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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볕이드는창가 Jul 23. 2022

여유가 있었는데요, 없었습니다

산시(山西)·허난(河南) 지역연구 4일차

반나절의 여유 in 핑야오


핑야오에서 맞는 아침이 밝았다. 오늘은 오전 중에 고성 안에서 조금 더 시간을 보내다가 오후가 되면 바로 떠나야 하는 일정. 마음 같아서는 핑야오 고성 안에서 하루 정도 더 보내고 싶은데, 이미 세워둔 일정들이 있었기에 어쩔 수 없었다. 언젠가 기회가 되면 또 한 번 오는 걸로! 마치 한국 시골집 같은(ㅠㅠ) 정겨운 객잔 방에서 오전 중 고성의 마지막 모습을 둘러볼 채비를 마치고 객잔 조식을 먹으러 2층으로 올라갔다.


글로벌 호텔 체인이 아닌 정말 그야말로 로컬 객잔이어서 그런지 조식은 로컬 음식 뷔페였다. 메뉴가 중국 사람들에게는 너무도 익숙한 가정식이어서 그런지 당연하게도(?) 음식에 이름표 같은 것은 붙어있지 않았고, 외국인인 나는 어쩔 수 없이 모양을 보고 재료를 유추할 수밖에 없었다. 이럴 때 빼는 스타일은 아니지만 낯선 곳에서 혼자 배탈이 나면 안 되니, 일단 최대한 안전한 메뉴를 골라본다. 전, 잡채, 볶음밥, 만두, 또우쟝....


식당에서 조식을 먹으니 지금 이 객잔에 투숙하고 있는 손님들을 자연스레 만날 수가 있었는데, 대부분 아이들과 함께하는 가족 단위였다. 우리로 치면 안동 하회마을 같은 곳에 역사 교육 겸 데려온 걸까? 생각보다 젊은 사람은 없어서 놀랐다. 아마 서양에서 온 외국인 관광객들은 게스트하우스에 묵고 있지 않을까 싶다.


안전한 길을 택한 조식


아침을 먹고 짐을 간단하게 정리한 뒤 오전 고성 산책에 나선다. 아침의 고성은 오후의 고성보다 확실히 유동인구가 적어서 그런지 좀 더 한적한 느낌이다. 장사를 준비하며 하루를 시작하는 핑야오 사람들을 만날 수가 있다.



고성 중심부에서 조금 걸어 고성 안에 위치한 문묘(文庙)로 향했다. 지난 난징 지역연구 기록에서 소개한 바 있는데 중국은 각 도시마다 공자를 모시는 크고 작은 사당이 존재한다. 바로 이 고성 안에도 문묘라는 이름으로 공자를 모시는 사당이 있었다. 아마도 이 지역에 사는 사람들이나 방문하는 사람들 중 학업적으로 좋은 결과가 필요한 사람들이 이곳에 들러 소원을 빌곤 할 것이다.



영성문이라는 이름의 문을 지나면 본격적으로 공자를 모신 대성전을 볼 수가 있다. 핑야오에 있는 이 문묘는 당 정관 1년에 처음 지어졌다고 하는데, 그중 대성전은 금나라 때 다시 지어져 현대까지 내려오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금나라 때 건축 양식을 가진 유일한 문묘라고 하며, 대성전의 경우 현존하는 전당 중 역사가 가장 오랜 곳이라고도 한다.


대성전으로 가는 길에서, 또 문묘 곳곳에서 아래와 같은 노란색의 기원패를 볼 수가 있는데, 모두 괴(魁)라는 한자가 적혀 있다. 으뜸, 장원이라는 뜻을 가진 이 한자로 미루어보아 학업적 성취를 기원하는 기원패임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우연히 내 눈에 띈 한 기원패에는 985, 211 대학(중국의 명문대), 칭화대, 북경대, 난카이대를 가게 해달라는 소원이 적혀 있었다. 소원대로 꼭 이루어졌길 바라 본다.



