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INCOMPLETE

여자가 뭐가 어때서

미투를 겪는 우리의 숙제

by 지니


글에 앞서 나는 페미니스트가 아님을 밝힌다. 여자로서 대한민국을 살아가고 있지만 나는 나를 표현하는 첫 번째 단어가 "여자"가 되는 것에 혐오를 품고 살아온 사람이다. 여자가 아닌 나로서 존재하고 싶었고 인정받고 싶었다. 메갈이니 일베니 하는 것들 따위도 잘 모르고 관심도 없는 나는 대한민국의 보통 여자 사람일 뿐이다.






미투 운동이 한창이다. 그에 앞서 작년에는 <82년생 김지영>이라는 소설이 주목을 받았다. 책의 발간과 동시에 대한민국에서 여자로 살아간다는 것에 대해 다들 관심을 보이는가 싶더니 어느새 시큰둥해졌다. 늘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남녀 모두가 읽었으면 싶은 책



그 책은 정말 여성들의 공감을 받아낼 수밖에 없다. 어린 시절부터 성인이 되어 직장을 얻고 가정을 꾸리고 엄마가 되는 그 모든 과정에서 여성이라는 이유 만으로 고개 숙여야 했던 일상적인 수많은 일들에 대해 가감 없이 표현해 놓았으니 말이다. 그런 보이지 않는 혹은 대놓고 표출하는 차별 앞에서 자유로운 여성은 한 명도 없었으리라.


나 역시 그랬다. 나도 모르게 여자는 예뻐야 하고 날씬해야 하고 요리를 잘 해야 한다는 등의 여성적 역할론에 세뇌되며 자랐고, 직장에서는 여자는 남자보다 못해 라는 공공연한 차별을 느끼며 회의시간에 차를 내 가고 노래방에서 탬버린을 들고 술잔들을 채웠다.


하지만 나 스스로는 ‘여자기 때문에’라는 정의를 씌워 행동하진 않았다. 손님이 왔으니 차는 당연히 내어다 줄 수 있었고, 노래방에서는 나 역시 즐겁게 노는 중일뿐이었고, 술자리에서는 잔이 비었기 때문에 채워 줄 뿐이었다. 그렇게 나는 스스로를 지켜나갔다. ‘여자’라는 바꿀 수 없는 프레임 속에 갇히지 않기 위해서 말이다.


‘여자’로 살아가는 데에 유리한 점도 분명 많았다. 무거운 짐을 들어야 할 때는 당연히 빠졌고, 중요한 발표는 도맡아 하게 되어 평가를 잘 받곤 했다. 여자의 부드러움이 필요한 자리는 생각보다 많았고 여성임을 무기로 얻어낸 것들도 많이 있었다. 그렇게 남자와 여자가 조화롭게 살아가는 것이 삶이고 일이라 생각했다.



나의 권력이 더 작았기 때문에 당해야 했던 부당한 일들도 물론 많았지만 그런 일들은 내가 그 권력을 얻게 될 때까지는 참아야 한다 생각했다. 상명하복이 당연시되는 사회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 생각했고, 내가 저 자리에 가게 되면 저러지 않으리라 다짐하며 참아냈다. 권력에의 부당함은 여성에게만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남자 직원들도 더 힘이 센 사람 밑에서 늘 부당함을 당하곤 했으니 말이다.

어쩌면 권력을 앞세워 나를 성적으로 유린하려던 나쁜 사람들을 만나지 않은 것이 행운이라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 역시 수없이 많은 술자리와 갑을이 뚜렷한 영업장에서 활동을 했었기 때문에 문제가 없었던 건 아니었다. 술자리에서 생기는 갑작스러운 스킨십도 많았고 불유쾌한 집적거림도 많았다. 하지만 나는 그런 일들은 여성이라서 당해야만 했던 부당한 대우 라기보다는 술자리에서의 해프닝으로만 남겼다. 그러한 일들이 나에게 수치심으로 남지 않은 것은 그 자리에서 즉각적으로 대응을 했었기 때문인 것 같다.


술을 먹다가 갑자기 내 손을 잡으면 반대 손으로 상대방의 손을 감싸 툭툭 치면서 “많이 취하셨네요~ 이제 그만 들어갈까요?”라고 했고, “너 괜찮네 나랑 연애하자”라는 식의 헛소리엔 “일단 줄 서세요. 321번째 대기자예요~”라는 식으로 위트 있게 넘겼다. 그리고 다음날 반드시 그 당사자에게 어제의 실수를 상기시켜 사과를 받아 냈다. 실수는 실수 일 뿐이므로 인정하고 사과하게 만드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서로가 그 일을 명확하게 기억하는 시간 안에서는 말이다.



