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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볕이드는창가 Mar 26. 2022

고대의 월스트리트, 핑야오

산시(山西)·허난(河南) 지역연구 3일차 (1)

뤼피쳐(绿皮车)를 타고...


둘째날까지 내가 묵고 있던 타이위안에서 핑야오로 가는 방법으론 일반 기차를 타는 선택지가 있었다. 우리로 치면 새마을호, 무궁화호 같은 기차다. 하지만 타이위안 남역에서는 핑야오로 가는 기차가 없어 택시를 타고 먼저 타이위안 역으로 가야 했다. 추측컨대 타이위안 남역은 고속철 위주로 지나가고 일반 기차를 포함한 다른 종류의 기차는 주로 타이위안 역을 거쳐가는 것 같았다.



타이위안을 출발하여 용지(永济)라는 이름의 처음 들어본 도시로 가는 이 열차. 찾아보니 용지는 산시성(山西省)과 또 다른 산시성(陕西省) 경계에 있는 도시란다. 기차편 이름에 다른 알파벳이 붙어 있지 않아 생경하다 싶었는데(고속철 등 특수 열차는 기차 편명 앞에 G, D 등 알파벳이 하나씩 붙어 있다), 이 기차는 지금까지 지역연구를 위해 타본 다른 기차들과도 전혀 다른 모습을 가졌다. 겉이 온통 초록색으로 칠해져 있어 초록 껍데기 기차(绿皮车)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이 기차는 가장 속도가 느리고 값이 싼 축에 속하는 일반 기차다. 작은 도시 위주로 구석구석 다니는 기차여서 그런지 기차 밖 풍경도 정말 시골 풍경이다. 중국인들에겐 이런 초록 기차가 나름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모양인지 위챗에 사진을 올리니 친구들의 반응이 뜨겁다.



캐리어를 들고 기차를 탔는데 저렴한 기차다 보니 별별 사람들이 다 타있다. 혹시 짐이 없어질까 싶어 기차를 타고 움직이는 한 시간 반 동안 눈 한 번 감지 못했다. 덕분에 창밖 구경 잘- 했다. 드디어 핑야오에 도착! 햐아- 날씨 한 번 끝내준다! 구름 한 점이 없네. 자외선 차단 효과는 없지만 무심한 듯 시크하게 양산을 펴본다.


이쯤 되니 핑야오라는 곳이 어떤 곳인지 궁금해할 독자분들이 계실 것 같다. 내가 가려는 곳의 정확한 이름은 핑야오 고성(平遥古城). 앞서 '혼자만의 지역연구'를 계획할 때 그 계획의 가장 중심에 있던 것이 고성에 가보는 것이라고 적었는데, 바로 그 '가보고 싶었던 고성'이 바로 이곳이다. 명청대 가장 번화했고, 당시의 건물들이 비교적 온전히 보전되어 있는 몇 안 되는 고성 중 하나. 앞서 교가대원 글에서 언급했던 진상(晋商, 산시성 상인)들이 돈을 유통하는 주된 거점으로 삼았고, 19세기 중국 최초의 은행 '표호(票号)'가 생겨난 곳. 그래서 '고대의 월스트리트'라는 별칭이 있는 곳.


하지만 사실 내가 고성에 가보고 싶었던 이유 중에 이런 멋들어진 역사적 배경이 차지하는 비중은 별로 없었다. 중어중문학을 전공하고 중국 관련 업무를 하고 있지만 정작 중국에서 돌아다녀본 곳은 별로 없었던 나는, 그저 '고성에서의 하루'에 대한 로망이 있었을 뿐이었다. 고풍스러우면서 한적한 고성에서 혼자만의 느긋한 시간을 보내는 하루! 윈난의 리쟝, 따리에 대한 소문도 익히 들어왔고, 그런 너무 많이 알려진 고성들보다 좀 덜 알려져 있어 고성 느낌이 더 나는 곳이 바로 핑야오와 펑황고성이라고 하더라. 앞서 말한 역사적 사실들은 사실 핑야오에 도착해서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알게 된 사실들일뿐이었다.





첫 객잔 숙박!


고성 하면 객잔, 객잔 하면 고성이 아니겠나! 아무래도 고성에서 묵기로 했으니 객잔에서 한 번 자봐야겠다 싶어서 이번 숙소는 핑야오 고성 안에 있는 객잔으로 잡았다. 대도시에 있는 프랜차이즈 호텔은 그럴 일이 별로 없지만, 이런 객잔에 묵을 때는 외국인도 묵을 수 있는지를 꼭 확인해봐야 한다. 누구든 숙소에 숙박하게 되면, 숙소에서 공안(公安, 파출소)에 투숙인의 숙박과 관련된 등록을 진행해줘야 하는데, 작은 도시는 외국인 볼 일이 잘 없는 경우도 많고 외국인 등록은 번거로워서인지 안 해주는 곳도 있기 때문이다.


