톈진(天津) 지역연구 2일차 (4)
이곳저곳을 여행하다 보면 으레 새로운 지역에서 보는 풍경을 알고 있던 풍경에 빗대어 생각하려고 한다. 그다지 좋지 못한 행동이다. 자칫 새롭게 만나는 곳을 틀에 박힌 눈으로 보게 될 수 있고, 비교를 가장한 우월 가리기가 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중국이 어떤 나라인가? 한 마디, 한 단어로 정의하기는 워낙 어려운 나라가 아닌가? 이런 연유로 나는 지역연구를 다닐 때마다 편견이나 고정관념을 갖지 말고 새로운 눈으로 보자고 다짐해왔고, 그곳만이 갖는 특징과 독특한 매력을 찾는 데 초점을 맞추려고 노력했다.
다리 건너 도착한 이탈리아 풍경구는 사실 여차하면 방금 언급한 오류에 빠지기 가장 쉬운 장소다. 이국적인 건물들, 거리의 맥주 가게, 파스타와 스테이크, 클럽과 거리에서 울려 퍼지는 라이브 노랫소리. 서울로 치면 이태원, 베이징으로 치면 싼리툰(三里屯), 상하이로 치면 신톈디(新天地), 결국 이곳들을 연상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분명 그곳들과 비슷한 풍경이긴 하다. 하지만 사실 이곳은 중국 역사에서 꽤나 특별한 곳이다. 왜냐하면 이탈리아가 중국에 만든 유일한 조계지가 바로 이곳이었기 때문이다.
이탈리아 풍경구에 도착한 것은 아직 해가 지지 않은 초저녁이었다. 거리를 간단히 구경하고 저녁을 먹을까 하는 생각에 오게 되었는데, 그 풍경이 참으로 낯익었다. 상하이의 신톈디와 비슷하면서 북방의 투박함도 동시에 안고 있는 그런 곳. 이탈리아 풍경구에 대한 나의 첫인상은 이랬다. 북방의 도시와는 어울리지 않는 이국적인 건물들도 많고 초저녁이지만 이미 길맥을 즐기고 있는 사람들도 많이 있었지만, 그 건물을 꾸미고 있는 글씨나 작은 디테일들이 지극히 북방의 그것이었다. 그래서 사실 이곳의 역사를 찾아보기 전까지 나는 이곳이 그저 이탈리아 느낌을 살려 현대에 조성한 테마거리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알고 보니 이곳의 역사는 꽤나 깊었다. 1902년 이탈리아가 톈진에 조계지를 만들면서 시작된 이곳의 역사는 신중국 성립 후 잠시 동안의 암흑기를 지나 2000년대가 되어서야 그 문화적인 가치를 인정받고 보수 과정을 거쳐 2009년에 대중에 개방되었다고 한다. 상하이의 프랑스 조계지가 그렇듯이 조계지가 주는 어떤 특수성으로 인해 근대 톈진에도 당시의 인싸들이 이곳에 거주하였는데, 그중 유명한 사람이 량치차오(梁启超)와 작가 차오위(曹禺)다. 특수한 역사를 간직한 곳이라 그런지 이곳에는 톈진의 도시계획 박물관 같은 도시의 역사를 보여주는 박물관도 있다. 이런 점이 신톈디와는 다른 점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런 역사가 오래된 곳에 오면 으레 스타벅스가 어디 자리 잡았는지 보곤 하는데, 이탈리아 풍경구의 스타벅스는 리저브 매장이었다. 위층엔 클럽이 있다는 이 건물은 이전에는 개인 주택이었던 서양식 건물인데 스타벅스가 1층에 매장을 내고 영업 중이었다. 역시 입점 위치를 참 잘 잡는다.
우따다오(五大道)에서도 지나쳤던 거우부리빠오즈(狗不理包子)다. 영어 이름을 Go Believe라고 지었는데 그 이름을 건물에 저렇게 써놓은 것이 참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분명 더 세련되게 만들 수 있었을 텐데.. 북방 도시의 투박함은 이것을 두고 한 말이다. 매장 앞에 간단히 테이크 아웃하여 먹을 수 있는 간식거리를 팔고 있는 듯했다.
