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Altapuerca
부스럭 거리는 소리에 또다시 잠에서 깬다. 8개의 침대, 작은 편에 속하는 이 알베르게에서 꽤나 편한 휴식을 취했다. 어제 얻은 극도의 피로감과 코 고는 사람이 없는 행운이 만난 덕 일 것이다.
케샤와 함께 주방에서 일회용 수프를 끓여 먹는다. 아침저녁으로는 꽤나 쌀쌀해 따뜻한 음식이 절로 생각난다. 준비해 둔 음식이 없어 수프로만 끼니를 때우고, 같은 방을 쓴 스페인 가족과 인사를 나눴다. 대부분의 스페니쉬들은 스페인어만 사용한다. 하지만 낯선 동양인 여자에 대한 엄청난 호기심으로 많은 것을 물어보려 늘 애를 쓴다. 정말 힘들게 대화라고 할 수도 없는 단어의 나열을 주고받고는, 부엔 카미노로 끝낸다. 그네들에게는 이 조그만 동양인 여자가 그저 신기한가 보다.
가방을 챙겨 밖으로 나와보니 숙소 앞 벤치에서 굴리가 명상을 하고 있다. 덩치와 전혀 안 어울리는 전직 요가강사 굴리, 명상하는 폼은 꽤나 전문가스럽다.
캐롤라인이 알베르게 옆 레스토랑 입구에서 짐을 싸고는 주인과 무엇인가 이야기를 하고 있다. 발이 너무 아프고 배낭이 너무 무거운 그녀는 오늘 배낭을 택배로 먼저 보낼 예정이다. 꽤나 많이 상업화되어있는 이 길 위에서는 가능한 일. 너도 배낭을 먼저 보내지 않겠냐고 나에게도 묻는다. 괜찮다고 대답한다.
어떤 사람은 고통을 참으며 걷고, 어떤 사람은 고통이 오면 쉰다. 고통을 조금 덜고자 하는 사람도 있고, 때론 포기해 버리는 사람도 있다. 이 길 위에는 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걷고 있었고, 나는 그들의 방식을 존중한다. 하지만 나는 끝까지 나의 힘만으로 이 길을, 이 고통을 이겨내야겠다는 쓸데없는 욕심이 있었다.
어떻게 생각하면 정말 쓸데없는 욕심, 하지만 그러고 싶었기에 그녀의 달콤한 유혹을 거절한다.
레스토랑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는 안토넬로를 만났다. 나도 커피와 초코빵을 주문했다. 캐롤라인이 합류한다. 그녀는 몹시 고통을 받고 있었으며, 걸음이 느렸고, 고통을 쉼 없이 토로했다. 아픈걸 아프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괜찮지만, 같이 하루 종일 걷기는 너무 힘들다. 쉴 새 없이 힘들다고 불평하는 사람과 함께 있는 것이 이토록 괴로운 일인지 미처 몰랐었다.
아픈 그녀를 남겨두고 케샤와 나는 서둘러 출발을 했다. 케샤도 캐롤라인에 대해 나와 같은 것을 느꼈다고 했다. 같이 걷기 너무 힘들어서 어떻게 해야 하나 많이 고민했다고. 그리고 우리 둘이 먼저 출발하게 되어 다행이라고 한다. 역시 사람이 느끼는 것은 거의 비슷한가 보다.
아침에 캐롤라인과 함께 걷고 싶지 않다고 케샤에게 얼핏 얘길 했는데, 그녀는 내가 혼자 있고 싶다고 말한 것으로 이해했나 보다.
"좋아. 지금부터 혼자 걸을 수 있게 내가 먼저 갈게. "
라고 말하고 그녀는 앞서가기 시작한다.
"그럴래? 나중에 보자. 조심하고. "
진심으로 나는 혼자 걷고 싶었기 때문에, 오해가 있는 듯했지만 굳이 풀려고 하지 않았다. 다리가 긴 케샤는 성큼성큼 잘도 나아간다. 나는 부지런히 그녀를 쫒아가려 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를 놓치고 말았다.
나는 초반의 내 페이스대로 40분쯤 걷고 10분쯤 쉬어가며 길을 걸었다. 아무래도 내가 가장 늦은 순례자이지 싶다. 내 뒤로 걸어오는 사람이 없는 것을 보니 말이다. 물론 굴리가 내 뒤 어디쯤엔가 오고 있을 거란 짐작은 가능했지만 말이다.
