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때 말고 지금

타이베이, 대만

by 황사공




꽃보다 할배라는 티브이 프로그램에서 대만을 갔다고 한다.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주변에서 대만 여행을 다녀왔다는 소식이 들려오기 시작한 것이. 세 시간 남짓의 가까운 여정이기도 했고, 깔끔하고 부담 없이 다녀올 수 있다는 말에 아무런 준비도 없이 타이베이에 도착했다.



이런 가까운 여행엔 이젠 큰 준비를 하고 싶지가 않다. 여행 준비를 한다는 것 자체가 부담스러운 바쁜 일상 속에서 여행 준비는 일종의 사치 같다.



아름다웠던 해질녘의 핑크빛 하늘



무작정 도착한 대만은 내가 생각한 그 모습 그대로였다. 깔끔했고 어딘가 익숙했다. 일본과 싱가포르의 중간쯤 되는 듯한 어떤 느낌. 심심찮게 들려오는 한국 말소리도 익숙함에 한몫을 한 것 같다.


익숙한 물건들과 음식들, 아니 익숙하다기 보단 새롭지 않은 것들이라고 말하는 것이 옳은 것 같다. 대만을 처음 방문하는 내겐 결코 익숙할 수 없는 것들이지만, 한국에서 먹던 망고빙수와 우육면, 딤섬, 샤부샤부 까지.. 대부분의 것들에서 어떤 새로움을 찾아볼 순 없었다.


낯선 여행지에서만 느낄 수 있는 어떤 새로움이 없는 기분 자체가 가장 새로운 것 같은 느낌.



맥주는 예외. 맛있었던 타이완 비어.



대만 여행에서 빼먹을 수 없다는 <말할 수 없는 비밀>의 촬영지인 단수이,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의 배경이 된 지우펀, 그리고 색다른 풍광을 제공하는 핑시선 투어까지 다 끝냈지만 뭔가가 개운치 않은 마음이다.


아기자기한 거리도 예뻤고, 한 번씩은 한국에서 먹어본 음식들도 맛있었지만, 뭔가 누가 시킨 일을 억지로 해 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자주 비가 와 축축하던 대만 거리에서 나는 한없이 가라앉고 있었다.



오랜 기간 알고 지내던 동생과 함께 떠난 대만 여행은 다소 무리된 일정으로 떠나서일까? 나에겐 어떤 피로함만 가득한 여행이었던 것 같다. 내 마음이 문제였다.



이번 여행을 통해 내가 얻고자 했던 것이 무엇인가?

나는 무엇을 위해 이 곳엘 온 것일까?



단수이의 거리
단수이의 명물 카스테라집
센과 치히로의 지우펀 마을



함께 있지만 따로인 기분이 든다.

제각각의 빛을 반사해 내며 두둥실 떠다는 비눗방울처럼.


각자 그렇게 날아다니다 서로 닿아 터지기도 하고 더 큰 하나의 비눗방울이 되기도 한다. 바람을 만나 쪼개지기도 하고 다시 만나 붙기도 한다. 그냥 그렇게 연약하기 그지없는 비누방울 처럼 가만히 떠 있는 기분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도 비누방울과 비슷한 것 같다. 하나의 관계가 끊기는 데에는 그리 크고 대단한 이유가 있는 것도, 엄청나게 큰 사건이 있는 것도 아니다. 안 맞는다는 이유로, 혹은 그저 시간이 흐르고 났더니 사라져버린 관계가 얼마나 많았던가.



좋았던 것도 나빴던 것도 시간이 지나면 다 희미해지기 마련이니까 지금은 작게 쪼개져 버린 관계 더라도 다시 하나의 큰 비눗방울이 될 수도 있겠지.


낮과 밤이 너무도 다른 이 도시의 풍경처럼, 우리의 모습도 낮과 밤에 서로 다를 수 있겠지.



타이베이 101 타워의 끝내주는 야경



마음이 맞는 사람과 함께 하는 여행이 중요하다고 모두가 입을 모아 말을 하지만, 사실 누군가와 마음이 맞다는 것은 전적으로 내 마음에 달려있다.


어쩐지 내내 불편한 이 여행은, 처음부터 썩 내켜하지 않았던 나의 마음에서 비롯된 것임을 나는 알고 있다. 지금 느끼고 있는 불편함도 삐딱해져 있는 내 마음이 만들어 내는 것일 뿐, 지금이 아닌 순간이면 전혀 불편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도 알고 있다.



한달이 지나 나를 찾아 온 엽서들


시간이 조금 지나고 나니 그때의 모든 순간들이 다시 소중해진다. 그곳에서 나를 힘들게 했던 습도, 소음, 답답함, 부산스러움이 다시 아무렇지 않았던 것 처럼 기억된다.


여행이란 그런 것 같다. 그곳에선 힘들지만 지나고 나면 모든 것이 더없이 소중하다. 특별할 게 하나 없었던 그 모든 시간들이, 그리고 평범하게 하루하루 지나가는 지금의 나의 시간들도, 삶이라는 여행을 하고 있는 우리에겐 다 비슷한 의미를 가진 것이 아닐까.



그랬기에 익숙하고 평범했던 나의 타이베이가 아주 조금 소중해진 지금이다.



어느 나라를 가든 비슷한 시장의 풍경.






지우펀의 끊이지 않는 우산행렬
단수이 카스테라 거리의 인상적인 벽화 타일
핑시선의 끝 징통의 소원이 걸린 대나무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