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칭(重庆) 지역연구 3일차 (2)
대족석각(大足石刻)과 성수사(圣寿寺) 관람을 마치고 다시 한 시간 반 정도의 시간을 달려 점심을 먹으러 왔다. 점심 장소는 오후에 갈 츠치커우(磁器口)와 가까운 곳에 위치한 한 쇼핑몰 샤츠썅(沙磁巷). 지도로 봤을 때 꽤나 넓은 부지로 조성된 쇼핑몰이라 메뉴 선택이 용이할 것 같았고, 무엇보다 오후에 갈 곳과 가까우니 동선이 맞아서 선정됐다.
일단 쇼핑몰에 도착해 뭘 먹을지 골라보려고 했는데, 마침 따중뎬핑에서 좋은 식당을 하나 추천해준다. 충칭식 닭요리라고 하는데, 사진으로 봐서는 한국의 닭볶음탕과 비슷하게 생겼다. 이름은 리즈빠량샨지(李子坝梁山鸡). 충칭 여기저기에 체인이 많은 맛집이었는데, 글을 쓰는 지금 다시 찾아보니 우리가 먹었던 식당은 없어졌지만 체인점은 아직 여기저기 많다.
식당 내부는 약간 대약진 운동할 때쯤의 복고풍 인테리어로 여기저기 구호 같은 것들이 붙어 있었는데, 특히 충칭 사투리로 적힌 포스터가 눈에 띄었다. 식당의 대표 요리인 량샨지(梁山鸡)를 시켰는데, 닭이 한 마리 통째로, 그러니까 닭발까지 다 들어있다는 것과 감자가 아닌 토란이 들어가 있다는 점, 한약재가 생각보다 많이 들어가 있다는 점은 닭볶음탕과 달랐지만 그래도 매콤한 맛 베이스라서 한국 요리를 먹는 것 같은 느낌도 들었다. 훠궈도 좋아하고 닭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얼마든지 즐길 수 있는 맛이다.
밥을 다 먹고 쇼핑몰 바깥으로 나오는데, 장강 줄기인 쟈링강(嘉陵江) 물결이 눈앞에 흘러간다. 쇼핑몰 자체가 강변에 위치해 있어서 이렇게 강 풍경이 그대로 보이는 것이다. 큰길로 나오니 아래 오른쪽 사진처럼 웬 일제시대 다다미방 같은 느낌의 건물들이 보인다. 방금 전까지 현대적인 쇼핑몰의 모습만 보다가 갑자기 이런 구시가지의 모습이 눈에 들어오니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온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리고, 저 다다미방 같이 보이는 곳이 바로 우리가 곧 가게 될 츠치커우(磁器口) 고진이다.
사실 이미 예상했어야 했다. 중국의 단일 도시 중 인구가 가장 많은 곳이 충칭이라는 점을 알게 된 시점에서, 그리고 쳰쓰먼대교에서 그 수많은 인파를 본 시점에서, 이미 예상하고도 남았어야 했다. 하지만 인생이 항상 예상한 대로만 흘러간다는 법은 없지 않나? 인간은 항상 실낱같은 희망을 갖고 사는 법이다. 그래서 나는 희망했다, 나에게 허락되지 않은 것을. 그건 바로 츠치커우에 사람이 적기를 바란 것이다.
사람... 사람... 사람...
여기도 사람, 저기도 사람..
이 사진은 그나마 좀 한적해 보이는군, 하지만 이미 인파에 질린 나의 멘탈은 바사삭이다. 어떻게든 사람이 나오지 않게 찍어보려 했지만 실패한 사진들만 카메라에 남아 있다. 나중엔 그냥 포기하고 사람이 나오든 말든 사진을 찍었다. 지금 보니 어떤 사진에는 웃는 얼굴의 여성이 찍혔는데, 자세히 보니 어마어마한 인파에 헛웃음을 웃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사람이 혹시 좀 적을까 기대하고 와서는 안 되는 곳이었다, 츠치커우는.
