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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니 Nov 12. 2019

나만의 비밀 공간

100번째 브런치 글




내가 고등학생이던 2000년대 초반, 그 시절에는 다모임이라는 인터넷 커뮤니티가 유행이었다.

다모임에 올릴 사진을 찍기 위해 하두리라는 웹캠으로 셀카를 찍어대고, 다른 학교 친구의 다모임을 타고 들어가 다른 학교 친구들을 구경하곤 했었다. 학교를 기반으로 그룹이 묶였던, 그 당시에는 매우 획기적이었던 그 사이버 공간이 나의 첫 번째 소셜 계정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싸이월드가 등장하며 다모임은 나의 중고등학교 시절의 추억들을 모두 싸 안은채 사라져 버렸지만 말이다.



아직 남겨져 있는 그 시절의 흔적들



다모임을 한창 하던 그 시절의 고등학교에는 각 학교를 대표하는 얼짱들이 있었다. 얼짱들의 다모임엘 찾아가 친한 척을 하며 '나 얘 알아~'를 과시했었던 것 같다. 나 역시 친하게 지내고 싶었던 옆 학교 얼짱 친구가 있었는데, 그 친구의 다모임에는 잘생긴 얼굴 사진보다는 구구절절한 일기가 더 자주 업데이트되곤 했었다. 그것도 누나를 향한 짝사랑에 세상에서 가장 비극적인 남자 주인공이 된 듯한 일기들을 말이다.


그리고 그 시절의 용감했던 나는 아무도 댓글을 남기지 않던 그 아픈 사랑의 노래에 댓글을 남겼었다. 



"그런데 이렇게 일기를 쓰는 건 그 사람 보라고 쓰는 거야? 누굴 보라고 이렇게 쓰는 글이면 일기가 아닌 거 아닌가?"



오지랖이 완전 태평양이던 시절이었다. 그냥 그 시절의 나는 그 친구한테 관심을 좀 끌어보고 싶었던 것 같다. 친해지고 싶어서 말이다. 그 덕에 그 친구의 다모임은 굳게 닫혀버렸고, 같은 동아리라 간간히 얼굴은 보았던 우리 사이는 어색함 속에서 점점 더 멀어져 갔다. 그렇게 각자 대학엘 갔고, 그 친구에게 나는 금세 잊혔을 것 같다.


하지만 나에게 그 친구는 잊히지 않는 존재로 남게 되었다. 나의 철없던 오지랖이 그에게 정말 큰 상처가 되었으리라는 것을 한참이 지나 문득 깨닫게 되었다. 사과를 하고 싶었지만 이미 연락이 끊긴 터라 쉽지 않았다. 그런 댓글을 남긴 것이 너무 부끄러웠고, 그 친구에게 너무 미안했다. 나 역시 쓰지 않고는 못 배기던 성격이라 늘 SNS에 일기를 쓰곤 했는데 그 이후부터는 나만의 암호로 가득한 일기들을 비공개로 쓰게 되었고, 시간이 지나 다시 보았을 때 나조차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다 아예 아무도 모르는 비밀 블로그들을 운영하기 시작했었다. 그렇게 나의 티스토리는 탄생했다.  



20대의 불안정함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옛 블로그 







나는 쉼 없이 무엇인가를 쓰고 있었다. 마음이 복잡할 때, 우울할 때 글을 쓰면 기분이 좋아졌다. 글쓰기는 뒤죽박죽 엉켜버린 내 마음을 풀어주는 마법 같은 존재였다. 글을 쓰며 실연도 이겨냈고, 직장에서 받는 스트레스들도 이겨냈다. 아무도 봐주지 않아도 괜찮았다. 내가 쓴 글을 내가 다시 돌려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았고, 나름의 만족감이 있었다. 그러다 우연히 나를 아는 누군가가 내 글에 댓글을 남겼고, 아무도 모를 거라 생각했던 비밀공간을 들킨 나는 화들짝 놀라고 말았었다.


