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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볕이드는창가 Oct 02. 2021

선양(沈阳) 지역연구 2일차 (2)

졌지만 잘 싸웠다

중국 동북지방에 오면, 조심하세요


중국에 대한 경험이 조금이라도 있는 사람이라면 중국, 그중에서도 동북, 똥베이(东北)를 이야기하면 머릿속에 바로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을 것이다. 남자를 떠올려보라고 하면 두피가 보일 정도로 바짝 깎은 머리와 가슴팍까지 걷어올린 티셔츠, 두툼하게 튀어나온 배와 손에 든 담배 한 개비, 거리의 포장마차에 걸터앉아 맥주를 마시며 꼬치를 뜯는 아저씨를 떠올릴 것이고, 여자를 떠올리라 하면 뽀글거리는 파마머리에 펑퍼짐한 꽃무늬 원피스를 입고 양산을 쓰고 시장에 나와 큰 소리로 소리치는 통통한 아주머니를 떠올릴 것이다.


모든 일에 이리저리 돌려가며 이야기하는 것보다 직설적인 것을 더 좋아하고(直来直去), 남자든 여자든 호탕하고 대범한 성격인(大大方方) 동북지방 사람들은 중국 사람들 사이에서도 디테일보다는 매크로에 강하고 사소한 일들에 크게 신경 쓰지 않으며, 체면을 밥보다 중요하게 생각하고 유머와 해학이 몸에 밴 사람들이라는 인상이 강하다. 베이징 사람들도 중국에서는 북방에 속하는지라 이런 면이 있지만, 동북 사람들은 좀 더 그 특징이 강하고 두드러진다.


그런 의미에서, 이야기가 좀 새긴 했지만, 중국 동북지방에서 식당에 가게 되면 조심해야 한다. 중국 남방 지방에 있다가 북방에 가게 된 사람의 경우 특히. 왜 조심해야 하냐고? 여차하면 내가 시킨 음식에 짓눌려 위가 터지는 경험을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남방 지방에서 요리를 시켰을 때의 양과 북방 지방, 특히 동북지방에서 요리를 시켰을 때의 양은 그 접시 크기부터 다르다. 디테일과 정확한 계산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남방 지역에서는 배를 적당히 채울 정도의 요리 개수가, 호탕하고 체면을 중시하는 동북지방에서는 위장을 터뜨릴 수도 있는 엄청난 양으로 돌아올 수 있다. 이걸 좀 더 빨리 알았다면 좋았을 텐데.


9·18 역사박물관과 베이링 공원을 돌아본 뒤 우리가 배를 채우기 위해 향한 곳은 베이링 공원 근처에 위치해 있는 동북 요리 전문점, 동북대원(东北大院). 거대한 건물이 통째로 식당 건물이었는데, 입구부터 그 수많은 붉은색 등이 "나 이름난 음식점이요"라고 외치는 것만 같았다.



안으로 들어가자 온갖 요리의 사진들이 우리를 반긴다. 물론 이렇게 요리 사진을 잔뜩 걸어두고 막상 메뉴판엔 사진이 없다거나 하지는 않다. 그저 요리가 실제로 어떤 모양인지 보여주기 위한 참고용에 불과하다. 심지어 주방 앞에 있는 선반에는 요리가 담긴 접시들이 놓여 조리 예를 보여준다. 정말로, 이걸, 잘 봐 둘 걸 그랬다. 식당 안에 앉은 손님들은 슬쩍 봐도 다 로컬 사람들이다. 짧은 머리에 퉁퉁한 몸집, 앞서 예로 든 북방 아저씨의 전형들이 이곳에 모여 식사를 하고 있다.



식당 한쪽 면에는 이곳 선양의 전통 공연예술 중 하나인 얼런쫜(二人转)의 무대가 차려져 있었다. 난징에 있던 식당에 핑탄(评弹) 무대가 차려져 있던 것과 비슷했다. 우리는 보지 못했지만 아마 특정 시간대가 되면 공연을 진행하는 것 같다. 우리는 마침 이날 오후에 다른 곳에서 얼런쫜을 감상하기로 했기 때문에 그다지 아쉽진 않았다.


