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볕이드는창가 Mar 09. 2022

이 집 참 넓네, 교가대원

산시(山西)·허난(河南) 지역연구 2일차 (1)

비행기 연착으로 늦게 도착해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산시성에서의 이틀째를 맞이했다. 오늘 일정은 영화 <홍등>의 촬영지로 유명한 교가대원(乔家大院)을 본 뒤 타이위안 시내에 있는 곳들을 둘러보는 것. 교가대원이 타이위안에서는 기차로 가야 할 정도의 거리였기 때문에 아침 일찍 일어나 숙소 앞 타이위안 남역으로 기차를 타러 간다.



교가대원에 가기 위해 도착한 타이구 서역(太谷西站) 앞은 마치 지하철 종점 근처의 어느 역에 도착한 것마냥 한산하다. 본래 계획이 역에서 내려 택시를 타고 교가대원 앞까지 가는 것이었기 때문에 한산한 역 앞을 본 내 마음은 몹시 불안해졌다. 하지만 걱정도 잠시, 근처에 유명한 곳이 있는 역답게 역 광장 근처에서 대기 중인 택시가 쭉 늘어서 있는 택시 승강장을 발견, 얼른 차를 잡아탔다.


중국어가 능숙지 않은 손님을 마주치는 행운을 바라던 택시기사는 다소 아쉬운 표정을 숨기지 못하며 어디까지 가냐 물었고, 교가대원을 간다고 하자 일단 미터기를 켜고 출발하기 시작했다. 사실 그곳에 서있는 많은 택시들은 외국인 손님을 상대하여 흥정하고 출발하는 것이 익숙한지라 나 또한 그들이 흥정을 요구할까 다소 걱정했던 것이 사실이지만 그래도 다행히 잘 넘어간 듯했다.



청대 대저택의 모습을 여기에서, 교가대원(乔家大院)


갈우(葛优), 공리(巩俐) 주연의 영화 <홍등(大红灯笼高高挂)>을 본 사람이라면 양쪽으로 붉은 등이 켜져 있고 문마다 곱게 단장한 여자들이 서서 남편의 '간택'을 기다리던 그 저택을 기억할 것이다. 이날 내가 간 '교가대원'이 바로 그 영화의 촬영지다. 실제로 교가대원 안에는 당시 크랭크업을 했던 기념품 등이 놓인 전시관이 있었다. 영화가 주는 묘한 분위기와 깊은 여운 때문에 영화 속 이야기가 실제 이곳에서 행해졌던 일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사실 영화 속 스토리와 이 집과는 관련이 없다. 아마 이곳이 보존이 워낙 잘 되어있기로 유명한 청대의 고가이기 때문에 당시 촬영 장소로 선택된 것이 아닐까 싶다.


<홍등>과 드라마 <교가대원>의 촬영지였던 이곳


교가대원은 진상(晋商) 중 으뜸갔던 부자인 교 씨 가문이 살았던 저택이다. 진상(晋商)이라는 말은 본래 명청 500년간 활약했던 산시성(山西省) 상인을 뜻하는 말이다. 춘추시대 산시성 대부분이 진(晋) 나라의 영토였기에 산시성 상인들은 진상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들은 원래 염업을 주로 하던 상인들이었으나, 후대에 오늘날 은행과 유사한 개념의 표호(票号) 사업으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그리고 이 진상 중 으뜸갔던 부자가 바로 이 집의 주인, 교 씨 가문이었다.


교가의 1대는 교귀발(乔贵发)로, 본래 가난한 농민 출신이었다. 먹을 것이 없던 참담한 현실을 벗어나고자 바오터우(包头, 현재 내몽고)에 가서 전당포 점원으로 일하게 된다. 이후 시기를 잘 타 광셩공(广盛公)이라는 곡류 판매점을 내지만 불경기를 만나 파산에 직면하게 된다. 평소 그의 인품을 높이 산 사람들은 그가 빚을 가을 수 있도록 3년이라는 말미를 주었고, 3년 후 그는 빚을 말끔히 청산했을 뿐 아니라 금의환향하게 된다. 이 일화는 이후 신의를 중시하는 교가의 경영철학에 큰 영향을 준다. 교가가 가장 번영했던 시기는 3대 교치용(乔致庸) 시절이며, 당시 북으로는 러시아, 남으로는 광저우까지 점포를 확장했다. 이후 교가는 5대에 걸쳐 큰 부를 누리게 된다.