사람 하나 없는 길을 걷다 보니 문득 외로워졌다. 자연스레 다시 루이스가 떠올랐다. 그 햇살과 바람과 입술이 떠올랐다. 그의 그 행동은 어떤 의미가 있는 걸까, 나를 좋아했던 걸까? 그리고 나는 그를 좋아하는 걸까?
그가 남기고 간 동전을 만지작 거리며, 우리가 다시 만나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지에 대해 계속 생각했다. 이럴 땐 생각이 너무 많은 내가 참 한심하고 원망스럽다.
남과 여 사이에는 사랑과 사랑이 아닌 관계만이 있다는 고정관념. 아무래도 이건 문화 차이에서 온 나만의 착각 혹은 불안감인 것 같다. 몰리나 케샤, 모든 순례자들은 루이스를 좋아했고 그에게 의지했다. 스스럼없이 안기고 안아달라 말하고 손을 잡고 그렇게 있는다. 하지만 뼛속부터 한국인인 나에게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의 행동들, 그가 남기고 간 동전, 그리고 이별하는 순간의 한줄기 바람, 너는 정말 아름답다고 말하던 루이스의 나지막한 목소리, 그리고 그 입술의 감촉. 모든 것이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리플레이되고 있었다. 그런 건 아니라고 부정하는 내 마음과 애써 부정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라고 하는 내 마음이 치열하게 싸운다. 이래서 내가 연애를 잘 못하고 사랑을 잘 못하나 보다. 믿질 않고 끝없이 의심하고 고민한다. 상대방은 아무 생각도 없는데 그저 혼자 그럴 뿐이다. 누군가가 속 시원하게 알려줬으면 좋겠다. 괴롭다.
꽤나 자주 쉬어가며 걸었다. 신발은 플립플랍으로 바꿔 신은지 오래다. 그리고 그다음 마을에서 이탈리아 삼인방을 만났다. 조지아, 샤샤, 시몬. 밀라노에서 온 이들은 고작 18살이었다. 외모는 거의 내 또래로 보였는데, 나이를 듣고 또 한번 깜짝 놀랐다. 알렉산더가 그들과 함께 있었다. 그의 친구 몰리와 케샤 등 우리 친구들의 행방에 대해 물었다. 안토넬로는 아나이즈와 앞서 갔고, 굴리는 아직 지나가지 않았으며 몰리와 케샤는 못 봤지만 아마 훨씬 멀리 갔으리라 말한다. 그렇구나. 다들 참 빠르구나.
마을에 있는 작은 우물가에 앉아 과일과 비스킷을 조금 먹고 먼저 자리에서 일어섰다. 조금 있다보자는 인사를 하고 먼저 걷는다. 혼자 걷는 것이 외로웠지만 그들과 함께 걷고 싶진 않았다.
지금 이 길은 혼자 걷고 있지만 어디엔가 나와 같은 순례자들이 내 앞과 내 뒤로 걷고 있다는 잘 알고 있다. 혼자이지만 혼자이지 않은 곳, 또 함께이지만 함께이지 않은 곳이 바로 이 길이다.
마을을 벗어날 때 즈음, 아무도 보이지 않는 숲 속에서 누군가가 나를 부른다.
"헤이 ~ 지니 ~"
안토넬로의 목소리인데 어디에 있는지 보이지 않는다.
"어딨어?"
"여기 돌아서 안쪽으로 와봐. 여기 공짜 과일들이 널렸어! "
길 가에 있는 과일나무들은 순례자들에게 아주 소중한 존재들이다. 수분에 당분까지 더해주고 맛까지 있으니, 그야말로 하늘에서 내려준 선물이 아닐 수 없다. 진행방향에서 살짝 돌아보니 아주 조그만 샛길이 있었고, 길을 따라 작은 구멍으로 들어가니 과수원이 나왔다. 그리고 안토넬로와 아나이즈가 열심히 과일을 줍고 있었다. 지금은 관리의 흔적을 찾아보긴 힘들었지만, 한때는 누군가가 소중히 관리했을 과수원이었을 듯한 곳, 거기에는 배나무와 자두나무가 있었고, 열매들이 가득 열려있었다.