나의 경우 주로 Ctrip (携程)에서 숙소를 검색해서 예약을 했는데, Q&A에 관련된 질문이 있는지를 먼저 확인 후 없다면 핫라인을 통해 외국인 숙박도 가능한지 문의하고 가능함이 확인되면 그때 예약을 진행했다. 이런 확인 없이 무턱대고 예약했다가 막상 도착해서 숙박이 불가함을 깨닫고 급하게 다른 숙소를 찾는 경우도 왕왕 발생하니 작은 지역으로 여행을 가시는 분들은 주의하시라.


이번에 예약한 숙소에서는 핑야오 역까지 픽업 서비스를 해줘서 덕분에 캐리어도 차에 싣고 편안하게 고성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나를 데리러 온 차는 고성 서문으로 들어가 숙소로 나를 안내해주었다. 차로 숙소로 가는 길에 기사님께서 여기 유명한 공연 <우견 평요(又见平遥)>가 있다고 하며 예매 했냔다. 안 했다고 하니 꼭 한번 보라고 추천한다. 주말이었지만 일요일 저녁 공연이라 그런지 다행히 Ctrip으로 당일 공연을 바로 예약할 수가 있어서 급하게 한 명 분을 예약했다.


프런트에서 체크인을 할 때 아래와 같은 지도를 하나 줬다. 크래프트지 같은 황토색 종이로 되어 있는 이 지도에는 고성에서 가볼 만한 곳과 주요 출입구들이 표시되어 있었고, 이곳 객잔과 관련된 설명도 적혀 있었다. 청대 핑야오에서 유명한 부호의 집이었다는 이 객잔은 내가 묵을 당시 기준, 고성 안에서는 유일하게 5성급 숙소였다. 전체적으로 친절하고 고즈넉해서 원했던 분위기였던 기억이다.



프런트를 지나 안쪽으로 들어가면 아래와 같이 잘 가꿔진 정원과 책 읽고 대화를 나누라고 만들어진 공간이 보이고, 사방으로 객잔의 객실들이 보인다. 좋은 점은, 정말 딱 무협지에 나올 것 같은 객잔의 느낌이라는 것이고, 나쁜 점은 시설이 아무래도 호텔들만은 못하다는 점이랄까? 어찌 보면 시대 배경을 잘 살린 거라고 할 수도 있겠다. '객잔'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방 안은 딱딱한 옛날식 침대와 이부자리, 탁자 등이 놓여 있었고, 무엇보다 방문을 자물쇠로 걸어 잠그는 식이어서 좀 불편했다. 여자 혼자 간 지역연구라 문단속도 조금 신경 쓰였고. 하지만 그래도 다행히 샤워시설은 갖춰져 있었다.




있을 건 다 있는, 핑야오 고성


숙소의 짐을 좀 정리하고 자물쇠를 잠근 뒤 방을 나섰다. 프런트에서 들은 대로 우선 고성의 표를 사러 매표소로 향했다. 아래에 보이는 성문 누각 앞쪽에 매표소가 위치해 있는데, 표값은 125 위안. 성수기라 확실히 비싸다. 이 고성 표를 가지면 고성 안에 있는 박물관·전시관 등을 둘러볼 수 있는데, 일부 전시관이나 고택은 별도의 입장권이 필요한 경우도 있다. 역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된 슈퍼 관광지답다. 참고로 당시 이 입장권은 현금만 받았으니 참고.


고성의 표와 성문의 누각


표를 사고 첫 번째로 한 일은 바로 눈앞에 보이는 누각에 올라가 보는 것! 마침 오르내릴 수 있는 계단도 마련되어 있겠다 한 번 올라가서 고성의 전경을 보고 싶었다. 돌계단을 올라 고성 안을 내려다보니 잘 올라왔다 싶다. 겹겹이 보이는 고성 안의 지붕들과 좌우로 뻗은 길들이 만들어내는 계획도시의 면모. 마침 하늘도 맑고 푸르러서 풍경을 볼 맛이 났다. 이게 바로 고성의 풍경이구나!


