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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볕이드는창가 Jul 27. 2022

그들은 죽어서 행복했을까?

산시(山西)·허난(河南) 지역연구 5일차 (2)

관우의 머리를 찾아, 관림(关林)


용문석굴 관람을 마치고 나는 관우의 머리가 묻혀 있다는 관림(关林)으로 향했다. 용문석굴에서 거의 북으로 쭉 일직선으로 올라간 곳에 위치해 있는데, 시내버스로 한 40분 정도 가면 갈 수 있다고 하여 시내버스를 이용하기로 했다. 정류장에 도착해 조금 더 골목 안으로 들어가면 입구를 만날 수 있고, 입장료는 40 위안이었다. 



여기서 잠깐 관림이 어떤 곳인지 이야기를 해보자면, 아마 <삼국지>를 읽은 분들은 알고 계시겠지만 관우는 오나라 손권의 군사에 의해 목숨을 잃게 된다. 관우와 유비의 끈끈한 관계를 잘 알고 있던 손권은 시신을 자기 쪽에 두면 분명 유비가 자신을 칠 거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래서 관우의 머리만 잘라 당시 뤄양에 있던 조조에게로 보냈다. 


조조는 손권이 저지른 일을 자신에게 덮어씌우려는 속셈인 것을 알고 있었지만, 동시에 관우를 평소에 존경하고 인재로서 흠모하던 마음도 있었다. 머리만 도착한 관우를 보고 침향목으로 그의 몸통을 조각한 뒤 제후의 예로 장례를 치러준 것도 그런 마음에서였다. 이렇게 조조가 관우의 머리와 침향목으로 만든 몸통을 매장한 곳이 바로 관림이다.



입구 안으로 들어가면 적토마로 보이는 모형이 있고, 관우를 모신 사당이 나온다. 누가 중국에서 '재물'을 상징하는 신처럼 받들어지는 관우의 사당 아니랄까봐 사당으로 가는 길에 잔뜩 묶여진 기원 리본에는 돈이 잔뜩 들어왔으면 좋겠다는 염원을 담아 '구재(求财)'라는 두 글자가 잔뜩 쓰여 있다.



하지만 웬일로 다른 것을 기원하는 기원 리본들도 볼 수 있었는데, 바로 위쪽 왼편에 있는 나무에 달려 있는 것들이다. 나무 한 쪽 뿌리가 밖으로 나와 자라서 수형이 봉황의 꼬리를 닮았다 하여 봉황꼬리(凤尾)로 이름지어진 이 나무는 그 모양 때문에 딸이 멋지게 성장하기를 기원하는 기원수가 되었다고 한다. (중국에서는 아들은 용, 딸은 봉황으로 비유된다)


오른쪽에 있는 나무는 또 다른 나무인데, 나무 겉면이 회오리바람을 닮았다. 관우가 여기서 바람에 실려 하늘로 올라간 뒤, 나무가 점점 이런 모습을 하며 자랐다는 전설이 있는데, 진짜든 아니든 절묘하게 그런 모양을 가진 나무를 심어둔 것이 재밌다.



어떤 사당 안에는 2019년 4월에 누군가가 보낸 감사 금기(锦旗)가 놓여져 있었다. 관우에게 빌었으니 돈이라도 많이 들어와서 그런가 했더니 아이가 생겼나보다. '아이를 보내주셔서 감사합니다(送子有功)' 라고 적혀 있다. 물론 자식이 돈보다 훨씬 가치있고 귀하지, 암.


더 안쪽으로 들어가면 다섯 호랑이의 전당, 오호전(五虎殿)이라고 이름붙여진 공간이 있는데, 여기는 관우, 장비, 조운, 마초, 황충을 모신 전당이라고 한다. 아마도 싸움으로 이름났던 사람들만 모신 공간이 아닌가 싶다.



여기가 바로 관우를 모신 묘인 것 같았다. 위쪽엔 조조가 관우를 봉한 '한수정후'묘라고 적혀있고, 안쪽에는 큰 봉분이 위치해 있다. 조조는 평소 관우를 인재로서 흠모했고 또 늘 자신의 밑에서 진심으로 충성을 다해주기를 바랐었는데, 그 존경과 흠모의 마음이 잘 드러나는 곳이다.