8월~9월, 과일들이 한껏 물오르는 기간에 카미노를 걷게 된 것은 정말 행운이었다. 어디서나 쉽게 사과, 배, 포도, 무화과를 따먹을 수 있었으니 말이다. 배 두 개와 자두 네댓 개를 주워 담고, 밖에 있는 우물에서 씻어 먹었다. 약을 뿌리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과일들은 이쁘지는 않았지만 몹시 달콤하고 맛있었다.
욕심쟁이 안토넬로는 티셔츠 아랫부분을 뒤집어 말아 주머니를 만들고 그곳에 과일을 한가득 담았다. 장사하려고 그러냐고 우스갯소리를 던지고 먼저 가겠다 말하고 길을 나선다. 입에 남은 자두의 향이 그 달콤한 여운을 길게 남기고 있다. 발걸음이 한결 가볍다.
배낭은 무겁고 발은 아프다. 하지만 그런 신체적인 고통보다 복잡한 내 머릿속이 더 고통스럽다. 걷다 보면 그런 생각들이 모두 사라지고 그저 걷기만 할 때가 있는데 그 잠깐의 순간은 모든 고통을 잊게 된다. 걸을 만큼 걸어야만 느낄 수 있는 그런 상태를 기다리며 계속 길을 걷는다.
햇살이 뜨거워 바닥만 보고 걷는 오후, 아래를 보니 나뭇잎이 하트 모양 그림자를 만들고 있다. 나뭇잎은 전혀 하트 모양이 아닌데 어떻게 저런 그림자를 만들었을까? 그저 신기할 따름이다.
어쩌면 그냥 스쳐 지나갔을지도 모를 길 가 작은 풀잎의 그림자. 나는 발견했고, 이런 발견을 가능하게 해 준 모든 것에 감사했다. 지금껏 내가 살아오면서 놓치고 지나간 경이로움이 얼마나 많을지..
그토록 바쁘게만 살아온 지난날이 못내 아쉬웠다.
다음 마을 입구에 있는 레스토랑에서 점심시간을 갖기로 했다. 혼자서 레스토랑에서 무엇인가를 먹기는 처음이었다. 배는 별로 안 고팠지만 이번 마을 다음에는 한참 동안 마을이 없기에 샌드위치를 하나 샀다. 또띠야라고 부르는 계란과 참치를 두껍게 부친 것을 빵 사이에 끼워 파는 토르티야 샌드위치를 골랐다. 초리소와 치즈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나는 늘 빠따따 토르티야 혹은 프렌치토스트를 먹는다. 스페인 하면 초리소, 하몽 이라지만 그 냄새나는 것들은 도저히 내 입맛에 맞질 않는다.
샌드위치는 포장하고 클라라 한잔을 주문했다. 테라스 좌석이 도롯가라 별로 맘에 들지 않았지만 레스토랑 안에 있는 그 수많은 스페니쉬 아저씨들의 눈빛이 부담스러워 밖을 선택했다. 스페인인의 바나 레스토랑에는 정말 아저씨들이 많다. 여자들은 다 어디 가고 없는지 궁금할 지경이다.
그들은 가게를 지키고 있다가 낯선 사람이 들어오면 그에게 집중하고 어떻게 말을 걸 건수가 없나 기회를 엿보고 있는 듯하다. 그리고 말을 하게 되면 알아듣지도 못하는 스페인어로 이것저것 묻는다.
루이스가 또 생각난다. 5개 국어에 능통한 그와 함께일 때는 모두가 쉽게 친구가 되곤 했었다. 이런 아저씨들과도 잘만 이야기했는데, 스페인어를 못하는 나에겐 쉬운 일이 아니다.
"로 씨엔 또, 노 아블로 에스파뇰~"
미안합니다만, 전 스페인어를 못해요.라고 웃으며 말해주고 밖으로 나왔다. 레스토랑 입구의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아서 클라라를 마시다 보니 저쪽 끝에서 굴리 일행이 나타났다.
굴리와 안토넬로, 알렉산더와 이탈리안 젊은이 3명, 그리고 아나이즈. 나를 본 그들은 냅다 내 자리 옆으로 앉는다. 그래도 혼자인 것보단 이런 분위기가 나은 것 같다. 이곳에선 말이다. 안토넬로가 주워온 과일을 주섬주섬 꺼낸다. Awesome! 모두 감사하는 마음으로 자연의 선물을 즐긴다.