급히 그 글을 비공개로 바꾸고, 댓글을 곰곰이 들여다보는데  기분이 그리 나쁘지는 않았었다. 오히려 나를 이렇게까지 지켜봐 주고 있었던 그 사람의 마음에 고마움에 왠지 모를 울컥함이 올라오기도 했다.

나만 몰랐었다. 나를 지켜보고 응원해주는 사람들이 내 주변에 몰래 숨어 있었다는 것을.





 지나가다 무신경하게 "너 글 참 잘 쓰더라."라고 던지는 그 한마디들이 내 심장을 뛰게 했다. 실제의 내 모습과는 완전히 다를 나의 또 다른 모습들이 받는 낯선 평가는 벅찬 기쁨으로 다가왔다. 그렇게 나의 비밀 일기장은 비밀인 듯 비밀이 아닌 듯 오랫동안 쓰였다. 한 번씩 다시 보면 참 부끄러운 글들이 많다. 가감 없이 써 놓은 나의 솔직한 속마음들이 귀엽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하다. 철없던 20대의 기록들이기에 오래도록 남겨졌으면 좋겠다. 새로 무엇인가 그곳에 쓰이진 않겠지만 말이다. 




그러다 브런치를 알게 되었다. 인정을 받고 싶은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브런치를 시작했던 것 같다. 모르는 사람들과 글로서 소통을 할 수 있다는 엄청난 장점은 몰래 쓰는 글쟁이에게 큰 선물로 다가왔다.

오래도록 글을 쓰지 못할 때도 있었지만, 글쓰기를 멈출 순 없었다. 그렇게 하나 둘 남기기 시작한 브런치의 글이 어느새 100개가 되었다. 어찌 보면 별 것도 아닌 일이지만, 나에게는 그 무엇보다 값진 성취이다.



브런치를 시작하고 딱히 소문을 냈던 건 아니지만 간간히 친구들에게서 연락이 온다. 가장 기쁜 연락은 어딘가에 내 글이 나타났다는 소식이다. 브런치 메인에 몇 번 오르고 다음 페이지에도 몇 번 올랐나 보다. 구독자도 늘었고 아는 지인도 늘었다. 그래 봤자 지인 독자는 서너 명뿐이다. 여전히 이 공간을 모르는 지인이 훨씬 많은 것은, 가족이나 남편에겐 알려줄 수 없는 나의 비밀스러운 속마음이 가득 쓰여 있기 때문이리라. 그저 나만의 속풀이 장소로 오래오래 유지하고 싶은 비밀 공간이다. 

몇 안 되는 지인들의 고마운 알은체가, 낯선 누군가의 글이 좋다는 칭찬 한마디가 내 브런치를 지금까지 키워온 것 같다. 





한 때는 글쓰기를 업으로 하고 싶다는 꿈도 꾸었다. 아니 여전히 현재 진행형인 꿈이다. 정말 나도 책을 낼 수 있을 것만 같아 섣부른 도전을 할까 싶기도 했지만, 아직은 많이 부족한 글솜씨임을 알기에 그 꿈은 잠시 저 멀리 보내 두려고 한다. 그저 지금처럼 간간히 쓰기나 해야지.   


대신 새로운 도전을 또 시작했다. 내년에는 둘째도 태어날 것 같다. 둘째와 함께 또 새로운 육아 이야기를 쓰게 되겠지만, 그에 앞서 또 다른 공부를 해 보려고 한다. 아이를 키우며 글을 쓰며 공부를 하는 삶. 아니 아이를 키우며 또 다른 공부를 하며 가끔 글을 쓰게 될 것 같다. 한동안은 말이다. 



지금의 내 삶이 내가 상상했던 모습은 결코 아니지만, 그냥 지금의 이 모습을 받아들이고 만족하는 법을 이제야 조금 깨달아 가는 것 같다. 나의 지난 선택들이 만들어 놓은 지금의 길에서 그래도 내가 숨을 쉬고 빛을 낼 수 있는 건 무엇인가 하고 싶은 일이 있다는 그 이유 때문이지 싶다.



지금은 잠시 내려놓더라도 잊히진 않을 꿈이 있기에 괜찮다.



참 다행이다. 아직도 꿈을 꿀 수 있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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