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Hontanas
부르고스의 커다란 알베르게는 아침 이른 시간부터 수많은 순례자들로 부산스러웠다. 안토넬로와 아나이스에게 작별 인사를 하기 위해 우리는 아침부터 로비에 모였다. 메일 주소를 주고받고, 서로의 행운을 빌어 준다. 이미 여러 번 겪은 길 위의 이별에 우리는 그저 덤덤하다. 떠나는 사람은 슬픔과 아쉬움이 가득 하지만 남은 사람은 오늘도 여지없이 먼 길을 걸어야 하기에 오래 함께할 순 없다.
알렉산더와 아나이스를 배웅하기 위한 몇몇 친구들이 남고 나는 까뜨린, 산드라와 함께 길을 나섰다.
큰 도시를 벗어나는 것은 도시로 들어서는 것보다는 덜 단조롭다. 우리는 다시 도시에서 자연으로, 아스팔트 길에서 흙길로 넘어가게 된다.
커다란 땅 떵어리에 사람이 하나 둘 모이고, 건물이 하나 둘 생기고, 도로가 생기며 조금씩 조금씩 넓어져 하나의 도시가 된다. 그렇게 정해지지 않은 모양을 갖게 된 도시에서 멀어질수록 다시 사람도 건물도 없는 자연이 나타난다. 예전에는 의문조차 갖지 않았던 것들조차 너무 신비롭게 느껴진다. 이전엔 미처 느끼지 못했던 자연을 이 길 위에서 새롭게 배우는 중이다.
까뜨린과 산드라 그리고 나. 우리는 별로 많은 대화를 나누며 걷는 스타일이 아니다. 산드라와는 언어의 제약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저 말없이 우리는 각자의 길을 각자의 속도로 걷는다. 내 앞에 혹은 내 뒤에 일행이 있다는 사실만으로 안심이 되고, 함께 쉬고 음식을 나눌 수 있음에 그저 감사하다.
도시를 벗어나 구불한 흙길로 들어섰다. 까뜨린은 저만치 앞서 있고, 산드라는 나와 나란히 걷고 있었다. 갑자기 허리에 통증이 온다. 가방을 고쳐 메기 위해 어깨를 들썩이다가 허리에 뭔가 무리가 간 것 같다.
나는 잠깐 멈춰 섰다. 산드라가 함께 멈춘다.
"괜찮아?"
괜찮다고 말을 했지만 나는 가방을 풀었다. 그리고 아픈 허리를 풀기 위해 스트레칭을 했다. 지나가는 순례자들이 다들 한 마디씩 거든다. 순수하게 나를 걱정해주는 따뜻한 마음이다. 그렇기에 주저앉아 있을 수가 없다. 힘을 내라는 그 수많은 인사들이 하나의 에너지가 되어 내게 전달된다. 우리는 함께 길을 걸어왔고, 걷고 있고, 또 걸을 것이기 때문에 나만 멈출 수가 없다.
잠깐의 휴식 후 나는 다시 길을 걸었다. 먼저 가라는 나의 말에도 기어이 나를 기다려준 산드라가 참 고맙다. 조금 더 가다 보니 까뜨린도 멈춰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늘 따라오다가 갑자기 안보이니 걱정스러웠을 것이다. 그렇게 된 김에 조금 쉬어가기로 했다. 조그만 놀이터에서 우리는 준비해 간 빵을 나눠 먹었다.
길은 지루하게 이어졌다. 31km를 걸어야 한다는 압박감이 너무 컸는지 걸어도 걸어도 줄어들지 않는 거리가 원망스러울 뿐이었다. 편편한 길이 갑자기 사라지고 오르막길이 나타났다. 꽤나 큰 고개를 하나 넘어야 했다. 별 말이 없는 세 명의 순례자는 그저 묵묵히 오르기 시작했고, 언덕을 반쯤 올랐을 때 모두 지쳐 주저 않고 말았다. 길에서 살짝 벗어난 편편한 곳에서 우리는 배낭을 베고서는 드러누워버렸다. 이상하게 사람도 하나 지나가지 않았다.
마른 풀냄새가 났다. 살랑살랑 따뜻한 바람도 불어왔다. 눈을 감고 바람을 느꼈다.
아! 이 얼마나 평온한 순간인가!
