를 해서 멋지게 엘리베이터를 잡을 수 있을 것만 같았는데.. 머릿속에서나 가능한 일이었나 보다.
한 손 가득 장본 짐은 바닥에 나뒹굴었고, 오래간만에 중력을 온몸으로 느낀 내 몸도 함께 바닥에 널브러졌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내려다보는 아기를 보니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아기가 다치지 않았다는 안도감과 순간적으로 내 몸을 날린 것에 대한 기특함과, 왜 장을 보러 나가서 이 고생을 사서 하는지에 대한 원망과, 욱신거리는 팔다리의 고통이 혼재된 복합적인 감정이었다.
하지만 그런 감정을 오래 느끼고 있을 여유 따윈 없었다. 아기는 또 어느새 계단을 향해 움직이고 있었고 옆구리에 아기를 들어 집에 넣은 채 널브러진 짐을 챙겨 집으로 들어왔다. 그렇게 아무 일도 없었던 듯 다시 짐을 챙겨 넣고 아기를 먹이고 낮잠을 재웠다. 아까 느꼈던 복합적인 감정은 금세 사라지고 무릎과 손의 통증만 남았다. 오래간만에 입은 찰과상과 타박상에 온 몸이 서글퍼졌다.
퇴근 한 남편에게 다친 손등과 무릎을 보여주며 오늘 있었던 영웅담을 얘기해 주었다. 내가 얼마나 쏜살같이 움직였는지 알아? 하며 말이다. 그리고 아파서 아무것도 못하니 오늘 살림 마무리는 당신이 하라는 엄살도 함께 말이다.
"이제 너도 엄마가 다 되었네~ 미련하게 네 몸을 이렇게 날리는 걸 보니 말이야."
남편의 한마디에 마음이 또 슬프면서 뭉클해졌다.
아기의 일이라면 머리보다 몸이 먼저 움직이는, 내 모든 세포가 아기를 향해 있는 지금의 내 모습이 '엄마'라는 이름의 모습인가 보다. 내 것이 아닌 듯 멀게만 느껴지던 그 '엄마'라는 단어가 내 것임이 이제야 조금 받아들여진 것 같다. 이렇게 나는 엄마가 되어가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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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아기를 낳고 나서부터는 꿈에서도 항상 아기와 함께이다. 이걸 보면 꿈은 현실의 반영이라는 것이 분명한가 보다. 꿈에서도 내 곁에 껌딱지처럼 아기를 붙여 놓은, 나의 의식과 무의식 모두가 아기만을 향하고 있는 초보 엄마의 한 해가 이렇게 저물어 간다.
내년엔 조금 더 편안해진 엄마의 모습이 되기를.
내 머릿속 아기의 영역이 조금 줄어들고 다른 소중한 것들도 다시 챙길 수 있는 여유가 생기기를 소망해본다.
Good bye 2018, Hello 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