또 한 가지 특이했던 점은 테이블마다 아래 오른쪽 사진과 같은 큰 통이 하나씩 놓여있었다는 점이다. 양생자보죽(养生滋补粥)이라고 적혀있는 이 통은 호로록호로록 마실 수 있을 만큼 묽은 죽이었다. 어떤 요리를 주문하는지에 관계없이 무료로 제공되는 죽이었다. 북방 지방의 인심을 볼 수 있는 동시에 '죽을 마신다(喝粥)'는 말이 일상적인 이곳 중국 사람들의 식문화를 보여주는 모습이었다.



자, 이제부터가 진짜다. 요리를 주문해야 했다. 남자 둘, 여자 하나, 이렇게 셋이 갔고, 이것저것 시켜보고 싶은 마음에 주식 포함 다섯 가지 메뉴를 시켰다. 사실 상하이에서 이렇게 주문했다면 좀 많긴 해도 그럭저럭 소화할 수 있는 양이었을 텐데, 문제는 여기가 동북지방의 선양이라는 점에 있었다. 첫 번째 음식이 등장하자 우리는 조리 예를 보지 않고 무작정 시킨 것을 살짝 후회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 접시, 한 접시, 새로운 요리가 추가될 때마다 한숨은 늘어갔다.


오후에 많이 걸어야겠다고 다짐한 시간


삭힌 오리알과 두부를 간장소스와 함께 버무려낸 피딴더우푸(皮蛋豆腐), 부추와 계란을 속에 넣은 대형 군만두 쥬차이허즈(韭菜盒子), 넓적 당면을 각종 야채와 특제 겨자소스에 버무려 나오는 동북 라피(拉皮), 동북 요리에 빠질 수 없는 꿔바오러우(锅包肉), 한국이면 고급 중국식당에나 있을 법한 전가복(全家福), 그리고 갈증을 풀어줄 수박주스까지. 시킨 메뉴들은 다 동북 요리에서 순위권 안에 들어갈 메뉴들. 다만 그 음식이 담긴 접시가 정말 엄청나게 크고 접시만 큰 게 아니라 요리의 양까지 많아서 보기만 해도 배가 부를 정도였다.


양을 떠나서, 맛은 어땠냐고? 더할 나위 없었다.


꿔바오러우야 원조가 하얼빈이기도 하고 한국에서 워낙 자주 먹었던 터라 특별할 것이 별로 없었지만, 나머지 요리들이 대박이었다. 오죽했으면 이날 이 식당에 다녀온 뒤, 상하이에 돌아와서도 나는 동북 지방이 고향인 친구의 도움을 받아 동북 요리 집을 찾아다녔을까.


특히 라피(拉皮)가 환상적이었다. 동북 지방에서 파는 라피는 서안의 량피(凉皮)와는 좀 다르게, 고추기름의 매운맛보다는 겨자 소스의 맛이 강한데, 그래서 그런지 해파리냉채와 비슷한 맛도 나면서 감칠맛도 올라오는 것이 딱 내 스타일이었다. 물론 서안의 량피든 동북의 라피든 둘 다 내 취향이지만.


하지만 맛있다고 라피를 잔뜩 집어먹은 게 문제였다. 더 이상 뱃속에 꿔바오러우와 전가복이 들어갈 자리가 없었다. 단백질이라고 뇌를 설득하며 두부를 좀 집어먹는 정도가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나중에 상하이에서 하얼빈 출신 친구에게 선양에서 동북 요릿집에 갔다는 이야기를 하니, 그 친구가 대뜸 이렇게 말하더라.


양이 진짜 많지?


아, 얘한테 물어보고 갈 걸 그랬다.


하지만 나와 다른 두 전우는 최선을 다했다. 탄수화물과 야채와 단백질을 고루 위장에 집어넣으며 오후에 있을 다른 일정을 위한 만반의 준비를 마쳤다. 이런 걸 두고 "졌지만 잘 싸웠다"라고 하려나? 다 먹고 나가기 전 찍은 식탁의 음식들이 글을 쓰고 있는 나를 비웃는 듯하다. "이 많은 걸 남겨놓고, 잘 싸웠다고?" 그래서 중국이 광판운동(光盘行动, 음식을 먹을 만큼 주문하고 남기지 않는 운동)을 시작했나 보다.



전쟁터의 마지막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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