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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니 Mar 10. 2022

커피 마시면 못 잔다며?

카페인 중독자의 밤



커피를 먹지 않으면 어쩐지 멍해지고 집중이 잘 되지 않는다. 하루를 잘 보내기 위해서 마시는 모닝커피 필수가 되어버렸다.


직장을 다닐 출근길 커피 한잔 테이크 아웃하고,

점심 후 시끄러워진 입안을 씻어 줄 커피 한잔을 또 테이크 아웃했다. 중간중간 미팅이라도 있는 날엔 또 한두 잔의 커피가 추가되었다. 그렇게 나의 회사 책상 위에는 늘 커피 한잔과 생수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아쉽게도 카페인이 몸에 너무 잘 맞는 편이라 저녁 커피는 즐기지 못했다. 저녁 커피를 먹는 날엔 새벽까지 말똥말똥해 잠을 이루기 힘들었고, 그런 밤을 보낸 다음날은 샷 추가한 커피로도 컨디션이 쉬이 회복되지 않아 의도적으로 피하곤 했다.

커피가 너무 먹고 싶은 밤엔 디카페인 커피를 마셨지만, 디카페인에도 살짝 카페인이 묻어있어 평소처럼 숙면에 빠지긴 어려웠다.



'카페인에 약해서 저녁엔 커피 못 마셔.'로 10년을 넘게 살아온 나인데 어찌 된 일인지 요즘은 저녁 내내 커피를 마셔도 잘만 잠이 든다.







어쩌다 갑자기 카페인에 둔한 몸이 되어버린 걸까?


어쩌면 카페인에 반응하는 건 예민한 몸이 아니라 날카로운 정신에 있던 게 아니었나 싶기도 하다.


직장을 다니던 시절엔 늘 날이 서 있었다.

당장 해야 하는 일들과 조금 있다 해도 되는 일, 그리고 한 달 내에 해야 하는 일 들로 머릿속은 늘 복잡했고, 카페인이 들어오면 형체 없이 꿀렁대던 수많은 상념들이 얼음처럼 뾰족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런 상태로 하루를 보내면 밤이 돼도 그 날카롭게 얼어버린 얼음이 쉬이 녹지 않았다. 잠들기 직전까지도 뾰족하게 굴러다니다 잠들 때가 되어서야 모서리가 많이 뭉둥거려져 잠에 들곤 했었다.

불면증이 있나 싶을 정도로 잠들기까지는 제법 시간이 걸렸는데, 저녁에 커피라도 마신 날엔 그 뾰족함이 쉬이 사라지지 않아 더 잠들지 못했다.



그런데 아이를 키우는 요즘은 낮이고 밤이고 나에게 별 뾰족함이 없다. 아이와 함께하는 평화로운 하루에는 날이 서 있어야 하는 예민한 일들이 없다.


물론 끝없는 육아에 피곤하고 고단하고, 뜻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없어 스트레스를 받기도 하지만, 직장 다닐 때의 그 날카롭고 뾰족한 스트레스는 없다.


육체의 피로는 고맙게도 커피가 잡아준다. 그리고 아이들이 잠들고 난 늦은 밤의 소중한 시간을 혼자 만끽하려면 일찍 잠들 수 없다.

다음날 일찍 일어나 반드시 해결해야만 하는 이해관계가 얽힌 복잡한 일이 없어지고 나니 새벽까지 잠들지 않아도 괜찮았다.


그렇게 되고 나니 커피 중독자인 나는 저녁 커피도 즐길 수 있게 되었다.


좀 늦게 잠들어도, 다음날 좀 피곤해도 괜찮은 나날들.


육아의 일상이 그래도 직장 생활보다 낫다 느껴지는 몇 안 되는 순간이다.







코로나로 엉망이 된 일상 속 집에 갇힌 두 아이들을 돌보다 보니 커피내가 누릴 수 있는 몇 안 되는 여유 중 하나가 되었다.


"엄마 커피 한 잔 할게~!"


하면 6살이 된 큰 아이는 같이 원두를 갈아주고 향을 맡아주고 한 입만 맛보자며 입을 삐죽 내민다. 그러고는 얼른 먹고 나랑 놀자 하며 엄마의 커피타임을 기다려준다.


주말이면 아직 어린 동생이 낮잠을 자는 동안 둘이서 카페 데이트도 종종 하곤 한다. 커피 중독자 엄마를 둔 아들이라 카페는 앞으로도 계속 다니게 되겠지.





커피를 마시는 게 약을 먹는 것과 같은 기분이 들던 그 시절로는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다.


사회에서 세 발짝 쯤 떨어져 나와보니 이제야 좀 알 것 같다. 모든 일에 그렇게 날이 서 있을 필요가 없었다는 것을 말이다.


조금 더 부드럽게 살아도 되었을 것을 왜 그렇게도 나는 예민했던 걸까?


커피의 향을 즐기고 맛을 음미하기에도 부족한 시간인데 뭘 그렇게 쫓기듯 살아왔나 모르겠다.



잠을 자야만 한다는 강박이 없는 하루들.


아마 누군가에겐 사치로 보일 수 있을 그런 하루들이겠지만 


충분히 바쁘게 사는 우리들이 카페인을 채찍 삼아 마시며 스스로를 너무 닦달하지 않고 살 수 있길,


적어도 우리 아이들의 세상은 그러하길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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