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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볕이드는창가 Jan 08. 2022

혼자 가보는 게 사실 로망이었어

산시(山西)·허난(河南) 지역연구 1일차

혼자 가보는 게 사실 로망이었어


인생을 통틀어 혼자 여행을 떠나본 적이 없었다. 베이징에 있을 때야 베이징 안에서 혼자 빨빨거리며 돌아다닌 적은 있었지만 그런 시내 방황(?)을 여행이라고 하기는 부끄럽고, 정말 다른 도시로 가는 여행을 계획하고 실행한 적은 없었다. 입사 무렵인가 월정사에서 참여한 주말 템플 스테이는 여행이라고 할 수 없으니 제외하고.


굳이 이유를 찾자면 나를 아는 모든 사람들은 인정하는 나의 길치 특성과 한없이 충동적인 성정의 콜라보가 불러올 참극을 목도할 수 없었기 때문. 이런 나 자신도 무서웠지만 겁 많은 사람으로서 여행에서 맞닥뜨릴 돌발상황에 이성적으로 잘 대처할 용기도 좀 부족했다. 호기롭게 여행을 떠났다가 택시 강도를 만났다는 친구의 일화가 자꾸 생각났다.


하지만 사실은, 혼자 어딘가를 가보는 것은 나의 로망이었다. 동경하지만 막상 실천하기엔 무서운 그런 것.


지역전문가가 무엇이냐, 그런 평소엔 해보지 못했던 시도들을 일정이 허락하는 한도 내에서 자유롭게 해 보라고 주어진 시간이 아닌가. 그래서 종업식이 끝나고 평일·주말의 구애를 받지 않고 지역연구를 할 수 있는 시간이 오면 꼭 한 일주일 정도 혼자만의 지역연구를 가보려고 생각했다. 일주일이 넘으면 짐도 너무 많아지고 신경 써야 할 것도 많아져서 내 깜냥에는 일주일이 딱 적당하다고 생각했다. 그 와중에 꽤 이성적인 판단.


대신 아무리 충동적인 사람이어도 아무 계획 없이 생판 모르는 동네를 갈 수는 없는 법! 물론 원한다면 설렁설렁 한 달을 한곳에서 머물 수도 있었지만 중국이 오죽 큰 나라인가. 가볼 곳이 그렇게 많은데. 허투루 시간을 흘려보내지 않도록 계획만은 잘 짜고 가기로 했다. 돌발상황이야 지금 당장 예측할 수 없으니 어쩔 수 없고.


갈 마음은 정했는데, 막상 어딜 갈지 고민이 됐다. 이런 기회가 생기면 가장 먼저 가보고 싶었던 곳이 어딘지 생각하다가 옛 성(古城) 속 객잔에서의 하룻밤이 해보고 싶었던 것이 생각났다. 이 로망을 실현시켜줄 곳으로 펑황 고성(凤凰古城)과 핑야오 고성(平遥古城) 중에 고민을 하다가, 아무래도 접근성이 좀 더 낫고 주변에 묶어서 다녀올 의미 있는 도시들이 많이 있는 핑야오 고성(平遥古城)에 가기로 했다.


일단 핑야오 고성과 하룻밤 묵을 객잔을 정한 뒤 앞뒤로 근처 타이위안(太原)과 뤄양(洛阳)을 넣어 일정에 살을 붙였다. 틈날 때마다 기차 편이나 가볼 만한 곳을 알아보고 일정을 짰다. 그동안 항상 2박 3일, 길어봤자 3박 4일의 일정을 짜다가 7박 8일의 일정을 짜려고 보니 생각보다 더 고려할 사항들이 많고 어려웠지만 오롯이 나만 고려하면 되는 스케쥴링이라 나름의 재미도 있었다.


타이위안, 핑야오, 뤄양을 한 곳에 넣고 보니 중국의 과거로 향할 꽤나 그럴듯한 일정이 될 것 같았다. 옛사람들이 그렇게 서로 가지려고 싸웠던 중원(中原)이 아닌가. 첫 단독 지역연구로 더할 나위 없는 선택인 듯했다.