문묘 곳곳에 공자와 <논어>, 또 우리에게 익숙한 각종 명사들이 눈에 띈다. '등용문' 할 때 '용문'이라든지, 명륜당, 또 <학이편>의 그 유명한 구절 학이시습지(学而时习之)에 나오는 '시습'에서 이름을 딴 '시습재(时习斋)' 같은 것들. 공자를 모신 사당임을 모르고 들어왔더라도 그 분위기에 이끌려 어쩐지 열심히 공부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곳이다.



문묘에서 따스한 아침 햇살을 받으며 (실상은 뜨거운 햇살이었지만..) 마음의 양식을 쌓았지만 아직 점심시간이 되질 않아 나는 잠시 카페에 앉아 여유를 즐기기로 했다. 평점이 좋은 카페를 찾아보니 소금 커피를 판다는 곳이 있어 가보았다. 이름은 하이옌카페(海岩咖啡). 너무 직관적이다. 소금 커피가 시그니처라 하여 시켜보았는데 더위를 식히기 딱 좋은 맛이었다.



잠시 휴식을 취하면서 일정을 점검한 뒤 나는 자연스럽게 따중뎬핑(大众点评)을 켰다. 점심을 먹을 시간이 되었기 때문이다. 정말 이 어플은 혼자 여행할 땐 없어서는 안 될 도구다.


이번에도 핑야오의 특색 있는 음식을 파는 로컬 식당 한 곳을 찾았다. 이름은 더쥐위안(德居源). 평점이 괜찮은 식당이었는데 오픈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가서 그런지 자리는 많았다. 이번에도 당당하게 '한 명(一位)!'을 외치고 식당 안으로 들어간다. 점점 낯짝이 두꺼워지는 것 같다.


음식을 시키고 한 숨 돌리며 가게 안을 살펴본다. 벽면을 가득 채운 종이들이 눈에 띈다. 자세히 보니 이곳을 다녀간 각국의 손님들이 남긴 메모다. 사실 나는 우연히 만나는 이런 낙서들을 좋아한다. 도서관에서 빌린 책이나 알라딘에서 산 헌책에 남겨져 있는 낙서도 좋고, 이렇게 음식점에 남겨져 있는 낙서도 좋다. 낯선 곳에서 한 자 한 자 자신의 생각을 꾹꾹 눌러 적었을 누군가를 상상하는 것도 좋고, 이렇게 손님이 남긴 낙서들을 지우거나 버리지 않고 벽에 꼼꼼히 남겨둔 따뜻한 주인의 마음도 좋다.


요즘은 가게 미관을 고려하여 이런 메모들을 지우거나 없애는 곳도 많지만, 한 사람의 손님으로서 음식이 나오기 전에 다녀간 손님들이 어떤 생각을 했는지 읽어 보며 시간을 보낼 수 있어 나는 이 메모들이 꽤 마음에 들었다. 혹시 이번에도 어제 그 술집처럼 한국어로 된 낙서가 있는지 찾아봤는데 아쉽게도 이번엔 없었다. 특이하게도 이곳엔 중남미 쪽에서 온 손님들의 낙서가 많았다.



점심 메뉴로는 산시성에서 먹어봐야 할 요리라는 카오라오라오(栲栳栳), 마오얼두어(猫耳朵), 추이피쳬즈(脆皮茄子)를 시켰다. 마침 핑야오 지역맥주도 있어 한 병 시켜보았다. 시킨 요리 중에 그 재료나 맛을 얼추 짐작할 수 있는 요리는 단 하나다. 바로 추이피쳬즈(脆皮茄子). 바삭한 껍질의 가지라는 뜻의 이 요리는 가지를 튀긴 후 새콤달콤하게 양념을 묻혀 내놓은 요리다. 요즘 우리나라에서도 중국음식점에서 종종 이런 가지볶음을 만나볼 수 있는데, 사실 19년 당시만 해도 많이 없는 편이었다. 나는 워낙 중국의 가지 요리를 좋아해서 입에 잘 맞았다.