관림을 다 보고 나오는 길에 사당 벽에 삼국지의 내용이 그림과 글로 표현되어 있는 액자를 볼 수 있었다. 그러고보니 부산역 근처에 있는 화교학교에도 이런 벽화가 있었는데. 아이들과 함께 관림을 보러 왔다면 흥미있게 볼 수 있지 않았을까? 물론 외국인인 나에게도 충분히 학습자료로서의 가치가 있었다.



이쯤되면 이런 생각이 든다. 관우는 죽어서 행복했을까?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관우의 머리는 이곳 뤄양에, 관우의 몸통은 후베이성 당양(当阳)에, 의관은 그의 고향인 산시성 윈청(运城)에 각각 묻혔다고 한다. 살아서도 각종 전투들로 몸이 편할 날이 없었는데, 죽어서도 옷만 고향에 올 수 있었다니. 좀 가여운 마음도 든다. 게다가 시신도 온전하게 보존되지 못했고.


하지만 역설적으로 중국 고대 인물들 중에서 지금까지도 현대인의 입에 가장 많이 오르내리고 영향을 주는 인물 역시 관우다. 중국의 아주 작은 도시에도 관우를 모시는 사당은 어떤 형태로든 존재하고, 많은 중국인들이 아직도 그에게 현세에서의 각종 소망들을 의탁하곤 한다. 그렇다면 비록 그 스스로의 몸은 죽고 나서 편히 쉬지 못할지 몰라도, 그의 영혼만은 하늘에서 웃고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일단 넣고 끓이세요, 후이차이(烩菜)


관림까지 보고 나오니 이제 배가 좀 고프다. 그러고보니 점심 때도 제대로 된 것을 먹지 못하고 땡볕에 돌아다녔으니, 배가 고플만도 하다. 밤에 야시장을 볼 계획이 있었으므로 좀 이른 저녁을 먹기로 했다. 메뉴는 후이차이(烩菜). 뤄양에 가면 먹어야 한다는 음식이다. 시내버스로 움직일 수 있는 곳에 후이차이를 잘 한다는 식당이 있어 가보기로 했다.


후이차이라는 이름에 쓰인 후이(烩)라는 글자는 '모아 끓이다' 라는 뜻으로, 거기에 요리라는 뜻의 차이(菜)가 붙은 후이차이는 우리 말로 하면 '잡탕' 같은 느낌이다. 여러 가지 재료를 한 데 모아 끓여낸 요리를 일컫는 말로, 허난이나 허베이 외에도 동베이 지방에도 루안뚠(乱炖)이라는 이름으로 비슷한 요리가 존재한다. 내가 간 식당에는 후이차이 외에도 탕몐쟈오(烫面角)라는 이름의 찐만두도 있어서 한 번 시켜봤다. 탕몐쟈오도 뤄양의 전통 음식이라고.



비주얼이 무척이나 친숙한 탕몐쟈오는 예상대로 딱 찐만두 맛이었다. 문제는 후이차이인데, 양이 정말 많았다. 뭐가 들어 있나 자세히 보니 버섯, 배추 등 각종 야채와 두부, 푸주(腐竹), 그리고 고기완자와 고기 등이 들어 있었다. 기본적으로 제공되는 국물은 짭조롬하고 맵지 않은 국물인데, 기호에 따라 위에 보이는 매운 양념장을 추가하면 된다고 한다. 맛이 나쁘지는 않았는데 완자만은 먹을 수가 없었다. 중국 고기나 소시지에서 종종 나는 중국 냄새가 너무 강하게 났기 때문이다.


사실 이 요리방법이 단순하기 그지 없는 후이차이라는 요리는 남송 때 악비를 모함했던 간신 진회(秦桧)와 관련이 있다. 당시 진회의 나쁜 짓에 분노한 사람들이 각종 재료를 한 데 넣고 끓여서 요리를 만들어 사람들과 나누면서, 여기 들어있는 고기를 진회의 살이라고 생각하고, 국물을 진회의 피라고 생각하고들 드시라고 한 것이 그 기원이 되었다고 한다. 


관우도 진회도 지금은 모두 죽어 세상에 없지만, 한 명은 죽어서 각지의 사당을 남겼고, 한 명은 죽어서 (본인은 모르는) 요리를 남겼다. 물론 사람들이 그 유물에 기탁하는 마음은 정반대지만 말이다. 뭐라도 남긴 그들은 죽어서 행복할까? 나도 이 세상을 떠날 때 뭔갈 남기고 떠날 수 있을까? 생각이 많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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