치열한 고민의 흔적. 뤄양 일정은 이후 다시 바꼈다.



디위헤이(地域黑) 못 들어 보셨어요?


호기롭게 혼자만의 지역연구 일정을 거의 다 짜고, 긴 지역연구 전 중국어 학원 수업을 들었다. 이제 학기도 끝나는데 본격적인 지역연구 시즌에 어딜 제일 먼저 갈 거냐는 선생님의 질문에 나는 나의 창대한 계획을 선생님께 설명해드렸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선생님의 얼굴이 바로 굳어진다. 선생님께서 조심스럽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허난성에 가는 거야? 흠.. 괜찮아. 중국어만 하고, 너무 여행객 티만 안 나게 다니면 괜찮을 거야.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백팩은 꼭 앞으로 메고 다녀."


여자 혼자 장기간 가는 여행이라서 이렇게 걱정하시는 건가 싶다가도 허난성에 유독 민감하게 반응하시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조사를 해보니 중국에는 디위헤이(地域黑, 지역에 대한 편견)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베이징, 상하이 등 각 지역 사람들이 다른 지역 사람을 볼 때 갖는 편견이 존재하는 편인데, 어느 지역 할 것 없이 모두 허난성 사람들을 '사기꾼, 도둑'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어찌나 심했는지 허난 사람들은 중국 다른 지역 사람들 모두를 '나에게 상처 주는 사람들'로 인식하고 있다는 웃픈 이야기도 봤다.


허난성 외 사람들 모두가 자신을 상처주고 있다고 생각하는 허난 사람들


허난성 사람들이 왜 이런 이미지를 갖게 되었나 보니 허난성의 환경 영향이 컸단다. 예부터 땅이 워낙 척박하고 식량이 부족한데 인구는 또 많은 편이었던 허난성은 이런 이유로 외지에 나가 생활하며 돈을 버는 사람들이 많았다. 사람이 많으니 그중 별별 사람이 다 있었겠지. 그중 일부 나쁜 사람들의 행동이 크게 알려져서 대다수의 괜찮은 사람들마저 싸잡아 비난을 받게 된 케이스라고. 현재의 기준으로 허난성이 그렇게 잘 사는 성이 또 아닌지라 정당하지 않은 수단으로 돈을 번다는 오명을 쓰게 된 것이다.


물론 이런 지역에 대한 편견이 중국에만 있는 것도 아니고, 어불성설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지만, 대부분의 선생님들께서 이구동성으로 비슷한 걱정을 하시니 외국인이자 초행길인 나는 갑자기 긴장이 되기 시작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당시 학원에 상하이가 고향인 선생님들께서 꽤 계셨기에 외지인에 대한 편견이 좀 더 셌던 것 같기도 하다.


어쨌든 이미 계획은 다 세웠고, 중국인과 섞여있을 때 나의 로컬 융합력(!)에 대해서는 꽤 자신이 있었던지라 일단 최대한 조심하자는 생각만 남기고 다른 이야기들은 일단 머릿속에서 지웠다. 편견을 가지고 처음 보는 무언가를 대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하고 재미없는 일인지 잘 알기 때문이다.



날 좀 보내주겠니, 상하이야?


학교 종업식이 끝나고 캐리어를 끌고 홍챠오 공항으로 향할 때까지만 해도, 처음으로 혼자 떠나는 지역연구에 대한 설렘과 기대가 가득이었다. 조금 긴장도 됐지만, 언어도 어느 정도 가능하니 긴급상황에 나름대로 대처할 수 있을 거라는 자신도 있었다. 게이트에 가기 전에 여유롭게 스타벅스 굿즈도 구경하고, 커피 한 잔 들고 게이트로 향했다.