그러고 보니, 츠치커우가 어떤 곳인지 설명하는 것을 잊었다. 사람이 너무 많고 정신이 없어서 사실 돌아다니면서도 제대로 보지 못했고, 이렇게 여행 후에 정리하면서나 겨우 되돌아볼 수 있을 정도. 연휴에 와서 그런 걸 거라고 위로해본다.
쟈링강(嘉陵江) 강변에 위치한 츠치커우(磁器口)에는 뒤에 고진(古镇)이라는 이름이 붙는다. 고진(古镇)은 그동안 매거진의 다른 글에서도 많이 소개했었는데, '옛 마을'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이 츠치커우라는 곳도 사실 옛날부터 이곳에 존재하던 마을을 약간의(?) 가공을 거쳐 만든 관광지라고 보면 된다.
송나라 때 쟈링강의 항구 역할을 하며 번성하기 시작한 마을인 이곳의 본래 이름은 롱인쩐(龙隐镇), 즉 용이 숨어있는 마을이었다. 중국 옛 지명에 용(龙)이 등장하면 보통 황제와 관련이 있는데, 이곳도 그렇다.
송나라 2대 황제인 건문제가 당시 연왕이었던 영락제에 의해 황위를 찬탈당하고 이 지역까지 유랑하다가 바오룬쓰(宝轮寺)라는 절에 승려로 들어갔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데, 바로 이 바오룬쓰가 츠치커우 안에 있다. 이 이야기가 전해진 뒤로 이 마을이 '용이 숨어있는 마을'로 불렸다고 한다. 그런데 또 다른 썰(?)로는 건문제가 사실은 황위를 찬탈당할 당시 궁 안에서 불에 타 죽었거나 인근 지역에서 자살을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진실은 저 너머에...
아무튼 본래 이렇게 용이 숨어있는 마을이라고 불렸던 곳이 지금의 츠치커우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 것은 청나라 때쯤인 것 같다. 자기(瓷器)를 만들어서 수운을 통해 다른 지역으로 판매하는 것이 성행했기 때문에 생긴 이름이다. 추측컨대 마을의 원래 이름에 들어있는 '용'이라는 글자가 황제를 뜻하다 보니 바뀐 조대의 황제에게는 거슬려서 이름을 바꾸게 했을 것 같다.
역사적인 배경은 이렇지만, 냉정하게 말해 츠치커우에 입점해 있는 점포의 느낌은 상하이에 있는 주가각(朱家角)이나 톈진에 있는 고문화 거리(古文化街)와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에, 다른 지역의 비슷한 거리를 많이 가봤다면 실망할 수도 있다. 내 생각엔 이런 곳에서 뭔가 거리 자체의 특색을 찾는 것보다는 오히려 충칭이라는 지역에 위치함으로써 다른 지역과 구별되는 차이를 주로 보는 것이 더 적절한 것 같다.
상하이의 옛 마을이 강물을 사이에 둔 수향 마을의 형태를 하고, 톈진의 고문화 거리가 북방의 느낌을 준다고 하면, 충칭의 츠치커우는 '언덕의 도시(山城)'라는 특색에 맞게 비탈이 많고 비탈 사이사이에 골목이 형성되어 있는 점이 특징이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사람이 모이면 더 정신없는 면도 분명 존재한다. 타이베이의 지우펀(九份)과 묘하게 비슷한 것 같기도 하다.
사람이 너무 많아 구경하기가 쉽지 않았지만, 개인적으로 츠치커우에서 재미있게 본 특이한 상점들을 소개한다. 이런 곳들은 사실 츠치커우에서만 볼 수 있다고 하기는 어렵고, 비슷한 유형의 옛 마을에서는 많이 볼 수 있는 풍경이다. 특히 같은 사천, 파촉(巴蜀) 문화권에 속한 청두의 콴자이썅즈(宽窄巷子)나 진리(锦鲤) 같은 곳에도 비슷한 점포는 있다. 하지만 충칭을 갔을 때쯤엔 아직 청두를 가보지 못했기 때문에, 이런 것들이 신선하게 느껴졌다.
