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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볕이드는창가 Apr 17. 2021

추억(?)이 서린 허페이

허페이(合肥) 지역연구 1일차

지역연구 첫날에 단수라니!


두 번째 지역연구는 시작부터 난관이다. 느지막이 일어나 짐을 싸고 기차역으로 가면 됐을 첫날 아침이 아파트 단수로 인해 강제로 일찍 시작되었다. 단수가 되기 전에 얼른 씻고 짐을 싼 후 오전 시간을 어떻게 보낼지 찾아본다. 역시 이럴 땐 극장이다 싶어 상영작을 둘러보는데, 영 취향에 맞는 중국 영화가 없다. 그나마 평이 좋은 외화가 있어 일단 표를 산다. 극장은 상해 신세계(新世界)에 있는 극장. 영화는 <하이위가(何以为家, 가버나움)>.


앞으로 영화를 보려면 영화도, 상영관도 꼭 사전에 좀 알아보고 예매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일단 극장이 리모델링을 앞두고 거의 폐허 상태인 것을 모르고 예매했다가, 입구를 찾지 못해 한참을 헤맸다. 어렵사리 착석한 상영관 안에서 알게 된 건 이 영화가 미국도, 영국도, 그 어떤 영어권 국가도 아닌 레바논의 영화라는 것. 2시간가량의 러닝 타임 동안 나는 생각지 못하게 세 가지 외국어의 늪에 빠졌다. 음성은 레바논의 언어, 자막은 중국어와 영어, 그리고 나는 한국어로 사유하는 한국사람. 나중에 중국에서 영화를 볼 거면 꼭 중국 영화를 봐야겠다고 다짐한다.



추억(?)이 서린 장소, 허페이(合肥)


두 번째 지역연구의 목적지는 안휘성(安徽省)의 성도, 허페이(合肥, 합비)로 정했다. 동비하(东淝河)와 남비하(南淝河)가 모두 이곳에서 발원한다고 하여 지어진 이름인 허페이(合肥)는, 포청천 포증(包拯)의 고향이면서 청의 관료 리홍장(李鸿章)의 고향이다. 수나라부터 청나라 때까지 루저우푸(庐州府)로 관리되어 루저우(庐州)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다.


허페이라는 도시는 중국의 수많은 도시 중에서 유명한 축에는 속하지 못한다. 혹시 중국에 대한 배경지식이 별로 없는데 이 도시의 이름을 들어본 분이 계시다면 추측컨대 높은 확률로 위나라와 오나라의 800 vs 10만 대군 전투가 벌어졌던 합비 전투로 알고 계신 분들일 것이다. 삼국지 게임을 좀 해본 사람이라면 당시 활약했던 위나라의 장수 장료도 알고 있을 테고.


아쉽게도 이 삼국지 관련 스토리 외에 허페이는 대외적으로 알려진 것이 별로 없다. 안휘성의 성도라고는 하나, 안휘성 자체가 부유한 성 축에 속하지 못하고(몇 년 전만 해도 이 성에 있는 푸양阜阳이라는 도시가 중국에서 가장 가난한 도시로 집계되었다), 그래서 허페이는 중국 동부에 속하는 도시들 중 발전이 더디고 가난한 것으로 알려진, 어찌 보면 약간의 불명예를 가지고 있는 곳이다. 그나마 요 몇 년 새 허페이 시정부 및 안휘성 정부의 부양책 등에 힘입어 전자업계 일부 업체가 이 도시에 들어오면서 상황이 좀 나아지긴 했지만 여전히 주변 도시들에 비해 이곳은 발전이 다소 더디다.


