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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볕이드는창가 Jul 24. 2022

용문석굴에 올 땐 양산을 챙기세요

산시(山西)·허난(河南) 지역연구 5일차 (1)

짧았던 정저우(郑州), 안녕!


허난성의 성도, 정저우. 지역연구 일정을 짜면서 이곳을 돌아보는 하루를 계획할지 말지 고민이 좀 많았다. 같은 성도급인 타이위안은 그래도 하루 정도 돌면서 명소들을 돌아봤는데, 정저우만 아무것도 보지 않고 지나가기는 좀 미안하고 아쉬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의 성도인 정저우보다는 '옛 도읍지'였던 뤄양(洛阳)이 좀 더 볼거리가 많고 가는 의미가 있을 것 같았고, 지도를 이래저래 돌려봤을 때 정저우는 막상 가볼 만한 곳이 별로 없다는 인상이 강했다. 그래서 굳이 하루를 더 머물기보다는 바로 뤄양으로 떠나기로 결심했다. 결론적으로 정저우는 거의 스탑오버의 형태로 지나가게 되었다.


정저우 숙소에서 본 정저우 시내


이렇게 스탑 오버할 바에는 차라리 핑야오나 타이위안에서 뤄양으로 바로 가는 기차를 타고 갔으면 좋았겠지만, 뤄양의 첫 코스로 정한 용문석굴을 보고자 하면 뤄양롱먼역(洛阳龙门站)에 내려야 하는데 거기까지 가는 기차가 정저우에서밖에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정저우에서 하룻밤을 자고 아침에 뤄양으로 가는 기차를 타러 정주동역으로 향했다. 사실 좀 더 이른 시간에 출발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전날 밤 도저히 아침에 일찍 일어날 자신이 없어 어플로 출발 시간을 좀 늦췄다. 덕분에 잠을 한 시간 정도 더 잘 수 있었다.



용문석굴에 오실 땐 양산을 챙기세요


고속철을 타고 약 30분 정도 가자 드디어 내려야 할 뤄양롱먼역에 도착했다. 일단 숙소에 들러 짐을 놓고 가기 위해 택시를 탔다. 역에서 숙소까지는 차로 약 20분 정도 거리. 뤄양은 작은 도시라 로컬 호텔로 예약을 했다.


갑작스런 뤄양의 환영인사와 숙소에서 본 뤄양 시내


짐을 놓고 숙소에서 용문석굴로 가는 택시를 하나 불러 탔다. 용문석굴은 방금 내린 고속철 역에서 멀지 않기 때문에 숙소에서 용문석굴까지도 차로 한 20분 정도 걸렸다. 입구에 도착해 입장권을 샀다. 입장권은 90 위안(한국 돈으로 18,000원 정도)인데, 규모나 유명세로 봤을 때 적절한 값이었다고 생각한다. 티켓 안에는 서산·동산 석굴, 향산사, 당대(唐代) 시인 백거이(白居易)의 묘 방문이 포함되어 있는데, 나는 너무 힘들어 동산 석굴은 보지 못하고 나왔다.



그렇다면 오늘 보기로 한 용문석굴은 어떤 곳일까? 일단 세계문화유산이다. 둔황의 막고굴, 다퉁의 윈강 석굴과 함께 중국의 3대 석굴로 꼽히는 이곳은 북위(北魏)의 효문제 때 뤄양으로 천도를 하면서 조성되기 시작했고, 그 뒤 여러 조대를 거쳐가며 약 400여 년에 걸쳐 지금의 모습에 이르게 되었다. 북위부터 송대에 이르기까지 각 조대 별로 이곳에 지속적으로 석굴을 팠기 때문에 여러 조대의 특성이 담겨있다는 특징이 있는데,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당대(唐代)였다. 아마도 무측천이 뤄양으로 천도한 것이 원인이지 않나 싶다.



입구부터 걸어 들어가면 '용문'이라고 쓰인 또 다른 입구를 만날 수 있는데 여기가 용문석굴의 정식 입구다. 이 입구를 지나 조금 더 걸어가면 서산 석굴의 시작점인 잠계사(潛溪寺)를 만날 수 있다. 당대 초기에 만들어졌다는 석굴이다.


당 초기에 조성되었다는 잠계사


좀 더 걸어가면 벌집같이 생긴 석굴 안에 작은 불상들이 하나씩 다 조각되어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용문석굴의 이쪽 편이 용문산에 있는 서산 석굴이고, 반대편에 조성된 석굴은 향산에 있는 동산 석굴인데, 유명한 석굴들은 대부분 서산 쪽에 위치해 있다. 개중에는 북위 때 조성되었다는 석굴도 있었는데, 북위 선무제가 아버지인 효문제를 위해 만들었다는 빈양동(宾阳洞, 아래 세 번째 사진)이 바로 그것이다.