상단 왼쪽 사진은 특히 청두(成都)에서 많이 볼 수 있는 활동, 귀파기(掏耳朵)다. 청두는 바깥에 간이의자를 세팅해두고 손님이 오면 전문적으로(!) 귀를 파주는데, 츠치커우는 아무래도 거리가 넓지 않고 경사진 구조다 보니 밖에 의자를 두진 못하고 건물에 들어가서 하게 되어 있었다. 하지만 쫄보인 나는 충칭에서도 청두에서도 시도해보지 못했다.
오른쪽 사진은 진주를 파는 상점이었다. 한 알에 50 위안이었던 것 같은데, 직접 진주가 붙어있는 조개를 진열해두고 세척, 세공하는 것까지 보여주는 점이 특이했다. 음모론자(?)들에 따르면 저 진주도 가짜일 거라고 하는데, 사실 이런 관광지에서 굳이 진위를 판별하는 눈이 필요하진 않다고 생각한다. 속는 사람도, 속이는 사람도, 가볍게 가볍게.
상단 왼쪽 사진은 역시 청두에서도 많이 보였던 변검 장난감이다. 머리 장식을 아래로 누르면 딸깍 소리가 나면서 팬더 얼굴의 색이 변했다. 디자인도 다양하고 값도 저렴해서 많이들 사갔다. 하지만 싼 게 비지떡이라고 잘 고장난다고 하더라.
오른쪽 사진은 개인적으로 인상적이었던 '이름으로 시 짓기' 상점. 말 그대로 이름에 들어가는 한자를 적어주면 그 한자를 가지고 시를 지어주는 상점이었다. 건당 10 위안밖에 받지 않아서 사실 해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아무래도 한국인 이름에 들어가는 한자는 중국에선 잘 쓰지 않는 한자인 경우가 많아 괜히 시인을 곤란하게 만들까 싶어 주문은 하지 않았다. 우리나라로 치면 이름으로 삼행시 지어주기 정도일까? 역시 한시가 생활화되어 있는 중국이다.
상단 왼쪽 사진은 간판에 고동인생(鼓动人生)이라고 적혀 있는데, 북 고(鼓)자를 써서 북을 포함한 각종 악기를 파는 상점이었다. 특히 우리가 갔을 땐 점포 안에서 직접 북 강습도 하고 있었는데, 홍보 효과를 위해서 하는 것이겠지만 전통 악기를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도 알리고자 하는 마음이 전해졌다.
오른쪽 사진은 나무 조각을 가지고 묵주나 작은 공예품, 액세서리를 만들어주는 가게다. 쇼윈도에 적혀있는 글자 때문에 사진을 남겼다. 현장에서 직접 재료를 고르면 바로 갈아서 원하는 모양으로 만들어준다는 이야기인데, 거기에 당시 최신 유행어 "판타(盘它)"가 적혀 있다. 원래 이 말은 중국인들이 호두 두 알을 손바닥 안에서 굴리는 행위에서 유래한 말인데, 파생되어 어떤 것이든 만지작만지작거려서 매끄럽게 만들어준다는 뜻을 가지게 되었다. 촌스러운 그 폰트와는 달리 가게에서 보여주던 액세서리는 나름대로 고풍스럽고 세련되었던 기억이 있다.
물론 이렇게 다른 지역에서도 볼 수 있는 관광지 느낌 나는 상점들 외에, 다른 곳에서는 보기 어려운 츠치커우만의 독특한 먹거리도 있다. 이름하야 '쳔마화(陈麻花)'. 속칭 '한 입 꽈배기(一口麻花, 이커우마화)'라고 불리는 이 꽈배기 과자는 아기 팔뚝만 한 굵기의 톈진 마화와는 달리 정말 한 입에 쏙 들어갈 정도의 크기다.