하지만 상해에서 주말을 끼고 지역연구를 가려면 허페이 정도면 아주 적절하다. 고속철로 편도 2시간 반에서 3시간 정도의 거리이고 한 성의 성도이니, 충분히 가볼만한 가치가 있는 곳이다. 하지만 허페이를 두 번째 지역연구 장소로 잡게 된 이유는 사실 따로 있는데, 그건 바로 이곳이 내 첫 출장지였기 때문이다. 국내 영업에서 중화 영업으로 부서를 옮겨온 뒤 처음으로 맡은 거래선이 허페이에 위치해 있었고, 자연스럽게 나의 첫 출장도 이곳으로 오게 되었다.


지금은 좀 많아졌는지 모르겠는데 2015년에서 2018년까지만 해도 한국에서 허페이로 가는 직항이 거의 하루에 한 번 정도였고 그 시간대도 너무 늦거나 너무 빠르거나 하여 직항으로 출장을 가본 적이 거의 없었다. 주로 상하이에서 먼저 다른 일정을 소화한 후 3시간 동안 고속철을 타고 이동하거나, 타이베이에서 직항으로 허페이로 이동하거나 하는 식으로 일정을 잡았다. 그래서 허페이라고 하면 고속철에서 먹었던 KFC 햄버거와 그 비좁았던 3인 좌석 등이 생각이 난다. 또 한편으론 가끔 타이베이에서 직항으로 허페이로 넘어갔을 때 허페이 공항에서 호텔 가는 길의 그 허허벌판, 밤이면 택시기사가 혹시 딴 길로 새진 않을까 두려워 벌벌 떨며 연신 바이두 지도를 들여다보던 내 모습이 생각난다. 그런 도시였다, 허페이는.


덕분에 사실 허페이라는 도시를 떠올리면 내 머릿속에 남아있는 좋은 기억이 별로 없었다. 출장으로 고객 미팅을 하고 저녁을 먹고 호텔로 돌아가 보고를 쓰고 나면 새벽이 되고, 다시 몇 시간 눈 붙이고 일어나 다음 일정을 소화하러 나가야 했던 터라 허페이라는 도시가 도대체 어떻게 생긴 도시인지도 잘 몰랐다. 바로 이 이유 때문에, 나는 두 번째 지역연구는 꼭 허페이로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여유가 없어 제대로 본 적도 없는 이 도시에서 출장의 냄새 말고 다른 기억을 남기고 싶었기 때문이다.



Welcome to Hefei!


세기말 극장에서 영화를 다 보고 한 달 만에 고속철 상해 역으로 향했다. 그래도 지난 난징 지역연구 때 나름 연습이 좀 됐다고 이번엔 기차역에서 지난번만큼 헤매진 않았다. 당황하지 않고 매표구를 잘 찾았고, 녹색통로를 통해 기차역 입장도 무사히 완료. 카메라까지 목에 매달고 있는지라 짐 검사는 늘 번거롭지만, 어쩌겠는가! 이것이 중국인 것을.


여섯 시쯤 합비남역에 도착할 예정인 데다 도착 후에도 호텔 체크인 등 할 일이 많으니 뭐라도 좀 먹어둬야겠다 싶어 산 것이 중국식 패스트푸드 브랜드 중 하나인 DICOS(德克士)의 치킨 랩. KFC의 트위스터를 기대하며 산 것이지만 맛이 전혀 다르다. 너무나도 중국인 입맛에 맞춰 현지화된 그런 맛. 다음부턴 굳이 사 먹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반절 정도를 남겼다. 역시 중국에서 패스트푸드를 먹으려면 어느 정도 검증된 브랜드를 먹어야 한다. 안 그러면 익숙지 않은 중국 맛을 느끼게 될 수 있다.



바람을 잘 타는(?) 기차인지 두 시간을 조금 넘자 합비남역(合肥南站)에 도착했다. 금요일 저녁시간이라 그런지 외지에 출장을 나갔다가 허페이로 돌아오는 듯한 행렬이 엄청나다. 택시를 타러 승강장에 도착하니 우리 앞에는 이미 중국 전역에서 허페이를 찾는 수많은 사람이 줄을 서 있다. 허페이가 이렇게 사람이 많은 도시였던가? 새삼 안휘성의 성도라는 사실을 실감한다.