다들 간단한 끼니를 준비하고, 간단히 무엇인가를 먹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한다. 날씨가 덥고 오늘은 어디까지 가고, 어디가 아프다는 아주 일상적인 대화들. 매일 보다 보니 서로의 지금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가족 같은 느낌이다. 발목이 아파 통증 완화 스프레이를 발목에 뿌리고 떠날 채비를 한다. 옆 테이블에 앉아있던 독일인 여자아이가 따라나선다.
그녀 역시 나보다 어리다. 고작 21살. 나도 그녀도 서로의 나이를 묻고 놀랜다. 동양인은 정말 동안이긴 동안이다. 그녀는 함께 걸으며 어제 자신이 겪은 황당한 일에 대해 이야기를 해 주었다. 자기가 돈을 잃어버릴까 봐 바지 안에 안주머니를 달고 그 안에 돈을 넣어 놓았었다고 한다. 그런데 오늘 아침, 그 지퍼를 확인해 보니 돈이 없어졌다고 한다. 누가 훔쳐간 게 분명하다며 분을 못 이겨 씩씩대고 있는데, 난 좀 의아했다. 아니, 바지 안에 넣어놨고 그걸 입고 잤는데 어떻게 그 돈을 꺼내갈 수 있는 거지?
어디 떨어뜨린 거 아니냐고 물었는데, 절대 아니라며, 어제 같은 숙소에서 잔 다른 순례자도 돈을 분실했다고 한다. 사실 분실 사고는 꽤나 카미노에서 꽤나 빈번히 일어난다고 한다. 순례자들은 대부분 별로 가진 게 없기에 외부인은 순례자의 가방을 노리지 않지만, 어디에 무엇이 있고 누가 무엇을 얼마큼 가지고 있는지를 아는 내부인이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결국 범인은 같은 순례자의 이름으로 같은 길을 걷고 있는 이 중에 있다는 것이 못내 씁쓸하다. 세상에 믿을 사람 하나 없고, 안전한 곳도 하나 없다는 것이 이 길에서도 예외가 아니라는 것이 왠지 슬펐다. 왜 이토록 험한 세상이어야만 하는 걸까?
마을을 벗어나니 가파른 산 길이 이어졌다. 컨디션이 좋지 않았던 그녀는 금방 뒤쳐졌고, 나는 앞서 가게 되었다. 행운의 동전을 만지작 거리며 산길을 오른다. 한국의 산과 같은 숲이라 나는 걷는 기분이 꽤 좋아졌다.
잊고 있던 한국이 생각났다. 주말에 부모님과 함께 집 뒷산을 걷는 기분. 갑자기 가족들이 그리워졌다.
하지만 감상은 잠시뿐이다. 흐린 하늘이 한낮의 걷기를 조금 수월하게 만들어 주긴 했지만 역시 무거운 배낭을 메고 산을 오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발목의 통증도 계속 심해지고 플립플랍을 신을 수 없는 산길이라 발가락도 꽤나 아파온다. 그리고 나는 혼자였다.
굴리 일행이 뒤따라 오지 않나 연신 뒤돌아 봤다. 하지만 내 앞에도, 뒤에도 아무도 없었다. 혼자이고 싶었지만 막상 혼자가 되니 누군가를 찾게 되는, 내 마음의 이중적인 상태를 나도 이해할 수 없었다. 고독을 즐기자고 되뇌며 혼자 노래를 흥얼거리며 길을 걷는다. 오랜만에 한국 생각도 많이 했다.
완만한 언덕길을 올라 하늘에 맞닿아 있는 듯한 정상에 이르렀다. 비둘기가 그려진 비석이 하나 있었다. 아나이스가 그 근처에서 쉬고 있었다. 안토넬로는 앞서갔나 보다.
비석이 세워져 있는 돌탑 근처에 배낭을 베고 드러누웠다. 신발을 벗고 하늘을 바라보며 휴식을 취했다. 하늘과 구름이 너무 이쁘다. 어릴 적 내가 늘 그리던 하늘과 비슷한 색깔과 모양, 한국의 하늘도 이런 모습일까? 낯선 곳에 있어 새로워 보일 뿐 똑같은 하늘이고 구름이겠지.