그럼 나머지 두 요리는 대체 뭘까? 우선 카오라오라오(栲栳栳)는 위 사진 중 우측 상단에 보이는 갈색의 요리다. 이 요리의 이름은 카오라오(栲栳)에서 왔는데, 이는 식물의 가지를 엮어서 상자처럼 만든 바구니를 일컫는 말이다. 귀리로 만든 반죽을 원통 형태로 만들어 빼곡히 넣어 '카오라오'와 같은 바구니의 형태로 만들었다 해서 카오라오라오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아래 사진 참조) 산시성 고산지대의 전통 음식이라는 이것의 본래 모습은 아래 사진처럼 정말 바구니의 형태로 생겼고, 거기에 각종 양념장을 찍어 먹게 되어 있는데, 이곳에서 시킨 카오라오라오는 원통형의 반죽을 야채와 함께 볶아서 나왔다. 맛은 꽤나 삼삼하다. 귀리로 만든 중국식 파스타 같은 느낌이다.



다음 궁금한 요리는 마오얼두어(猫耳朵). 상단 사진 중 우측 하단에 있는 요리다. 고양이의 귀라는 뜻인 이 요리의 이름을 보고, 또 그 요리가 중국 요리인 것을 보고 어떤 분들은 아마도 기겁을 할 것이다. 고양이의 귀를 먹는 줄 알고 말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냥 귀리나 밀가루로 반죽하여 만들어낸 면식에 불과하다. 그 모양이 고양이의 귀를 닮았다 하여 이름이 이렇게 붙었다. 실제 마오얼두어가 가리키는 것은 요리에 들어가는 밀가루로 된 파스타를 뜻하고, 확실하게 정해진 조리법 등은 없기에 식당마다 조리법이 각자 다른 점이 특징이다. 내가 갔던 이 식당에서는 토마토 베이스의 양념으로 만들어져 마치 토마토 파스타를 먹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얼핏 마카로니의 느낌이기도..?


어쨌든 핑야오의 마지막을 특징적인 요리와 지역 맥주와 함께 할 수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천천히 숙소로 돌아가 짐 정리 방 정리를 하고 체크아웃하기 몇 분 전 잠시의 여유를 즐겨본다. 처음으로 묵어본 객잔의 하루는 생각보다 그 환경이 깨끗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꽤 낭만적이었다. 장기투숙은 힘들지 몰라도 며칠 와서 묵고 가는 것은 나쁘지 않을 것 같다.


핑야오 고성을 생각하면 조금은 허무한 생각이 든다. 옛날에는 오늘날의 상하이처럼 그렇게 번화했던 고대의 월스트리트가 지금은 그저 옛날 남겨진 유적으로 먹고사는 관광지에 불과하다는 것이. 또 중국을 넘어 러시아까지 진출했던 상인들이 모여 있던 이곳이 왜 지금은 관광 수입 없이는 가난한 도시가 되었는지 하는 생각이 들어서다. 결국 문제는 장기적인 안목으로 세상을 보지 못하고 현실에 안주했기 때문은 아닐지? 지금이 가져다주는 풍요에 안주해 미래에 어떤 일을 해야 할지를 잊었기 때문은 아닐지. 근대 이전의 도시 핑야오, 고성만이 주는 분위기에 젖어 마치 청나라 사람이 된 양 마음껏 돌아다닌 1박 2일이 이렇게 끝나간다.




기차표 타임어택


고성에서의 시간을 즐겁게 보내게 해 준 숙소에 작별을 고하고 숙소에서 제공하는 차를 타고 핑야오 역으로 향했다. 지금까지는 여유로운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면, 오후는 사실 좀 시간에 쫓길 예정이다. 핑야오로 올 때 그랬던 것처럼 태원 역을 거쳐 태원남역까지 가야 함은 물론이고 다음 일정을 위해 태원남역에서 시간 맞춰 허난성 정저우(郑州)로 가는 기차도 타야 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나는 외국인이라 자동발권기에서 실물 표를 받을 수가 없어 무조건 창구에 줄을 서야 한다. 물론 중간에 태원역에서 태원남역까지 택시로 이동할 시간은 감안하여 일정을 짜긴 했지만 맞춰야 할 기차 시간이 두 개나 되어 혹시 중간에 택시가 잘 잡히지 않거나 발권 시 시간이 오래 걸릴 경우 기차표를 다시 알아봐야 하는 일이 벌어질 수도 있다.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나.....ㄹ 뻔 했다!



