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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니 Sep 10. 2019

가장 소중한 묵은 때

사라진 확신은 어디로 갔을까?



도통 글이 써지지 않는 시간들을 보냈다.


완성되지 못한 글은 서랍에 쌓였고, 숙제를 미뤄둔 아이처럼 더욱더 글쓰기에 소홀해졌다.


이럴 때가 종종 있다. 일종의 무기력증이 나를 온통 잠식해버려 아무런 것도 하지 못한 채 시간만 흘려보내는 시간이 말이다. 이런 시간도 인생에서 필요한 것은 분명  맞겠지만, 어쩐지 마음이 조바심이 난다. 바쁘게 바쁘게만 살아오던 습성은 직도 온몸에 베여있는 듯하다.


오늘은 어쩐지 글이 쓰고 싶어 져 끄적임을 시작해보긴 하지만 끝을 낼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마무리가 너무 어렵기만 한 요즘이다.



-



예전 여행 중에 친구의 초대로 포르투갈의 친구 집에 잠시 머문 적이 있었다.

친구는 출근을 했고 무료하게 집안을 서성이다 아침에 친구가 사용한 흔적이 남아있는 티 프레스기를 발견했다. 거지를 해 주려고 보니 티 프레스에는 오래도록 쌓인 것으로 보이는 원두의 기름때가 잔뜩 끼여 있었다.

친구를 위해 무엇이라도 해 주고 싶었던 나는 티 프레스기를 하나하나 분해해서 깨끗하게 닦아 놓았다. 작은 일이었지만 끗해진 티프레스를 보 기뻐할 친구를 생각하며 자 즐거웠었다.


퇴근을 한 친구에게 짠~ 하고 티프레스 기를 내밀었는데 친구는 좋아하기는커녕 화가 난 듯한 당혹스러움을 내비치는 게 아닌가?


"너무 더러워서 내가 씻었는데... "


예상했던 반응이 아니라 당황해하는 나에게 친구는 마지못해 잘했다고 하는 듯 보였다. 매우 어두운 표정으로 말이다.


"고마워. 그런데 사실 이건 매일 커피를 먹는 티 프레스기라 일부러 안 씻고 있던 거였어. 내 가장 소중한 시간에 세제를 묻히고 싶지 않았거든."


친구의 말에 나는 정말 충격을 받았었다.


그릇은 늘 깨끗해야 한다고 알고 자란 나에게 일부러 만들어 놓은 묵은 때라는 것은 정말 듣지도 보지도 못한 것이었다. 간과 함께 쌓인 소중한 묵은 때라니... 그리고 그 묵은 때를 잃어 상심한 친구의 얼굴이라니...



그렇게 나는 몰랐다는 핑계로 그가 소중히 쌓아놓은 시간의 흔적을 하루아침에 없던 일로 만들어 버렸다. 전혀 의도치는 않았지만 작은 호의가 폭력 아닌 폭력이 되어 그에게 상처를 남긴 것이다.



친구 집에 머무르는 대가로 무엇인가를 해야만 할 것 같던 나의 강박이, 그릇은 깨끗해야만 한다는 나의 고정관념이 친구의 작은 우주를 망가뜨려버다.


친구는 괜찮다고 했지만, 그 집에서 머무르며 깨끗해진 티프레스로 커피를 마실 때마다 미안한 마음이 들었었다. 얼른 커피 찌꺼기와 기름이 다시 쌓이도록 친구가 출근하고 난 뒤에 두세 잔씩 커피를 마셔댔었었다. 그리고 어쩐 일인지 그 기억이 요즘 들어 자주 떠오른다.




-



쓰다만 글들을 들여다보면 사람에 대한 것이 많다. 요즘 내가 만나는 사람들, 특히 나와 많이 달라 내가 이해하기가 어려운 사람들에 대한 글 말이다. 그래서 글을 마무리하지 못한 것 같기도 하다.


확신이 없으면 글을 쓸 수 없다. 아니 결론을 내릴 수 없다. 결론을 내릴 수 없는 글은 마무리되지 못한 채 먼지만 쌓이기 마련이다. 원래도 시작보다 끝맺음이 어렵던 나인데, 요즘의 이런 마음은 시작조차 어렵게 만고 있다.


나의 기준과 판단만이 옳다고 확신하던 예전의 나는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누군가에 대한 나의 판단이, 무심결에 던진 나의 한마디가 칼날보다 매섭게 누군가를 베어버린 건 아닐까?


나에게 내가 아닌 타인을 판단하고 평가할 권한도 자격도 없는데 너무 쉽게 말을 내뱉아댄 건 아닐까?


자신만의 견고한 기준으로 쌓아왔을 저마다의 우주를 어쭙잖은 나의 고정관념으로 망가뜨려 버린 건 아닐까?



깨끗해진 친구의 티프레스를 보며 느꼈던 그 복잡 미묘했던 감정이, 그때의 당혹감이 자꾸만 떠오르는 요즈음의 나는 아무런 것도 결정하지 못하는 결정장애를 얻 듯하다.


이게 나이가 들어가는 자연스러운 과정인 건지 아니면 나에게만 일어나는 어떤 종류의 부적응인 건지 잘 모르겠다. 판단하기가 너무 어렵다.



어느 날 갑자기 사라져 버린 나의 확신이 조금은 그립다.







법무부 장관 임명을 놓고 한동한 나라가 떠들썩했다. 나 역시 촛불을 들고 광화문을 나갔던 사람으로서 관심을 가지고 들여다보긴 했는데, 이 넘쳐나는 정보들이 옳은지 그른지 도통 판단을 내릴 수가 없었다. 그렇게 나는 어느 날은 나쁜 사람 어느 날은 착한 사람 어느 날은 그래도 괜찮은 사람으로 그를 평가하고 있었다. 고작 한 줄의 글이나 댓글만을 읽고서 말이다.


모두가 각자의 신념에 확신을 가지고 내어놓는 각자의 결론 속에서 나는 물음표 풍선을 들고선 표류하고 있었다.



그래서 무엇이 진실일까? 과연 무엇이 옳은 것일까?



아직은 알 수가 없다. 어느 누가 알 수 있을까?


너무도 쉽게 내려지는 순간의 판단들과 일회적인 신념들은 시간이 지나면 그 빛을 잃기 마련이지만, 글로 남겨진 시간은 역사가 되어 오래도록 빛을 발하리라 믿는다.


그렇게 지금의 시간들이 역사가 되는 먼 미래의 언젠가엔 알게 되겠지. 무엇이 옳았던지를 말이다.






역사는 쓰여지는 것이고 쓰여진 것들은 사라지지 않는다.


넋 놓고 흘려보내던 일상은 이제 그만두고 다시 써 보려 한다. 서랍 속에서 잠자고 있는 글들도 이제 그만 마무리를 해 주어야지.


지금의 나 또한 이렇게 나의 글 속에 박제가 되겠지만 먼 훗날 다시 들여다보았을  지금의 이 모든 순간들을 떠올리게 되겠지. 무것에도 확신하지 못한 채 부유하는 2019년의 나 켜켜이 쌓여있는 때의 일부가 되어 오래도록 남겠지. 어쩌면 지금부터 나의 역사는 새로쓰일지도 모르는 일이다.


지금은 다시 묵은 때가 많이 껴 있을 예전의 그 깨끗하던 친구의 티 프레스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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