당시 교씨 집안의 상업 네트워크 지도


교 씨 집안 상업활동의 원칙은 1순위가 신뢰, 2순위가 의리, 그리고 이익은 마지막 3순위였다. 집안 곳곳에 공자를 모시는 공간과 공자의 초상 등이 있는 것으로 이곳이 인의(仁义)를 중시하는 집안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교가대원이 잘 보존될 수 있었던 이유 역시 인의와 관련되어 있다.


청 말기 8국 연합군이 중국을 침략했을 때, 산시성 총독은 산시성에서 양인들을 죽이는 데 여념이 없었다. 그때 이탈리아 수녀 7명이 칼날을 피해 교가대원으로 도망 왔고, 인명보다 중요한 건 없다고 생각한 교치용이 그들을 금고에 숨겨 보호하여 위기를 넘겼다. 후에 사건을 안 이탈리아에서 국기를 보내 감사의 뜻을 표한다.


이후 중국을 침입한 일본군은 교가대원에 걸린 이탈리아 국기 때문에 차마 공격을 하지 못했고, 유일하게 파괴되지 않은 이 집은 해방 후 현청, 인민의원, 식량창고, 당교 등으로 쓰이면서 문화대혁명의 화마를 피했다. 덕분에 교가대원은 중국에 '황제의 집은 고궁을 보고, 민간의 집은 교가를 보라(皇家有故宫,民宅看乔家)'는 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청나라 민가를 대표하는 저택이 되었다.

 

공자를 모신 사당이 집안에 있다


물론 상인의 집이니 재물신 관우를 모신 곳도 있긴 있다. 재밌게도 공자를 모신 곳에는 사람들이 지폐를 놔두지 않았는데, 이 관우가 모셔진 곳에는 지폐를 잔뜩 갖다 두었다. 저 얇은 유리 틈으로 어떻게 저 많은 지폐를 넣었는지. 더 나은 삶에 대한 사람들의 소망은 어딜 가나 똑같다.



표호업의 흔적인지 집안에 대량의 은자를 모셔둔 장소가 있었다. 우편물 업무 및 은자 보관 장소를 겸했던 이곳은 당시의 모습을 재현하려는지 여전히 모형(?) 은자가 많았다. 남의 집 금고를 훔쳐보는 느낌이 들어 좀 이상한 기분이었는데, 생각해보면 이해가 되지 않는 것도 아니다. 척박한 산시성이라는 곳에 거대한 저택을 짓고 살면서 엄청난 액수의 돈을 쥐고 있는데, 집안 어딘가에 감춰둘 장소는 당연히 있어야겠지.



'거부'의 집답게, 교가대원은 정말 크다. 북방 지역의 저택답게 곳곳이 담으로 뒤덮여있고, 집 안에 예쁘게 꾸며진 정원도 있다. 재미있는 건, 집안에 위치한 중요한 장소마다 그곳의 운영 규칙이 잘 적혀있다는 점이다. 규칙(规矩)을 중요하게 생각했던 교 씨 집안사람들의 모습이 보인다.


앞서 영화 <홍등>에서의 에피소드가 실제 이곳에서 일어났던 일은 아니었다고 적었는데, 그 역시 이 집의 규칙과 관련이 있다. 사치스럽고 방탕한 생활을 하지 말라는 의미로 이 집의 규칙 중에는 '첩을 들이지 말 것'이라는 규칙이 있었는데, 그 규칙으로 미루어보아 여러 처첩을 거느린 홍등 속 남자의 삶은 이곳에서 실현되기 힘들었으리라.


브런치 다른 글에서도 이 드라마를 소개한 바가 있는데, 교 씨 집안의 삶에 대해서 혹시 더 알고 싶다면 <교가대원(乔家大院)> 드라마를 한 번 보기를 추천한다. 개인적으론 실제 이곳에서 벌어진 일이었어서 그런지 <홍등>보다는 <교가대원>이 이곳을 이해하는 데 훨씬 도움이 되었다. 가기 전 드라마를 보고 갔더니 드라마 속 한 장면에 내가 있는 것 같기도 했고.


넓디넓은 교 씨의 대저택을 뒤로하고 나는 타이위안을 대표하는 또 다른 곳을 향해 발걸음을 재촉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혼자 가보는 게 사실 로망이었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