고성 안과 고성 밖의 풍경


고성 안에는 이외에도 고성 내부를 조망할 수 있는 누각들이 몇 개 있다. 그중 가장 유명한 누각은 스러우(市楼)인데, 성 안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라고 한다. 18세기에 지어진 건물이 아직까지 그 모습 그대로 남아있다. 이 역시 위로 올라가 볼 수 있다고 하는데, 아쉽게도 나는 여기선 올라가지 않았다.



대신 관펑로우(观风楼)라는 다소 아기자기한 높이의 누각에 올라가서 아래를 내려다봤는데, 이렇게 보니 정말 어느 사극 중국 드라마의 '저잣거리' 같은 느낌이다. 물론 지금은 카페다 상점이다 해서 상업성 가득한 장소로 쓰이고 있지만, 그 건물의 외형만큼은 명·청대 모습 그대로 남아있다는 것이 신기할 따름이다.



고성은 그야말로 옛날 하나의 '도시' 같은 개념이라, 도시가 갖춰야 할 것들은 다 갖추고 있었다. 그것도 거의 옛 모습 그대로. 우선 우선 현청과 아문이 있었는데, 아문 안에는 감옥도 있었다. 번체자로 크게 적힌 '옥(獄)'이라는 글자를 보니 착하게 살아야겠다는 마음이 절로 든다. 그런데 또 감옥 앞은 왜 이렇게 예쁘게 꾸며놨는지.



그리고 또 성황묘(城隍庙) 역시 이곳이 옛 도시였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마을을 지키는 신인 성황신을 모신다 하여 옛날엔 마을마다 성황묘가 하나씩 있었다고 하는데, 이곳 핑야오고성에서 볼 수 있는 성황묘 역시 옛날에 세워졌던 모습 그대로를 보존하고 있었다. 특히 그 안에 사람들이 기원을 담아 걸어둔 기원패들과 연못에 던져진 엽전들이 인상적이었다.




핑야오, 누군가에겐 삶의 터전


중국에 있는 동안 다녀왔던 모든 곳들이 내겐 의미가 있었지만, 누군가 힐링이 필요하다거나, 바쁘디 바쁜 현대 사회에서 잠깐 쉼표를 찍고 싶다고 했을 때 아마도 내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를 곳은 바로 이곳, 핑야오 고성이리라.


물론 이곳은 중국 정부가 지정한 5A급 관광명소이고, 낮엔 거리에 각종 관광 상품을 파는 가게들이, 밤엔 분위기 좋은 음악을 틀어주며 여행객을 유혹하는 술집들이 들어서 있는 명실상부 관광지다. 그렇기에 미국 브랜드 KFC(肯德基)가 이렇듯 중국스러운 모습으로 들어와 있고, 객잔마다 손님이 그득그득하겠지.



하지만 이런 핑야오를 내가 '힐링'의 장소로 추천하는 건, 그가 가진 이중적인 면모 때문이다. 핑야오 고성에는 아직도 주민들이 살고 있다. 그래서 고성 중심지를 조금만 벗어나면 사람 냄새가 가득한 풍경이 나타난다. 그리고 그 풍경이 대단히 산시성다워서, 투박하지만 몹시 진실되다.


흙벽돌에 네모 반듯하게 지어진 집들. 사실 이것이 산시성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살아왔던 집의 모습을 닮아있을 것이다. 이곳은 명·청대 모습을 간직했기 때문에 유명해진 곳인데, 여기 살고 있는 사람들 역시 그 본연의 모습을 잃지 않았다는 점이 내 마음을 잡았다. 소위 말하는 '관광지화', '상업화'가 다른 고성들보단 좀 덜 되어있기 때문이겠지.



핑야오에 대한 첫 글에서는 핑야오가 가진 고성으로서의 면모와 그 매력을 먼저 풀어놓고 싶었다. 다음 글에는 핑야오가 가진 역사적 배경과 그곳에서 보낸 나의 하루를 이야기해볼 예정이다. 글을 맺기 전, 이날 내가 가장 마음에 들었던 사진 한 장을 공유해본다.


옛 양식 그대로지만 도리어 그래서 더 관광지스러운 고성의 길, 그 안에서 자전거를 타고 어딘가로 향하고 있는 마을 주민의 사진이다. 객잔이고 식당이고 관광 상점이고 그에게는 중요하지 않다는 듯, 그는 앞을 향해 의연하게 페달을 밟는다. 관광지의 시간이란 안중에도 없다는 듯.


그렇다. 신기함이 가득한 관광지이기 이전에, 이곳은 누군가에겐 삶의 터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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