여신상 같은 것이 꼭대기를 수놓은 이 분수가 있는 곳이 바로 본래 이탈리아 조계지의 중심지였다는 마르코폴로 광장이다. 본래 건물이 있었다고 하는데 1950년대에 파괴되었고 지금은 이렇게 분수만 남아있다. 아시아에 유일하게 이탈리아 스타일로 지어진 건축물(믿거나 말거나)이라고 하는데, 지금은 확인할 수 없으니 아쉬운 대로 분수만 본다.
광장 근처에 '톈진기억(天津记忆)'이라는 이름으로 전시를 하고 있는 전시관이 있었다. 특별히 입장료가 필요하지 않은 전시라 가벼운 마음으로 들어갔다. 전시회를 하고 있는 이 건물 역시 조계지의 역사를 담은 건물이라는 것 같다. 톈진의 역사를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조계지의 역사 역시 설명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것보다는 좀 더 '중국의 도시로서의 톈진'을 보여주는 전시물이 많은 것 같은 느낌이다. 톈진의 오래된 가게들(天津老字号)라든가, 전통 간식거리라든가, 역사는 깊지 않지만 독특한 양식을 보여준다고 소개하는 전지(剪纸) 공예라든가. 이곳이 비록 이렇게 이국적인 모습을 뽐내고 있지만 사실 그 혼은 중국적인 무언가에 속해있다는 것을 끊임없이 강조하는 기분이다. 중국이라는 나라를 이해하기 위한 키워드 중 하나다.
<시네마 천국>의 팬이 만든 것은 아닌지 의심되는 '신' 천당 영화관(新天堂电影院, 영화 <시네마 천국>의 중국어 제목이 천당 영화관이다)과 사자가 장식된 분수를 지나는데 음악 소리가 들려온다. 주변을 둘러보니 야외 좌석이 있는 맥주집이었는데, 라이브 무대를 하고 있는 가수가 있었다. 목도 마르고 더운데 마침 잘 되었다 싶어 들어가 주변에 지나가는 사람들이 잘 보이는 야외 자리에 앉았다. 칼스버그 한 병을 시켜 맛보는 맥주의 맛이란! 라이브 노래로는 린이롄(林忆莲)의 "지소환유니(至少还有你)"가 흘러나오고, 더위도 식힐 겸 잠시 여유를 즐겨본다.
노래를 들으며 쉬고 있으려니 어느새 저녁을 먹을 시간이 되었다. 같은 집에서 요리를 시켜 먹을까 하며 메뉴를 보는데 값도 비싸고 평도 별로 좋지 않아 다른 집을 찾아가 보기로 했다. 이럴 때 도움이 되는 건 역시 따중뎬핑(大众点评). 근처에 베네치아라는 이름의 이탈리안 음식점이 있어 가보기로 했다. 값이야 아무래도 좀 비싼 편이었고 이탈리안 요리의 맛도 어째 평균에 미치지 못하는 느낌이었지만, 그래도 야외 자리에서 이탈리아 풍경구의 이국적 분위기를 즐기며 먹는 저녁은 그 나름대로 즐거웠다. 특히 여기서 베이징에서 브루잉했다는 京A 맥주를 먹게 되었는데, 방금 전에 마신 칼스버그가 잊힐 만큼 시원하고 좋았다. 북경에 가면 꼭 현지의 맥주를 마셔봐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저녁을 먹자 금세 해는 지고, 해가 진 이탈리아 풍경구는 낮의 그것과는 또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낮에는 다소 한산하던 거우부리 매장도 야식으로 간단한 간식을 사려는 사람들로 가득하고 야외 좌석이 마련된 음식점과 술집들은 모두 만석이다. 역시 토요일 밤이다. 하지만 누군가 내게 이탈리아 풍경구의 낮이 좋은지 밤이 좋은지 묻는다면 나는 짙은 어둠이 깔린 밤보다는 늦은 낮에서 초저녁 정도까지의 시간을 추천한다. 선선한 바람이 불고 누군가의 노랫소리가 들리고 맛있는 음식과 시원한 맥주가 함께하는 시간. 멀리 노을이 보인다면 더 좋겠다.