처우꾸이위(臭鳜鱼)는 처우(臭)하다


호텔 체크인 후 저녁을 먹기로 한 식당으로 향했다. 아무래도 안휘성 성도에 왔으니 안휘성 요리인 후이차이(徽菜)를 먹어야겠다는 마음에 찾아본 식당이 통칭로우(同庆楼). 후이차이를 전문으로 하는 식당이고 야경을 보기 좋은 톈어후(天鹅湖)와도 가까워 첫날 저녁을 먹을 식당으로 적당하다는 판단이 들었다. 통칭로우는 허페이에만 몇 군데 지점이 있는 나름대로 유명한 식당 체인이다. 식당이 넓고 분위기도 고급스러운 편인 데다 깔끔해서 후이차이를 드셔 보시고 싶은 분께 추천한다.



사실 난징 때 그랬던 것처럼 허페이도 지역연구를 가기로 결정한 뒤 허페이가 고향인 친구에게 이래저래 자문을 많이 구했었다. 특히 아무래도 지방 요리 중 어떤 것이 유명한지 잘 모르니 이 부분을 많이 물어봤는데, 친구가 가장 먼저 추천해준 것이 바로 처우꾸이위(臭鳜鱼)였다. 이것만 먹고 와도 후이차이는 다 먹은 거나 마찬가지라고 말하기에 도대체 어떤 요리인지 궁금했는데, 찾아보니 중국이니 뽑은 냄새가 고약한 음식 랭킹 안에 들어갈 정도로 냄새가 나는 요리였다.


초두부 때문에 한국에 많이 알려진 처우(臭)라는 글자는 중국어로 '냄새가 나다'라는 뜻이다. 뒤에 붙어있는 꾸이위(鳜鱼)는 쏘가리다. 즉 냄새나는 쏘가리 요리라는 뜻인데, 예전에 쏘가리를 잡아 팔던 상인들이 이동하는 동안 식재료가 상하지 않게 소금물을 뿌려 삭힌 것을 조리해 먹었던 것에서 유래했다. 중국인이라고 초두부를 다 좋아하는 건 아닌 것처럼 이 요리도 호불호가 갈리는데, 그래도 후이차이의 대명사라고 하니 먹어는 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에 곁들일만한 비교적 안전한(?) 메뉴들로 난징에서 괜찮았던 꾸이화탕어우(桂花糖藕, 계화꽃 설탕 연근조림), 특제 홍샤오로우(红烧肉) 등 몇 개를 골랐다.


오기 전에 워낙 냄새난단 얘기를 많이 들어서 그런지 막상 음식이 나왔을 땐 심하게 냄새가 많이 난다는 생각은 별로 들지 않았다. 다만 시간이 지날수록 한국의 청국장처럼 옷이나 공기 중에 그 냄새가 돌아다닌다는 느낌을 좀 받았는데, 맛은 그럭저럭 괜찮았다. 청국장에 조린 생선, 혹은 청국장에 졸인 홍어 같은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하지만 모두의 결론은, 한 번 경험해봤으면 됐다, 다음엔 다시 시키진 않는다는 것. 홍샤오로우가 맛있었다. 냠냠.


가운데가 주인공 처우꾸이위



소박한 버스킹 in 백조의 호수(天鹅湖)


밥을 다 먹고 소화도 시킬 겸 완다광장(万达广场)을 걸어 톈어후(天鹅湖)로 향했다. 금요일 저녁의 허페이, 완다광장 앞에는 축구와 농구를 즐기는 젊은이들이 가득하다. 땅이 넓어 그런 건지, 중국은 전반적으로 이런 체육 근린시설이 잘 되어 있는 편이다. 축구장 밖에 앉아있는 분들은 안에서 플레이하는 선수들의 일행인지 문득 궁금하다.