눈물의 비행기표와 귀여운 스타벅스 굿즈


결론부터 얘기하면, 나의 비행기는 3시간 늦게 출발하게 되었다. 오후 5시 반이면 이미 상하이 상공을 날고 있었어야 할 비행기는 6시가 되어도, 7시가 되어도 탑승을 알릴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출발지나 도착지의 기상 상황이 좋지 않은가 싶어 어플을 확인했는데 아무래도 기상상황 문제는 아닌 것 같았다. 심지어 비행기는 이미 공항에 먼저 도착한 상태. 관제탑에서 이 비행편의 출발 우선순위를 뒤로 미룬 것 같았다.


물론 중국에 연착이 잦다는 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어서 처음에는 유유하게 드라마를 보며 잘 버텼는데, 어느 순간부터 나를 포함해 기다리는 사람들이 인내심이 점점 없어져가는 것이 느껴졌다. 승무원들에게 '내 사업이 잘못되면 책임질 거냐'며 환불을 요구하거나 특별 항공편을 편성하라는 요구를 하는 승객도 있었다. 비록 받아들여지진 않았지만.


한 7시 반쯤이었나, 갑자기 사람들이 우르르 탑승구로 몰려가기에 이제 드디어 탑승하려나 싶어 짐을 챙겼는데 알고 보니 탑승이 너무 늦어지니 기내식을 대기하면서 먹으라고 나눠주는 것이었다. 이미 아수라장이 된 탑승구 앞에서 기내식을 받아먹을 마음이 안 생겼다. 옆 사람이 받아온 기내식을 보니 전형적인 로컬 반찬들이다. 그냥 굶기로 했다.



중국의 연착, 특히 중국 국내 항공편의 출발 지연이 심하다는 말은 많이 들었지만, 막상 이렇게 정말 오랜 시간 지연된 것은 처음이었다. 앞에 했던 다섯 번의 지역연구 중 비행기로 갔던 것이 톈진, 충칭, 선양인데, 돌아오는 날 출발지에 비가 많이 왔던 톈진 빼고는 모두 이런 일이 없었다. 방심했다. 진짜가 여기 버티고 있을 줄이야. 어플에 동일 항공편의 기존 이력을 찾아보니 유난히 이 비행편의 연착이 잦았다. 운도 드럽게 없지. 관제탑도 지역 편견에 따라 출발 순서를 정하나?


잠깐, 근데 이거, 가면 위험하니까 가지 말라는 신의 계시인가...? 별 생각이 다 들었다.


일단 도착해서 숙소 체크인하는 것도 좀 문제였다. 아무래도 숙소에 도착하면 자정이 넘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일단 예약해둔 숙소에 먼저 전화를 걸어 상황을 설명했다. 다행히 호텔에서는 괜찮다며 조심해서 오란다.



타이위안(太原), 드디어 너를 보는구나


3시간의 탑승 지연 후, 드디어 비행기를 타고 상하이를 벗어나 타이위안에 도착했다. 예상대로 타이위안 무숙 공항에 도착하니 이미 자정을 넘은 상황. 어떻게 택시를 잡아야 하나 걱정하고 있는데 다행히 공항 앞에서 목적지인 타이위안 남역(太原南站)으로 향하는 버스가 있었다. 16위안으로 숙소 앞까지 안전하게 갈 수 있다니 다행이다 싶어 일단 버스에 올랐다. 다행이다.


야심한 시각, 장장 3시간 연착을 견디고 드디어 타이위안 숙소에 도착했다. 숙소를 기차역 바로 앞으로 잡길 잘했다. 아무래도 랜드마크 성 스팟 앞에 잡으니 돌발 상황이 생겨도 금방 숙소에 올 수 있었다. 어쨌든 무사히 도착한 타이위안, 또 무슨 놀라운 일이 벌어질까? 가슴이 두근거린다.


어렵사리 도착한 호텔과 맞은편 타이위안 남역



[산시·허난 1일 차 일정 (타이위안)]


[중문 일기 in 위챗 모멘트(朋友圈)]

(譯) 이렇게 심한 연착은 처음이다.. 게다가 바로 전 항공편은 심지어 먼저 도착했는데.. 이해가 안 된다 ㅠㅠ 상하이야, 날 좀 가게 해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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