어두운 밤이 찾아왔고 우리는 이탈리아 풍경구를 나서 다시 하이허 강변으로 향했다. '톈진의 눈(天津之眼)'이라는 관람차의 야경이 예쁘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다시 풍경구의 입구를 나와 앞서 지나온 다리 근처로 가는데 다리를 장식하고 있던 기둥과 동상들에 모두 밝은 빛이 들어와 있는 모습이 보인다. 다리 주변에 광장이 있어서 그런지 많은 사람들이 강바람을 쐬며 저녁의 여유를 즐기고 있었다.
이국적인 풍경과 선선한 날씨, 바람이 일으키는 강 물결까지 이 완벽한 풍경 앞에서 다소 신기한 구경을 할 수 있었다. 그건 바로 웨딩 스냅 촬영. 예쁜 드레스와 예복을 입고 강 앞에 서서 다리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저렇게 찍으면 역광이 될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그나마 앞에 조명을 두고 찍은 사람들은 좀 낫겠네. 예쁜 사진을 건졌을까? 뒷 이야기가 궁금해지는 순간이다.
강변을 따라 걷다 보니 이번엔 또 하나의 중국스러운 풍경. 건물 앞에서 야간 광장무(广场舞)를 추는 흥겨운 무리를 만났다. 노래에 맞춰서 다 같이 광장무를 추고 있는데, 생각보다 그 연령대도 성별도 다양하다. 마주칠 때마다 느끼지만 참 건강한 사람들이다.
광장무의 흥겨운 리듬을 뒤로하고 또 강을 따라 걷는다. 무슨 건물인지 모를 화려한 중국풍의 건물과 마천루를 지나간다. 와이탄과 비슷한 듯 다른 느낌의 강변. 여기서도 뭔가 남방과 북방의 차이가 느껴진다. 북방의 쭉쭉 뻗은 직선미가 상하이에서 온 나에게는 적응이 잘 안 된다. 그러던 중 무언가 둥그렇게 생긴 원 모양의 것이 시야에 들어온다. 혹시 저것이 우리가 찾던 그 톈진의 눈?
2008년에 만들어진 영락교(永乐桥) 위에 2009년에 만들어진 톈진의 눈(天津之眼). 이름을 영어로 하면 Tianjin Eye, 런던의 London Eye와 연관이 있는지는 모르겠다. 이 톈진의 눈은 관람차다. 강물 위에 만들어져 있어서 타보면 다리 위에 떠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고 한다. 올 때부터 이걸 타보겠다는 생각보다는 그냥 야경이 예쁘다고 해서 와본 거라서 실물을 보고 나니 성취감과 함께 묘한 허무함이 밀려왔다. 사람이 너무 많아서 기다려도 타기가 어렵다고 하니, 이쯤에서 길었던 톈진 이틀차를 마무리할 시간이다.
하이허의 밤을 떠올리면 화려한 불빛이나 건물들, 톈진의 눈의 반짝임도 물론 생각나지만 그것보다 눈앞에 떠오르는 풍경이 있다. 그건 바로 아래 사진에서 얼핏 보이는 저 반짝이는 무언가. 하늘을 반짝이며 날고 있는 저 점점이 보이는 무언가. 저 쪼끄만 게 나는 그렇게 생각이 난다. 사실 별 건 아니다. 강변의 잡상인이 팔고 있는 장난감이다. 하늘로 날리면 반짝반짝 빛이 나면서 일정 정도 날다가 아래로 떨어지는 장난감인데, 하늘을 날고 있던 그들 중에 한 80%는 잡상인 스스로가 판촉을 위해 날리고 있는 것이고 20% 정도가 진짜 구매한 소비자가 날리는 것이었다. 톈진의 눈의 화려함도 물론 멋졌지만 이상하게 여행 중 나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은 이런 소박한, 다소 투박하고 조그만 무언가다. 이런 작은 것이 모여 그 도시에 대한 추억을 만든다.
[톈진 2일차 일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