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양(沈阳) 지역연구 1일차 (1)
5월을 지난 상하이가 점점 습해졌다는 사실은 이미 지난 충칭 지역연구 기록에서 한 바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습함'이라는 레퍼토리를 가져다 쓰는 이유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로 정말 너무너무너무 습했기 때문이다. 2~3일만 지나도 반은 차 있는 옷장 내 제습제를 보면서, 아무리 청소해도 꿉꿉한 냄새가 나는 화장실을 마주하며, 제습기를 옆에 놓지 않는 이상 절대 마르지 않는 내 빨래를 보면서, 정말 습기에서 벗어나고 싶어졌다.
다음 지역연구 장소를 정할 때가 되었을 때, 선양(沈阳)을 꼽은 이유 중 팔 할은 선양이 건조하다는 사실이었다. 내 나름의 경험적 추론이었는데, 베이징에서 교환학생을 할 때 절대 습함을 느껴본 적이 없었으니, 북경보다 위도가 더 높은 선양이라면 분명히 훨씬 건조할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베이징은 아무래도 추억이 있는 장소니 나중에 가고, 2박 3일이면 충분히 둘러볼 수 있을 것 같은 도시 선양을 고른 것이다. 선양에 청나라 초기 황제가 있었는지 같은 역사적 사실보다는 그저 날씨, 습함을 피할 수 있을 것 같은 날씨가 우리를 사로잡았다.
6월 21일, 종강 후 정식으로 자유롭게 지역연구를 할 수 있게 되기 전 마지막 주말. 그 주말에 우리는 선양으로 지역연구를 떠나기로 했다. 습기를 피하고 싶어서. 그리고 그 생각은 완전히 적중했다. 2시간 반(상하이에서 서울 가는 것과 비슷하다) 가량 비행기를 타고 도착한 선양 공항은 건조하고 선선함 그 자체였다. 6월의 중국이 선선하다니, 한껏 습한 상하이에서 온 우리에게는 그저 감동과 같은 날씨였다.
선양, 한자어로 심양(瀋陽), 랴오닝(辽宁) 성의 성도. 개인 피셜 번체자로 쓰면 더 멋진 도시 중 하나. 요녕 심양(遼寧瀋陽), 왠지 꽉 들어차 보이고 있어 보이지 않는가? 충칭에 이어 또 다른 번체자 도시. 이곳에 오기 전 나의 머릿속 선양은, 그저 중국 동북지역의 중심지, 조선족이 많이 모여사는 곳 정도의 인상밖에 없었다. 그런데 숙소에 도착해 짐을 풀고 저녁이라도 먹을 겸 나서는데 엘리베이터에 낯선 그림이 그려져 있다. 황제?
그렇다. 오기 전엔 잘 몰랐지만 이곳은 후금의 수도이자, 청나라가 북경에 입성하기 전까지의 황제가 머물던 도시였다. 그래서 그런지 엘리베이터에 이렇게 황제가 새겨져 있다. 그뿐이랴, 만주사변과 관련된 도시이기도 하고, 병자호란 때 소현세자가 끌려간 곳이기도 하단다. 그냥 습한 걸 피해 왔을 뿐인데, 생각보다 이 도시의 역사가 짙어 공부를 많이 해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아, 근데 선양의 저녁 바람, 정말 시원하다.
선양에 왔으니 이곳에 가보지 않을 수 없다. 바로 북한요리 전문점. 조선족도 많이 모여 살고, 이전엔 탈북자도 꽤나 살았다는 이곳 선양에는 북한에서 온 사람이 열었을법한 북한요리 전문점이 많다. 조선족이 많이 모여 산다는 씨타졔(西塔街)라는 곳에 이런 가게들이 유독 많은데, 공연도 보면서 밥을 먹을 수 있는 곳이 있다고 해서 가보게 되었다. 북경에 있을 때도 이런 데는 무서워서 못 갔는데.. 괜찮을까?