중간엔 계단도 조성이 되어 있어 가까이서 석굴을 보고 싶은 사람의 경우 올라가서 볼 수가 있었다. 하지만 나는 올라가질 않았다. 왜냐하면 정말 너무너무너무너무 더웠기 때문이다. 이번 지역연구에 제대로 된 양산을 준비하지 않고 작은 우산을 대용으로 쓰기로 한 결정을 나는 너무도 후회했다. 7월 초 중원의 더위를 정말 과소평가한 것이다. 입구부터 얼마 걸어오지도 않았는데 이미 너무 진이 빠졌다. 다른 관람객들도 마찬가지인지 쉴 수 있는 그늘에는 이미 모두 사람이 앉아 있어서 쉬어갈 곳도 찾질 못했다.


사진으로 더위를 전달할 수 있다면...


게다가 또 하나의 문제는 내가 이런 류의 관광지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점에 있었다. 미학을 전공했거나 역사에 관심이 많거나 아니면 불교에 대해 조예가 깊다면 이곳의 석굴이 얼마나 예술적이고 종교적인 가치가 있는지를 판단할 수 있었겠지만, 아쉽게도 나는 그 무엇에도 해당하지 않았다. 절대자를 위해, 혹은 부모를 위해 이런 석굴을 조성하는 지도자의 마음은 이해할 수 있었지만 사실 그 스스로가 이 석굴을 판 것도 아니지 않는가? 결국 당시 누군가의 부역이 있었기에 이 장소가 조성될 수 있었던 것인데, 그렇다면 결국 이 석굴도 누군가가 누군가를 착취하여 만들어진 것이라는 생각에 나는 그 대단함에 마냥 탄복할 수는 없었다.



서산 석굴은 이 정도로 보고 나는 다른 스팟으로 이동하기로 했다. 중간에 있는 강(伊河)을 건너면 동쪽 편인 향산으로 이동할 수 있는데, 이쪽에 향산사와 백거이의 묘 등이 위치해 있다.


당대 시인 백거이가 '낙양 산수 중 가장 으뜸은 용문이요, 용문의 사찰 중 가장 볼만한 곳은 향산사다'라는 말을 남겼다는 향산사는 북위 때 조성된 후 무측천 때 지금의 이름을 갖게 되었다. 1936년 장졔스와 그의 부인 쏭메이링이 이곳에서 더위를 피하기도 했다는데, 그들이 피서했던 장소가 지금도 향산사에 남아 있다. 말은 피서라고 하지만 사실은 국공내전을 준비하기 위해 이곳에 왔다는 이야기도 있다.



향산사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아래 사진처럼 서쪽 석굴이 어렴풋이 보인다. 사진만 봐도 그때의 폭염이 느껴진다......



양귀비와 당 현종의 이야기를 읊은 <장한가>를 지은 것으로 유명한 당대 시인 백거이. 그의 묘원이라는 백원(白园)은 한적했고 녹음이 우거져 그늘이 많았다. 백거이는 생전에 이곳 향산에 오는 것을 참 좋아했다고 한다. 그래서 죽어서도 이곳에 묻히고 싶어 한 마음을 받들어 이곳에 묘원을 조성하게 되었다고. 번잡하고 더운 용문석굴의 반대편에서 한적하게 휴식을 취하고 있을 백거이를 생각하니 그가 왜 이곳을 좋아했다고 하는지 어느 정도는 이해가 된다.



용문석굴. 뤄양에 갔으면 한 번 꼭 봐야 한다는 말에 일정을 잡긴 했지만 너무 덥기도 했고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유형의 관광지가 아니라서 큰 감회가 남는 곳은 아니었다. 만약 특별한 흥미가 없이 이곳에 갈 분이 계시다면 개인적으론 입구에서 가까운 서쪽보다는 동쪽으로 건너가서 서쪽을 바라보라고 추천하고 싶다. 마치 상하이 푸동에서 푸시를 바라본 풍경이 훨씬 더 아름답듯, 용문석굴도 반대편에서 바라본 서산 석굴이 더 볼만했던 것 같다. 마지막으로 그렇게 바라보고 찍은 용문석굴 사진을 남기고 이 글을 갈음해본다. 가운데에 가장 크게 조성되어 있는 불상이 무측천의 얼굴을 딴 불상이라는데 지금 찾아보니 제대로 된 사진이 남아있지 않다. 덥긴 진짜 더웠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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