완다광장을 지나 조금 더 걸으면 색색깔로 빛나는 건물 하나가 나오는데, 뭔가 하고 가까이 가서 보니 허페이 대극장(合肥大剧院)이다. 2009년에 지어져 2010년에 대외개방되었다는 이곳은 얼핏 보면 시드니 오페라하우스를 오마주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비슷한 디자인을 갖고 있다. 마침 무언가 공연이 끝날 즈음이었는지 공연을 관람하고 나오는 관객들이 보인다.



조금 더 걸으니 드디어 목적지인 톈어후(天鹅湖)가 나온다. 신중국 성립 이전 이곳은 큰 시장이 위치한 번화가였는데, 신중국 성립 후 물고기 양식장으로 바뀌었다가 21세기 들어서야 정부에 의해 공원으로 개발되면서 호수로 재정비되었다. 호수의 이름이 톈어후, 즉 백조의 호수로 정해진 이유는 이 호수의 모양이 전체적으로 보면 백조의 모양을 하고 있어서라는데, 지도로 보면 그것이 더 명확하게 보인다.


호숫가에 도착하니 한 청년이 버스킹을 하고 있다. 노래는 처음 들어보는 노래였는데, 나중에 찾아보니 장징쉬안(张敬轩)의 <지시태애니(只是太爱你)>. 아마 신곡은 아니었는데, 그해 3월 중국에서 개봉한 <모어 댄 블루>에 이 곡이 등장하면서 갑자기 다시 유행하게 되었다고 한다. 백조의 호수를 배경으로 버스킹을 하는 청년을 만나니, 허페이라는 중국의 한 도시에서 '백조'로 거듭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는 그 모습이 안쓰럽기도 하고 응원해주고 싶은 마음이 든다.


전체적으로 백조의 형상이라는 톈어후


어느 도시에나 물가에는 다 해놓는다는 'I ♥ ㅇㅇ' 연출을 이곳에서도 만나게 될 줄은. 하지만 그게 뭐라고 또 전광판 바뀌기를 열심히 기다렸다가 타이밍을 놓칠세라 열심히 셔터를 누른다. 금요일 저녁을 맞아 많은 허페이 시민들이 호숫가의 시원한 바람을 쐬며 들려오는 노래를 감상하고 있다. 지금 이 순간은 어쩐지 나도 허페이의 시민이 된 것 같은 느낌이다. 목에 걸려있는 이 카메라만 어떻게 숨길 수 있다면.




나도 백조가 될 수 있을까?

톈어후 공원에서 합비 시정부를 지나 조금 더 걸으면 숙소인 포포인츠 호텔이 나온다. 사실 이곳은 내 합비 첫 출장 때 묵었던 곳이다. 호텔 로비에서 미팅 준비를 했던 기억이나 밤늦게 피곤한 몸을 이끌고 체크인해서 보고서를 쓰던 기억, 하여튼 온갖 비루한 출장의 기억은 이 호텔 안에 다 숨겨져 있다. 호텔을 바라보고 서 있자니 문득 방금 톈어후에서 본 버스킹 청년이 떠오른다.


지금의 나는, 2015년 그때의 나보다 조금은 성장했을까?

지금 모습이 백조는 아니지만, 언젠가는 백조처럼 우아하게 수면을 떠다닐 수 있을까?


합비의 첫날은 이렇게 지나간다.





[허페이 1일차 일정]


 [중문 일기 in 위챗 모멘트(朋友圈)]

(譯) 두 번째 지역연구 목적지는 허페이로 정했다! 6시쯤 합비남역에 도착해서 완다 통칭러우(同庆楼)에서 안휘성 음식 먹고, 톈어후공원에서 야경을 보며 음악을 들었다. 이번에 묵는 숙소는 내가 처음으로 중국에 출장을 갔을 때 묵었던 호텔이다. 시간 참 빠르다. 그때의 왕초보 병아리가 지금은 지역전문가의 신분으로 다시 오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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