쳔마화는 청나라 말기부터 이 지역에서 무척 사랑받았다고 하는데, 성씨인 쳔(陈)이라는 글자만 전해져 내려오기 때문인지 츠치커우에는 쳔졘핑마화, 쳔챵인마화, 쳔마화 등등 쳔 씨 성을 가진 다양한 이름의 마화 가게가 존재한다. 수많은 쳔 씨 간판을 보고 있으면 마치 한국의 '원조 골목'을 돌아다니는 기분이다. 물론 막상 들어가 보면 마화 맛은 다 비슷비슷하다. 그러니 아무 가게나 골라서 들어가 보자.
톈진이 마화로 유명하다곤 해도 그 크기와 굵기에 압도당해 시도할 엄두를 못 냈던 것과는 달리, 이곳 충칭의 마화는 크기가 부담스럽지 않아 시식할 용기를 낼 수 있다. 개인적으론 여기가 사천 지방이라 그런지 마라 맛 마화가 정말 맛있었는데, 얼마나 맛있었냐면 여기서 한 통 산 것도 모자라 상하이에 돌아가서도 타오바오에서 봉지째 주문할 정도였다. 매콤하면서 달콤한, 감칠맛 나는 매력! 작은 크기의 마화가 소분되어 있어 한 봉지 한 봉지 까먹는 맛이 있다. 그야말로 인간 사료. 혹시 츠치커우에 가는 분이 있다면 추천하고 싶은 명물이다.
충칭에서의 셋째날의 마지막을 어떤 말로 갈음해야 할까. 아마도, '돌'과 '사람'?
타이베이의 지우펀을 방불케 하는 인파로 사람들과 부대껴 휩쓸렸던 기억이 대부분인 츠치커우였지만, 지금 이렇게 정리하면서 보니 생각보다 많은 풍경을 보았구나 싶다. 저렇게 열심히 돌아다닌 후 급속도로 체력이 방전되어 한가해 보이는 가게에 들어가 병맥주로 목을 축였던 것은 비밀. 그리고 저녁때쯤 충칭의 홍대 지우졔(九街)의 맥주창고 같은 술집을 간 뒤로 그 어떤 사진 기록도 남기진 않았다는 건 더 비밀.
길었던 이 날을 어느 한 단어로 갈음하기는 좀 어려울지 모르지만, 어떤 물건 하나로 갈음할 수는 있을 것 같다. 그건 바로 충칭에서 구매한 종이퍼즐.
중국의 다양한 도시를 다니면서 기회가 있을 으레 잡화점을 찾곤 했다. 지역마다 특징이 확연히 다른 중국은 잡화점에 그 지역 특색을 담은 아기자기한 기념품 같은 것들을 팔곤 했기 때문이다. 충칭에서도 혹시 귀여운 무언가를 발견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안고 츠치커우의 한 잡화점을 찾았을 때, 취향저격 종이 퍼즐을 발견해 냉큼 구매했다.
디자인이 마음에 들었다. 바로 전날 저녁에 야경을 보고 온 쳰쓰먼대교의 풍경이었다. 하드보드지에 A-AB-ABC-ABCD 이렇게 점층적으로 늘어나는 도안이 그려져 있었는데, 이것을 잘 세워서 연결해주면 바로 완성되는 종이퍼즐이었다. 팬더가 다리 위를 잡고 서서 "러스우두(勒是雾都, 충칭 방언으로 '여기는 충칭'이라는 뜻)"라고 말하는 것까지 완벽했다.
이 퍼즐은 정말 마음에 들어서 한국에 가져와서 조립한 후 회사 내 책상 옆에 두었다. 정신없이 현생을 살다가도 이 퍼즐을 보고 있으면 한때 중국에, 그리고 충칭에 있었던 것이 꿈은 아니라는 생각에 잠시나마 행복해진다.
[충칭 3일차 일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