근처에서 사진을 찍던 아나이스가 먼저 가겠다고 말한다. 잠깐 몸을 일으켜 잘 가라고 인사해줬다. 그리고 반대쪽 멀리에 있는, 새카맣고 조그만 한 사람을 발견했다. 피부색을 보니 아시안인 것 같다.
눈이 마주쳤다. 인사하기엔 너무 먼 거리라, 나는 다시 드러누웠다.
"한국인이세요?"
그렇게 나는 한국에서 온 인나 언니를 만나게 되었다. 인나는 30대 중반의 치열하게 삶을 살아온 한국 여성이었다. 지금은 한 달짜리 휴가를 내고 혼자 이곳으로 왔다고 한다. 그리고 오늘은 다리가 너무 아파 버스를 타고 몇일치를 이동을 했고, 이 곳이 얼마나 고독한 곳인지를 다시 느끼고 있다고 했다.
오래간만에 한국인을 만나 한국어로 긴 대화를 나누니 조금 힘이 나는 기분이었다. 가뜩이나 한국스러운 산길을 걸으며 한국 생각을 많이 했던 날이라 더 반가웠는지도 모른다.
지루한 길을 걸으며 우리의 대화는 쉴 새 없이 이어졌다. 영어로 대화하며 걸을 때 보다 한결 수월하다. 직장에 대한 이야기, 사랑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이 카미노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너무 씨끄럽고 복잡한 사회를 벗어나 좀 혼자 조용히 있고 싶어서 이 곳에 왔는데, 와보니 지독 시리 혼자더라고 한다. 혼자 인 것이 좋으나 한편으론 너무 외로운데, 그냥 끝까지 해내야겠다는 오기 걷고 있다고 하는 언니였다. 혼자이고 싶으나 외로운 그 마음, 나도 알긴 했지만 늘 친구들과 함께 였던 나였기에 혼자였다 할 수 없었기에, 그 마음을 온전히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잠깐 쉬어가자고 하고 둘이서 앉아 아까 사 온 샌드위치와 언니가 준비한 초코빵을 먹었다.
누군가와 함께라는 것, 적어도 무엇을 먹을 때는 조금 덜 외롭다. 언니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음식을 먹고 있는데 안토넬로가 시끄럽게 노래를 부르며 다가왔다.
" 엇! 한국인이 한 명 더 있었네?! 반가워 ~ "
웃통을 벚어젖힌 안토넬로가 반갑게 인사를 하고 지나갔다. 언니가 흠칫 놀란 듯하다. 이탈리아에서 온 24살짜리 친구고 성격이 정말 좋고 자주 함께 걸어 친구가 되었다고 간단히 소개를 해 주었다. 그리고 잠시 후, 굴 리와 알렉산더 등의 일행이 우르르 지나갔다. 그들도 한국인을 만난 것을 축하한다며, 점심 맛있게 먹으라고 너스레를 떨며 지나간다. 같은 사회에서 나고 자란 사람을 만난 다는 것, 적어도 같은 언어를 쓰는 사람을 만난다는 것이 얼마나 반가운지 아는 이들이었다.
인나 언니는 영어를 잘 못해 나처럼 이렇게 영어를 쓰는 사람들과 친해지지 못했다고 한다. 그리고 굳이 그럴 필요도 못 느꼈다고 했다. 혼자이고 싶어서 왔는데 굳이 사람들과 어울리고 싶지 않았다고 했다. 나도 영어를 썩 잘해서 그들과 어울린 것은 아니었다. 내가 이들과 어울리게 된 것은 우선은 루이스의 도움이 컸고,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고 틀리더라도 일단 말하고 보는 내 성격, 그리고 우연히 만들어낸 타이밍으로 말미암은 결과 일 뿐이다.
한국인들은 유독 두려움이 많은 것 같다. 틀리는 것에 대한 두려움, 내가 무엇인가 실수 하진 않았을까 하는 두려움 등. 그런 한국인의 성격이 이 길 위의 한국인들에게서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었다. 물론 문화 차이에서 나온 행동들은 어쩔 수 없다. 하지만 먼저 다가가지도, 다가오는 것을 받아들이지도 못하는 한국인들을 보면서 조금 안타깝다는 생각도 들었다. 물론 다 그런 것은 아니겠지. 나 같은 사람도 분명히 많이 있을 테니 말이다.
