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원급부터 과장 정도까지의 어느 정도 직급이 있고 가정이 있는 아저씨들. 그렇게도 집에 들어가길 싫어하던 아저씨들을 보며 정말 의아해했던 기억이 난다. 매일 저렇게 술에 취해 집에 들어가면 아내가 싫어할 텐데 정도의 생각은 했지만, 뭐 내 일이 아니니 크게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지냈던 시간들이다.
그즈음 <슈퍼맨이 돌아왔다>라는 프로그램이 인기를 끌고 있었다. 가정적이고 다정하고 육아에 헌신적인 젊은 아빠의 모습과 너무 귀여운 꼬마들의 일상이 전 국민의 사랑을 받고 있었다. 당연히 내가 이루는 가정 또한 그런 모습일 것이라 생각했다. 매일 피로에 찌들어 지쳐 있는 회사 아저씨들의 모습은 나와는 상관없는 이야기라 생각했다. 정말로 나는 그렇게 믿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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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을 갓 했던 시기의 남편은 3년 차 대리였다. 사원을 졸업한 지 얼마 되지 않은 풋내기 대리였기에 하는 일도 수월한 편이었다. 개인적인 시간을 많이 낼 수 있었던 그때의 남편은 공과 사를 확실히 구분하며 워라밸을 맞춘 삶을 추구하고 있었다. 나름 자상한 남편이었고 슈퍼맨이 되려 노력하는 초보 아빠였다. 우는 아이를 달래려 퇴근 후 아기띠를 하고 온 동네를 돌아다니기도 했고, 주말이면 근처 공원에라도 나가 산책하며 아이를 위한 시간들을 보냈다. 가끔은 나에게 자유를 주고 혼자서 아이를 도맡아 보기도 했고, 주방에서 간단한 요깃거리를 만들어 오기도 했다. 7시 30분에 집에서 나가 7시 30분에 집으로 돌아오는 남편의 일상은 거의 대부분 동일했고, 아주 가끔씩 회식에 참석하느라 10시 즈음 들어왔다. 이땐 아주 착실하고 가정적인 남편이었다.
아이는 자랐고, 남편은 과장이 되었다. 그리고 둘째가 태어났다. 과장이란 직급은 많은 것들을 시작하고 또 끝내야 하는 자리이다. 시키는 것만 일정에 맞춰 해내면 되는 자리가 아니기에 일정에 자주 변수가 생기곤 했다. 야근이 잦아졌고, 술자리도 늘었다. 똑같이 7시 30분에 집에서 나갔지만 들어오는 시간은 9시로, 10시로 늦어졌다. 아이들이 아빠의 얼굴을 보지 못하고 잠드는 날이 늘어났고, 아직 어린 둘째는 토요일마다 아빠를 보면 낯선 사람에게 안긴 양 울었다. 집에 들어온 남편은 피로에 찌들어 아무런 것도 하기 싫어했다. 늦은 저녁을 허겁지겁 먹고 나선 늘어져버렸다. 아이랑 놀아주는 건 아주 잠깐이었고, 놀아주지 않는 아빠를 아이도 찾지 않았다. 일상이 피로한 남편은 슈퍼맨이 되길 포기해버렸다. 슈퍼맨도 여유가 있어야 남을 구하는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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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이면 우리 집은 한바탕 전쟁이 일어난다. 주말이 없는 아이들은 아침부터 일어나 엄마를 깨우고 난장판을 만들기 시작한다. 내가 부스스 일어나 아이들에게 간단히 간식을 먹이고 제대로 된 끼니를 준비하는 동안 남편은 쿨쿨 자고 있다. 평일에 피곤하니 주말엔 늦잠을 자게 두는 편이지만 12시가 넘어가면 슬슬 화가 나기 시작한다. 첫째 특파원을 보내 일어날 생각이 없는 남편을 깨워 억지로 밥을 먹이고 아이들과 놀 것을 요구하지만 여전히 피곤한 남편은 보통 소파에 느러누워 버린다. 리모컨으로 채널을 돌리는 아빠 앞에서 아이들은 장난감을 가지고 놀기도 하고 아빠 위를 올라타며 놀기도 한다. 주방으로 피신해 그 모습을 보는 나는 또 화가 나기 시작한다.
"제발 티브이 끄고 아이들하고 좀 놀아줄 순 없어?"