모든 사건에는 항상 쌍방의 이유가 있다. 물리적인 사건이 아닌 모든 결정에서 자신의 이유를 선택하는 것은 온전히 개인의 몫이다. “여자이기 때문에.” “나보다 높은 사람이기 때문에.” "거절할 수 없어서." 역시 어느 한쪽의 변명이 될 순 있지만 그런 변명을 선택한 것은 본인임을 분명히 알고 타인에게 책임을 전가해서는 안된다. 타인의 도덕성을 무기로 나의 결백을 증명해서는 더더욱 안된다고 생각한다. 내가 한 선택이 그것이라면 받아들이고 책임감 있게 대응해야 한다. 비록 내가 피해를 보게 되더라도 말이다.


우리 사회에 이토록 여성비하가 만연해 있는 것은 하루아침에 고쳐질 만한 성질의 것이 결코 아니다. 조선시대부터 아주 뿌리 깊게 박혀 내린 남아선호가 만들어낸 여성비하가 사라지기 위해서는 수십 년의 시간이 소요된대도 부족할 것만 같은 느낌이다. 처음 미투 운동이 한국에서 시작되었을 때, 이번 미투 운동이 그래도 여성의 인권신장에 도움을 주리라는 기대를 했었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점점 여성의 인권은 퇴보하는 기분이 든다.


미투 운동은 여성이 받은 그 수많은 차별들 중 성적인 것으로 피해를 입은 것에만 국한된다. 요즘의 미투 운동이 걱정스러운 이유다. 여성의 인권신장이 아닌 여성의 여성성화를 더 부추기는 느낌이 드는 건 나뿐일까?


십여 년을 직장생활을 하며 여성으로서 받는 억압과 차별에 굴복하지 않으려 넘치게 노력했던 나의 지난 시절을 생각해 보면 너무나도 좌절스러운 요즘이다. 분명 연극계든 학계든 모든 곳에서 여성에게 쳐져 있는 유리 장벽을 깨부수기 위해 노력해온 수많은 여성들이 존재할 것이다. 그 모든 여성들의 노력이 이런류의 자극적인 스캔들로 싸 잡혀서 ‘여자는 안돼’라는 식으로 치부되어 버리는 것만 같아 상실감이 느껴지는 건 비단 나뿐만이 아닐 것이다.


미투를 외치는 용감한 이 시대의 여성들에 대해서는 높게 평가한다. 스스로를 피해자로 굴복시키지 않고 변화에 앞장서려는 진보적인 태도에 박수를 보낸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안타깝게도 이런 진보를 받아들일만한 수준이 아닌 듯하다. 남성들을 객관적으로 납득시키지 못하는 성적 수치심의 기준이 오히려 여성을 나약해빠진 우스갯거리로 만들어가는 일부 사례들을 보면 너무 화가 난다. 나조차 이런데 자신의 고발에도 불구하고 모욕감만 돌아오는 고발 당사자들은 얼마나 분통이 터질는지. 이번 미투 열풍이 지나고 나면 정신적 외상을 입은 환자가 갑절은 늘어있지 않을까.


여성이 강해져야 한다. 내가 강해져야 하고 내 동료가 강해져야 한다. 권력에 굴복하지 않고 내 의사를 명확하게 그 자리에서 전할 수 있어야 한다. 뒤에 숨어서 뒤늦게 슬그머니 꺼내는 이야기로는 ‘그때 말하지 그랬어?’를 이겨낼 수가 없다는 것을 이번에 느끼고 깨달아야만 한다. 물론 그 순간의 선택이 내 인생을 완전히 다르게 만들어 버릴 수 있다는 위험은 감수해야 하겠지만 말이다.


일방적인 강압이었다 말하고 합의된 애정표현이었다 말하는 상반된 쌍방의 입장이 앞으로 더는 나오지 않게 만들어 가는 것이 우리 세대의 숙제이다. 우리가 바뀌어야 하고 바꾸어야 하고 우리 자녀들을 가르쳐야 한다. 여자는 핑크색 남자는 하늘색이라는 고정관념을 우리가 함께 깨 부수어야 한다. 자신을 여자라는 프레임에 가두지 말고 한 사람으로써 존재하게끔 삶을 꾸려 나가야 한다. 여자이기때문에 피해받는 일이 없도록, 당당하고 확고한 한 사람으로 존재해야한다. 나부터, 그리고 그렇게 조금씩 세상을 바꾸어 나가야 한다.


또 한 번 시대가 바뀌려는 움직임인 것 같다. 신라에서 조선으로 넘어오는 수백 년에 걸쳐 여성의 인권이 아래로 아래로 내려 깔린 것처럼, 또다시 몇백 년의 시간이 걸려 여성의 인권이 위로 올라올 수 있다 믿는다. 아니 여성의 인권이라는 게 따로 존재하지도 않는 평등한 시대로 세상이 변하리라 믿는다. 이런 시대의 변화를 목격하고 그 물결에 동참할 수 있음이 참 행운이다 싶은 오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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