우리 셋은 그 순간에 그저 녹아들어 버렸다. 그 누구도 말을 하지 않았다. 그저 눈을 감고 자연과 하나가 된 채 머물러 있을 뿐. 다리의 고통도 모두 사라지고 머리가 하얗게 비워졌다. 그렇게 스르륵 잠이 들어버렸다. 너무도 평온하고 달콤했던 씨에스타, 그때의 그 기분은 오래 기억될 것 같다.
갑자기 누군가가 내 다리를 스틱으로 툭툭 찔렀다. 나의 달콤한 씨에스타가 갑작스럽게 끝나버렸다. 기분이 별로다. 눈을 떠 보니 그저께 만났던 인나 언니였다.
"너 맞는구나 ~ 긴가 민가 했네. "
아는 얼굴을 다시 만나게 되어 반가웠다. 언니도 반가웠을 것이다. 잠깐 쉬어서 가라는 내 말에 언니는 괜찮다고 말하며 먼저 길을 떠났다. 나중에 보자는 기약을 남기고 말이다.
그 덕에 까뜨린과 산드라의 씨에스타도 끝이 나 버렸다. 나로 인해 그들의 휴식마저 끝나게 되어 미안한 마음이 든다. 그리고 스틱으로 나를 쿡쿡 찔러본 언니의 행동에 조금 기분이 나빠졌다. 차라리 이름을 부르거나 손으로 툭툭 쳤더라면 괜찮았을 텐데, 왜 언니는 스틱으로 쿡쿡 찔러본 걸까?
달콤했던 씨에스타를 방해받아 그런 건지, 아니면 그저 언니에 대한 뭔가 알 수 없는 불만이 있었던 건지 모르겠다. 어쩐지 화가 났었고, 나이가 말과 행동을 함에 있어 아주 큰 영향을 미치는 한국의 관습이 못내 아쉬웠다.
너무 개방적이고 평등한 친구들과 오래 지내서 그런 걸까? 어쩌면 당연하게 받아들였을 수도 있을 행동이 용납이 안됐다. 내가 자기보다 어렸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있었겠지.. 우리의 휴식을 보고 조용히 그곳을 지나친 다른 순례자들과는 다르게 말이다.
자주 만나지도 못하는 한국인인데, 만나면 오히려 더 신경 쓰이고 불편함이 느껴지니 참 이상하다. 너무도 제약이 많은 한국에서 살아온 내가 단 한 명의 한국인만 만나도 내 행동에 제약을 주게 되는 건 어쩌면 당연한 건지도 모르겠다. 국적, 해외에 나와 있으니 나의 "국적"의 울타리가 얼마나 굳건한지 느끼게 된다.
아직 갈 길이 멀었기에 우리는 길을 다시 걷기 시작했다. 이윽고 오르막은 끝이 났고, 내리막 없이 끝없이 넓은 평원이 펼쳐졌다. 힘들기로 소문난 까스띠야의 대평원이 시작되고 있었다.
온통 흙빛이다. 추수가 끝난 밀밭은 사막처럼 넓고 메말라 보였다. 길은 건조했고, 순례자를 위한 샘 하나 찾을 수 없었다. 물통은 비어갔고, 우리는 지쳐가고 있었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것은 날씨가 조금 흐렸다는 것.
온통 회색과 흙색 밖에 없는 길이다. 그 사이를 계속 걷는 것은 맑은 하늘 아래 걷기보다 더 힘들고 지루하게 느껴졌다.
까뜨린이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감기 기운이 도는 것이 몸 상태가 좋지 않다고 했다. 부족한 물을 서로 아껴가며 나눠 먹고 우리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목적지를 8km 정도쯤 앞둔 곳, 작은 알베르게로 가는 갈림길 앞에서 우리는 또 주저앉아 버렸다. 책에서는 그곳에 샘이 있다고 했지만, 샘을 찾을 수 없었다. 아 그 상실감이란!
초콜릿을 나눠 먹고선 앉아 있는데 빗방울이 조금씩 떨어지기 시작했다. 우비를 입지 않아도 될 정도로 가벼운 비였다. 그 약간의 비가 메마른 땅을 차분히 가라앉혀 주었고, 공기는 한결 부드러워졌다.
뜨겁고 건조한 여름, 그리고 차갑고 습한 겨울이 보편적인 기후라고 한다. 우리나라와는 정 반대이다. 뜨거운 건조함에 내 피부가 바싹 말라 들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다음 도시에서는 반드시 로션을 더 사야 겠다고 생각했다.