지금까지 만났던 네 명의 한국인들, 먼저 밥을 먹자 말하지 못하고 함께 하자고 제안해도 거절이 미덕인 마냥 거절하고 마는 태도, 함께 온 그룹에서 조금도 벗어나려 하지 않는 태도들.. 그런 태도들이 참 안타깝다. 그들은 이 길 위에서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경험, 사람의 경험을 놓치고야 말 테니 말이다.
메마른 땅, 그리고 메말라 있던 우리들의 마음. 인나 언니를 만나고 이야기하면서 한국이 얼마나 메마른 사회인지, 우리가 얼마나 치열하고 힘들게 살아왔는지, 그리고 그 속에서 우리는 행복할 수 없음이 당연한 것이 아닌지에 대해 생각했다.
무엇을 얻고자, 무엇이 그리 두려워 우리는 삶을 그토록 치열하게 이어가는 걸까?
시험, 취직, 승진.. 모든 것이 경쟁뿐인 그 속에서 나 자신이 얼마나 하찮은 존재인지도 알지 못한 채, 내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지도 알지 못한 채 그저 하루를 살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 그리고 우리.
다시 돌아가게 되거든 절대 예전처럼 살지 않으리 혼자 다짐해본다. 쉽진 않겠지만 말이다.
오늘 목적지가 나타났다. 그곳은 작은 알베르게였고, 나의 요란한 친구들은 모두 그곳에 짐을 풀고 있었다. 이미 다섯 시가 다 되어 가던 시간, 인나 언니는 6km 너머에 있는 다음 마을까지 가길 원했다. 나 역시 어쩐지 조용히 있고 싶은 마음에 친구들에게 나는 다음 마을까지 가겠노라 인사를 하고 인나 언니와 함께 길을 나섰다.
다음 마을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6시가 넘어 있었다. 그 역시 작은 마을인지라 돌아다니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아는 얼굴을 한 명도 발견할 수 없어서 어느 알베르게로 들어가야 할지 너무 고민이었다. 혼자가 되고 나니 숙소를 정하는 것조차 이렇게 힘들다.
입구에 있는 알베르게를 지나쳐 조금 더 나아가니 왼쪽으로 알베르게가 몇 개 보였다. 그리고 반가운 얼굴! 까뜨린이 저쪽에서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너무 예쁜 독일 친구 라라도 함께였다.
계획되지 않은 만남에 우리는 너무 반가워 소리를 지르고 서로를 끌어안고 호들갑을 떨었다. 나는 까뜨린이 묵고 있는 숙소에 짐을 풀기로 했고 인나 언니와 함께 침대를 쓰게 되었다. 씻고 나와서 보니 히데오, 콜린 등 몇몇 낯익은 얼굴들이 있었다. 첫날 만났던 일본인 히데 오상을 다시 만나게 된 것도 너무 반가웠다.
저녁을 어떻게 할 거냐고 물어보니 다들 알베르게에서 주는 저녁을 먹을 예정이라고 한다. 10유로라 꽤 비쌌지만 나도 함께 먹기로 한다. 씻고 있던 인나 언니를 찾을 수 없어 언니 몫까지 미리 계산했다. 나중에 인나 언니를 찾아 저녁을 계산했다고 얘기하니, 언니는 이미 다른 레스토랑에서 저녁을 주문하였노라며 친구들과 함께 저녁을 먹으라고 한다.
아.. 모두가 친구인 이 곳에서 그저 함께 어울리면 좋을 텐데.. 언니는 정말 혼자이고 싶었던 걸까? 아니면 무엇이 부담스럽고 싫어서 그랬던 걸까?
아무튼 나는 언니를 두고 까뜨린과 함께 저녁식사를 하러 야외 테이블로 갔다. 그녀를 다시 만나게 된 것은 정말 너무 큰 기쁨이었다. 우리는 그간의 안부를 열심히 나눴다.
저녁을 기다리는 동안 클라라 한잔을 먹으며 히데오상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히데오상은 와이프를 위한 선물로 그의 바람막이에 사람들의 메시지를 받고 있었다. 그는 정말 한국이나 일본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로맨티시스트였다. 나는 한국말로, 그녀는 독일어로 짧은 메시지를 남겼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무엇인가를 준비하는 마음이 참 아름다웠다.