일단 핑야오에서 태원역으로 가는 기차는 무난하게 잘 타고 이동할 수 있었다. 그야 당연하지. 숙소에서 배차해준 차로 편하게 핑야오 역까지 왔으니까. 핑야오 역은 정말 작은 역이라 대기하면서 한눈팔 일도 없었고 창구에 줄 선 중국인도 별로 없었다. 덕분에 무난하게 실물 표 교환 후 기차 탑승에 성공!


하지만 문제는 이다음이었다.


태원역에 도착한 후 태원남역까지 택시를 타고 이동해야 하는데 역에서 택시가 안 잡히는 거다! 어떻게든 이동은 해야겠는데 기다려도 기다려도 택시가 오질 않아 급하게 생각해낸 방법이 역 맞은편으로 가서 어플로 택시를 잡아보는 것! 무거운 캐리어를 끌고 겨우겨우 역 맞은편으로 건너가 택시 탑승에 성공했다.


물론 이게 끝이 아니었다. 태원남역에 도착한 후에도 또 창구 앞에서 줄을 서서 표를 받아야 하는데, 창구에 또 사람은 얼마나 많은지. 중간중간 갑자기 운영을 중단하는 창구도 생기고 새치기에 눈치 싸움에 난리도 아니었다. 나는 한 편으론 짐이 없어질까 신경 쓰면서 한 편으론 누가 새치기하지 않는지 보느라고 신경이 무척 곤두서 있었다. 각고의 노력(?) 끝에 결국 실물 표를 받아 든 시간은 열차 출발 불과 15분 전. 얼른 플랫폼으로 가야 하는 상황이었는데 이 상황을 꼭 기록으로 남기고 싶어 표 사진을 찍었다.



태원남역에서 정주동역까지는 3시간 40분 정도 기차를 타고 가야 하는 일정. 산시성에서 허난성으로 성을 넘어가는 일정이라 기차를 꽤 오래 타야 한다. 겨우겨우 기차에 탄 게 너무 다행이라 그저 그 사실 하나에 감사하며 3시간 40분 여정을 버텼다. 물론 짐이 없어질까 봐 눈 한 번 감지 못했음은 당연하다.


정주동역(郑州东站)과 그 광장


한낮에 땀 삐질삐질 흘리며 역과 역 사이를 돌아다녔던 것이 거짓말처럼 정주동역에 도착하니 이미 해가 다 지고 없다. 역 앞엔 엄청난 면적의 역 광장이 반짝거리는 조명으로 장식되어 있다. 광장무 추는 아주머니들이 있을 법도 한데 역 광장이라 경비가 삼엄해서인지 딱히 없었다. 정주동역에서 숙소까지는 도보로 20분 정도 거리였는데, 거리로 봤을 때 택시가 잡힐 것 같은 느낌도 안 들고, 직전에 택시 때문에 고생했던 기억 때문에 엄두도 안 들어 그냥 걸어가기로 했다. 캐리어를 끌고 터덜터덜 20분.


숙소에 도착해 짐을 풀고 창밖을 보는데 아까 역 광장에선 보이지 않던 광장무 아주머니들이 여기 와계신다. 쿵짝쿵짝 멜로디에 맞춰 춤을 추는 아주머니들은 단체로 빨간 치마를 맞춰 입고 오셨다. 덕분에 이른 잠은 물 건너갔으니 내일 가볼 곳이나 미리 공부해야겠다. 분명 핑야오에서는 그렇게 여유로울 수가 없었는데, 오후 내내 이리 뛰고 저리 뛰니 그 여유가 모두 거짓말 같다. 여유가 있었는데요, 없었습니다. 그렇게 핑야오와 타이위안, 정저우를 모두 들른 하루가 저물어 간다.


빨간 치마 광장무 언니들



[산시·허난 4일차 일정 (핑야오, 타이위안, 정저우)]


[중문 일기 in 위챗 모멘트(朋友圈)]

(譯) 아침엔 조용하고 한적한 고성에서 핑야오 요리에 곁들여 맥주를 마셨는데(추이피쳬즈 진짜 맛있음!), 그다음엔 오후 내내 시간을 들여 겨우 허난 정저우에 도착했다. 정주동역은 밤에 참 번화했는데, 아쉽게도 내일 오전이면 바로 떠나야 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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