정말 지루한 길이었다. 단조로웠고 힘들었다. 그렇게 두어 시간을 더 걸어 우리는 마침내 나오지 않을 것만 같던 훈타 나스에 도착했다. 너무 지쳐 그냥 첫 번째에 보이는 알베르게로 직행했다. 그리고 그곳에는 앞서 간 굴리가 샌드위치를 먹고 있었다.
주방에는 사랑스러운 케샤가 토마스와 함께 파스타를 만들고 있었다. 후미야와 켄따루와 함께 각자 저녁을 준비해 함께 먹기로 했다며, 나의 몫도 만들고 있으니 함께 먹자고 말을 해 줬다. 아... 감동!
고맙다고, 씻고 오겠노라 말을 하고 방으로 올라갔다. 늦게 도착한 우리에게는 6인실 별채가 제공되었다. 야호! 뜨거운 물로 씻고 침대를 정리하고 나니 인나 언니가 방으로 들어왔다. 이번에는 언니가 내 침대의 위를 쓰게 되었다. 언니가 저녁을 같이 먹자고 해서 음식이 넉넉할 것 같으니 우리 친구들과 함께 저녁을 먹자고 얘기했지만, 언니는 그러면 괜찮다고 말을 했다. 같이 어울리면 재밌을 거라고 함께 하자했지만, 언니는 이런 왁작지껄함이 싫어 이 곳에 온 것이라며 한사코 거절했다. 미안한 마음이 든다.
까뜨린은 몸이 좋지 않다며 바로 침대에 누웠고, 그녀에게 나는 한국에서 챙겨 온 감기약을 건넸다. 한숨 푹 자고 얼른 회복하길 바란다고 말을 해 주고 밖으로 나갔다.
케샤는 토마토와 완두콩이 들어간 파스타를 만들었고, 켄따루는 일본식 오므라이스를 만들어 왔다. 푸짐한 음식 앞에서 우리는 모두 행복했다. 쌀을 오랜만에 먹게 된 내게는 켄따루의 오므라이스가 더 맛있었다. 저녁을 먹고 있을 때 히데오상이 와인 한 병을 들고 나타났다. 그리고 조지아, 시몬, 샤샤도 와인을 들고 나타났다.
와인이 너무 많았다. 나를 뺀 나머지 친구들은 모두 신이 나 있었다. 우리의 젊은 친구들이 와인과 함께 시끄럽게 떠들고 놀기 시작했다. 나는 어쩐지 지치고 피로해 마을을 한 바퀴 돌겠노라 말하고 밖으로 나갔다.
산 중턱에 있는 작은 마을이었다. 집이 10가구도 채 되지 않아 보였다. 그중 3개 정도가 알베르게이니, 순례자를 위한 마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 싶다. 마을 끝의 공터로 가서 석양을 바라보았다. 기분이 어쩐지 공허했다. 저 멀리 알베르게에서 울려 퍼지는 웃음소리가 내 마음을 어쩐지 더 공허하게 만드는 것 같았다.
늘 함께이고 그래서 즐거운 것도 많지만, 언제나 이들과만 함께여야 한다는 사실이 조금 부담스럽게 느껴졌던 것 같다. 언제나 만나고 함께 저녁 먹고 함께 술을 먹고.. 외롭진 않았지만 따뜻한 눈빛의 다른 순례자들을 알아갈 수 없었고, 나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한 채 친구들을 따라 휩쓸리고 있었다.
정확히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이건 아닌데 라는 생각이 계속해서 들고 있다.
어느덧 해가 지고 찬 기운이 올라오기 시작한다. 발걸음을 돌려 알베르게로 향했다. 우리의 친구들은 아직도 와인을 마시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중이었다. 테라스 쪽을 피해 건물 안쪽을 통해 방으로 올라갔다. 인나 언니와 이야기라도 조금 나눠야겠다 싶어 올라갔지만, 언니는 벌써 잠든 것 같다.
양치질을 하고, 잘 준비를 마치고 밖으로 나와보니 까만 밤이 내려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 노란 밝은 달이 떠 있었다. 수없이 많은 별들이 반짝이고 있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머릿속을 복잡하게 하던 수많은 생각들이 까만 밤으로 빨려 들어간 듯 사라지는 기분이다.
아! 이 맑고 까만 밤하늘 이라니! 나는 이 맑고 까만 밤이 너무 좋다.
내 마음은 언제쯤 이 밤처럼 맑고 또렷해질 수 있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