저녁 메뉴는 스페인의 대표적인 요리이기도 하고, 순례자 메뉴로도 곧 잘 나오는 빠에야였다. 공기 좋은 야외에서, 와인과 함께 먹는 저녁은 정말 편안하고 행복했다. 다들 몹시 즐거워하고 있음이 느껴지는 저녁이다. 그때 갑자기 누군가가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모두 박수를 치며 노래를 감상했다. 정말 아름다운 저녁이었다. 그런데.. 노래가 끝나니 옆 사람이 이어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어찌 국가 별로 노래를 불러야 하는 듯한 묘한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까뜨린은 나에게 어쩐지 노래를 해야 할 것 같으니 나는 살짝 빠지겠다고 말한다. 나도 같이 빠지겠노라 말하고 노래에 자신이 없는 젊은 두 여자는 그렇게 저녁식사 테이블로부터 도망쳤다.
잠시 화장실 가는 척하며 자리에서 일어난 우리는 그곳을 벗어나고 서로의 연기력에 낄낄대며 웃었다. 멀리서 들려오는 노랫소리에 정말 빠져나오길 잘했다고 생각하며 우리는 마을을 한 바퀴 돌기로 했다. 하지만 많이 걷기엔 우리의 다리는 너무 지쳐있었다. 조금 걷다가 우리는 석양이 보이는 벤치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동안 네가 너무 그리웠노라고, 서로를 몹시 그리워했음을 얘기하며 나는 가슴 뭉클한 우정이 싹트고 있음을 느꼈다. 그녀는 나랑 비슷한 것이 많았다. 걷는 속도도, 말없이 걷는 것도, 음식 취향도 비슷했다. 그녀와 함께 걸으면 그저 둘이서 조용히 걷기만 했다. 함께이지만 혼자인, 정말 적당한 조합. 그녀와 둘이서 걸었던 것이 얼마나 행복했던 일인지를 케샤와 걷고, 혼자 걸었던 지난 며칠간 뼈저리게 느꼈었다. 그녀 또한 나와 같은 것을 느꼈으리라고 나 혼자 지레짐작해본다.
산토도밍고 이후의 카미노에 대해 이야기했다. 나는 루이스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했고, 그녀는 안토넬로에 대해 이야기했다. 지나갔던 사랑과 인생에 대해 이야기했고, 각자 놓고 온 원래의 삶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까뜨린은 나에게 처음에는 질투가 났다고 한다. 당당하게 여행을 선택하고 모든 것을 접고 훌쩍 떠날 수 있는 용기가 부러웠고, 그러지 못하는 자신이 한심해서 괴로웠다고 한다. 그리고 나와 비슷한 이유로 이 곳에 있는 안토넬로를 보면서도 질투를 느꼈고, 또 매력을 느꼈다고 한다. 그녀 역시 일탈을 꿈꾸고 있으나 안정된 이 생활과 가족의 기대를 저버리 수 없다고 한다. 하지만 나는 어렴풋이 느꼈다. 다시 돌아가게 되면 그녀는 예전과는 다르게 살 것임을 말이다.
해가 저물어 간다. 우리는 차가워진 밤공기를 피해 알베르게로 돌아가 한 시간여를 더 이야기를 나눴다. 우리를 두고 먼저 떠난 루이스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하고, 굴리 안토넬로 등 이 길 위에서 만난 너무 좋은 친구들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처음에는 이 길을 시작한걸 너무 후회하던 그녀가, 지금은 이 길이 너무 좋다고 한다.
기대로 가득 차 카미노에 오른 나에게 이 길은 거의 기적과도 같은 곳이다.
혼자이지만 혼자가 아닌 곳,
누군가에게는 지독한 혼자인 너무도 외로운 길이었고,
누군가에게는 기쁨으로 충만한 행복한 길이었다.
누군가는 고통 속에 몸부림치며 자신을 찾아 헤매는 길이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그저 끝까지 닿고자 하는 욕심의 길이었다.
이 길을 걷는 사람들에게 모두 다른 길, 수십만의 사람이 걷고 있지만 철저히 혼자 찾아내야 하는 나만의 길.
그 신비하고 마법 같은 카미노에서의 하루가 이렇게 또 저물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