소리치는 내 목소리는 남편 귀까지 잘 닿지 않는지 매번 차단당하곤 한다. 결국 거실로 나가 리모컨을 뺏고 등짝을 한 대 때려 보지만 곰이 되어버린 남편은 쉬이 움직이지 않는다.
"주말엔 아이들하고 좀 놀아줘!"
"놀아주고 있잖아."
...
남편에겐 아이들에게 안정된 환경을 제공해 주는 것, 주말을 함께 보내는 것 자체가 가장 중요한 아빠의 역할이었다. 당연하게도 나는 아이들과 주말이면 뛰어놀아주고 다양한 경험을 함께 해 주는 아빠를 원했다.
육아에 대한 관점이 이토록 달랐던 우리였기에 사소한 일들로 꽤나 자주 싸울 수밖에 없었다.
싸우고 또 싸우다 지쳐버린 내가 슈퍼맨 아빠가 되어주길 바랬던 기대치를 내려놓았더니 게을러 보이기만 했던 남편의 피로가 보였다.
늦은 밤 술자리에서 고개를 떨군 채 눈을 붙이던 그 많던 아저씨들이 떠올랐다.
내 남편이, 내 아이들의 아빠가 집 밖에선 그런 모습이 아니길 바랬지만 어쩌면 그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 만났을 때와는 많이 달라진 외모도 한몫 거들겠지.
누가 봐도 이제는 중년에 가까워 보이는 남편의 외모가, 직장에 처음 들어온 신입사원들에게는 피로에 찌들어 출퇴근을 하는 배 나온 아저씨로 보일 것만 같아 어쩐지 마음이 착잡해진다. 내가 봐 왔던 그 많은 아저씨들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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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아까지 하기엔 아빠들은 너무 피곤하다. 아이들이 모두 자는 시간에 일어나 콩나물시루 같은 지하철에 끼어 바쁘게 걸어 출근하고 하루 종일 일을 하다 또 한참을 서서 집에 돌아오는 시간이 너무 길다. 아빠들에게도 휴가가 필요한데 사실 남편이 제대로 쉬어본 건 고작 한나절 남짓일 뿐이다. 휴가랍씨고 어딜 떠나도 운전에 짐꾼에 온갖 뒤치다꺼리를 하고선 돌아오면 녹초가 돼버린다. 어린아이를 키우며 직장을 다니는 아빠에겐 휴가도 휴가가 아니다.
아이에게 슈퍼맨이 되기 위해선 함께 놀아주며 양질의 시간을 보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걸 알고 있지만 다른 중요한 것들을 먼저 하다 보니 너무 피로해 아이들과 놀아줄 수 없는 게 우리의 현실이다.
시간적 물질적 여유가 충분히 된다면 얼마든지 슈퍼맨으로 변신할 수 있는 이 시대의 아빠들이지만, 삶은 생각보다 여유롭지 않다. 빚으로 시작해 아이와 함께 자라는 빚은 슈퍼맨도 고꾸라지게 만드는 무거운 짐이다.
남들이 다 한다는 결혼도 출산도 내 집 마련도 우리의 힘으로 스스로 해 내며 일궈왔지만, 여전히 삶은 여유롭지 않다. 새롭게 얻어낸 것들을 지켜내기 위한 사투가 그 여느 때보다 힘들게 느껴진다. 우리의 힘만으로 어찌할 수 없는 어려운 일들이 자꾸만 생기는 기분이다.
주변 아이 또래의 다른 집을 살펴봐도 다들 비슷하다. 아이를 위해 더 좋은 환경을 만들어 주기 위해 선택해 온 결정들이 부모의 여유를 잡아먹고 있다. 하지만 그 속에서 아이들은 해맑게 자란다.
아이들의 미소를 지키기 위해, 아이의 꿈과 열정을 키워주기 위해 지친 엄마 아빠들은 힘든 내색 없이 열심히 달린다.
어쩌면 슈퍼맨은 대단한 게 아닌지도 모르겠다. 티브이에 나오는 것처럼 신나게 몸으로 놀아주고 다양한 체험을 하게 해 주며 좋은 곳, 멋진 곳을 함께 다니는 것이 아니라, 평범한 일상이 망가지지 않게 지켜내는 것이 진정한 슈퍼맨의 힘이 아닐까? 그저 평범하게, 보통으로 이 모든 것을 지켜낼 수 있는 것에 감사하는 마음이 드는 요즘이다.
옆집에 사는 슈퍼맨 타령 그만하고 우리 집 배 나온 아저씨한테 잔소리나 그만해야겠다 다짐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