숙명의 라이벌인 듯 보이는 모란관과 평양관 사이에서 우리가 고뇌에 빠져있을 때, 모란관 앞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린다. 길 건너편에서 유심히 살펴보니 싸움이 붙었는지 주먹질을 하는 사람들이 보인다. 조금 있다가 경찰차도 오고 하는 걸 보니 패싸움이라도 붙은 모양이다. 편견은 없지만, 순간 영화에서 보았던 조선족 거리의 모습이 머릿속을 스쳐간다. 아, 모란관은 안 되겠다. 평양관으로 가자.
나름대로 따중뎬핑에 15년 연속으로 수록된 평양관은 저녁 시간에는 식사와 함께 북한에서 온(or 왔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공연을 볼 수 있다고 하여 유명한 곳이다. 찾아보니 우리가 방문할 시간쯤에도 공연이 있다고 하여 일단 들어가 봤다. 쓰여있던 대로 공연을 볼 수는 있었는데 굉장히 음.. 매체에서 보는 북한 사람들의 공연 느낌이 많이 나서 그다지 기대한 만큼 좋지는 않았다. 오히려 식사에 좀 방해가 된다는 느낌?
좀 늦은 시간이어서 많이 먹기는 좀 그렇고, 간단하게 평양냉면과 감자전, 떡(打糕)을 시켰다. 전체적인 느낌은, 삼삼-하다? 사실 진짜 평양 음식점에서 먹는 평양냉면의 맛이 내심 기대되었는데, 생각보다 특이한? 독특한? 맛이었다. 내 취향은 아닌, 그런 맛. 진짜 평양냉면의 맛인지는 잘 모르겠다. 감자전도 아주 삼삼. 그나마 설탕이 버무려져 있는 찹쌀떡이 그나마 먹을만했다. 전체적으로 취향은 아니었다. 하지만 내가 북한 음식에 조예가 있는 편도 아니고, 평소에 자주 먹던 것도 아니므로 그냥 개인적인 의견에 불과함을 밝힌다.
다소 아쉬운 저녁 식사를 마치고 씨타졔의 밤거리를 걷는다. 밥 먹기 전 마주친 패싸움의 잔상이 머릿속에 남아 사실 얼른 숙소로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이 불쑥불쑥 머리를 들긴 했지만, 그래도 첫날 저녁을 허투루 보낼 수는 없어 두려움을 무릅쓰고(?) 거리를 걷는다. 조선족 집중 거주지역이라 그런지 한국어로 된 간판도 많이 보이고, 약간은 북한 같은 느낌의 단어들도 많이 볼 수 있다. 조선족이 사용하는 말이 북한에서 사용하는 말과 비슷한 면이 있어서 그런 것 같다.
아래는 몇 개의 풍경들.
#1. 심양시 조선족 제6 중학교. 조선족인 경우에만 다닐 수 있는 민족학교 같은 느낌인데, 제6중이 있으니, 총 몇 중까지 있는지 궁금해진다.
#2. 씨타졔(西塔街) 이름의 기원이 된 씨타(西塔). 서쪽에 있는 탑이라는 뜻. 청나라 태종이 당시 수도였던 이곳의 동서남북에 각각 4개의 절과 4개의 탑을 만들었는데, 그중 서쪽에 있는 탑을 뜻한다. 늦은 시간이라 들어가 보지는 못했다. 하얀 탑이 북경에서 봤을 법한 모양이다.
#3. 식당 앞을 장식해둔 한복 입은 사람 모형. 아마도 조선족 전통 복장이라고 한복을 입힌 모양을 세워둔 것 같다. 사실 내가 사진을 찍게 된 이유는 따로 있는데, 그녀의 오른손에 들려 있는 음료. 저건 원래 있던 게 아니라 누군가 올려놓은 것이다. 가끔 이렇게 중국인들의 해학(?)을 발견할 때마다 나도 모르게 웃음이 지어진다.
#4. 씨타졔의 한백쇼핑. 한국 백화점에서 따온 걸까? 그리고 "한국 위성전문" 회사. 뭘 하는 회사인가 봤더니 인터넷 TV 설치를 해주는 곳이다. 방송인 장영란 씨가 보인다. 간판에 적힌 조선은 북한을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