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INCOMPLETE

겸손과 오만의 몫

떠난 자와 남겨진 자

by 지니



사람은 홀로 살아갈 수 없어 수없이 많은 관계를 엮고 또 엮어낸다. 인생은 팔 할이 관계 속에서 이루어진다고 봐도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나로서 시작되는 관계들은 가족, 학교, 취미, 직장, 종교 등에서도 그 끈을 이어낸다. 쉽기도 하고 어렵기도 한 그 관계의 끈은 쉬우면 쉬운만큼, 어려우면 어려운 만큼 이어지고 또 끊어진다.




최근 나는 직장을 그만두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연결되었던 많은 관계들이 함께 끊어졌다.


직장에 속해있던 나에게는 '나'로써가 아닌 그 '직장'의 업무 담당자로써의 평가가 우선이었다. 가시적인 결과물이 나를 평가하는 기준이 되었고, 그 결과물을 좋게 만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것이 나의 역할이고 일이었다. 하지만 업무의 특성상 노력이 정확하게 결과로 이어지기는 어려웠었다.


영화를 소비자에게 판매하는 것이 나의 일이었는데, 나에 대한 평가들은 노력이나 과정보다는 흥행 결과에 따라 평가절하 되거나 과대평가되었다. 중간은 잘 없었다. 이 영화라는 것은 흥하거나 망하거나 둘 중 하나이기 쉬웠으니까.



일을 그만두고 일로 연결되었던 관계의 끈이 대부분 끊어졌다. 내가 있던 자리엔 다른 사람이 들어왔고, 나에게서 끊어진 관계들은 그쪽으로 연결되었다.


함께 준비하던 영화들이 개봉을 했고 결과가 나왔으며 역시나 흥행성적에 따라 담당자가 평가되었다. 영화가 흥행한 주에는 능력자가 된 것 같고, 흥행에 실패한 주에는 패배자가 된 것 같은 기분은 이제 내 몫이 아니었다.


한 발짝 물러나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니 마음이 조금 이상하다. 우리가 준비하던 영화들은 개봉과 동시에 소리 없이 사라지기도 했고 예상치 못한 흥행을 이어가 연이어 1위를 하기도 했다. 주위에서는 흥행을 축하하고 있을 것이고, 그 축하는 내가 빠진 곳에 남은 그들의 몫이었다. 그 축하를 누리는 것 또한 축하를 받은 자들의 몫이다. 어떤 방식 이든 간에 말이다.



그들 속에 있을 때 나는 그 모든 것이 내 것이 아니라 생각했었다. 흥행은 관객의 몫이지 담당자의 몫이 아니기에 내 노력과 열정은 흥행 결과로 평가하지 말아야 한다 생각했다. 하지만 이런 생각은 흥행하지 않았을 때의 자기 위안으로만 남았던 것 같다. 영화가 흥행을 하게 되면 사방에서 쏟아지는 칭찬세례에 그 모든 것이 내가 다 만들어 낸 것인 양 착각에 빠지기가 참 쉬웠다. 연달아 흥행을 하면 오만방자해지는 내 마음을 다잡기가 어려울 지경이었다. 내 덕이 아니라고 늘 겸손한 척하려 했지만 마음속으로는 그러하기가 쉽지 않았다. 다 내 공으로 돌리고 싶었고 더 인정받고 싶었다. 그런 마음이 열심히 일을 하게 만드는 원동력이었지 싶다. 무한히 내 시간을 일에 할애하게 만드는 이유. 내 열정의 근원. 그렇게 나는 직장 속에서 무한히 뜨거웠던 것 같다.



그런 일이 반복되어 가고 그 속에서 관계는 발전되어갔다. 비즈니스로 엮여 서로 이해관계로 이어지는 그러한 관계 속에서 나 자신으로 존재하는 것은 어쩌면 불가능한 일인지 모른다. 그렇기에 자리가 바뀌어 버리면 관계 또한 쉽게 끊어지고 마는 것이다.


관계가 끊어진 것에 대한 아쉬움은 그리 크지 않다. 어차피 내 것이 아님을 잘 알고 있던 것들이기에.


하지만 끊어지는 것만큼이나 쉽게 이어지는 그들의 관계가 조금 아쉽다. 아니 그보다 노력도 열정도 없이 그 모든 것을 누리는, 내가 그토록 경계했던 오만함을 만끽하는 지금의 그들을 보는 것이 속이 쓰리다. 그래 이게 진실이다. 구구절절 문장을 어렵게 써 내려 가지만 결국 나는 배가 아픈 것 같다. 내가 인정할 수 없는 사람들이 받는 지나친 평가가 어쩐지 불쾌하다. 내가 받았던 평가들, 흥행에 따라 쉽게 오고 가는 형식적인 일들일 수 있지만, 그 속에서 열정을 불태웠던 나의 모습이 그들과 같은 기회주의자로 남게 될 것만 같아서 어쩐지 불편하다. (물론 나만큼이나 고생하고 노력하는 이들에겐 아낌없이

박수를 보낸다.)


여전히 이런 욕심을 내는 나를 보니 아직 시간이 덜 지났나 보다. 나에게서 관계들은 끊어졌지만 나 자신은 아직 그 모든 내 것이 아니던 것들을 끊어내지 못했나 보다. 욕심 많고 열정 많던 내 모습을 아직도 내려놓지 않았나 보다.






아직도 이어지고 있는 좋은 관계들도 물론 있다. 시작은 이해관계였지만 그 속에서 '나'로써의 관계로 이어진 사람들. 오래된 친구만큼이나 고맙고 편한 사람들이다. 함께 기쁨을 나누고 어려움을 이겨내던 열정 넘치는 시간들을 나누었기에 그 관계들은 쉽게 끊어지진 않을 듯하다. 평가와 무관한, 열정을 나눈 관계들이니 말이다.


지나고 나서 보면 이런 관계들은 오래도록 남는다. 예전의 열정을 함께 떠올리며 현재를 살아내고 또 미래를 기약하는 그런 고마운 관계들 말이다.


내 것이 아닌 것들에 대한 욕심일랑 얼른 털어버리고 내 것으로 남은 소중한 것들을 더 잘 챙기는 앞으로가 되길 바라는 마음이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인류 절반의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