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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볕이드는창가 Jan 31. 2021

마이크를 든 공자 아저씨

난징(南京) 지역연구 1일차 (2)

(지난 편에서 계속)


친화이허에서는 배를 타보자


라오먼동에서 다음으로 향한 곳은 남경 친구가 꼭 가보라고 추천한 남경의 어머니강 친화이허(秦淮河). 서울로 치면 한강과 같은 곳으로, 남경 사람들에겐 의미가 깊은 강이다. 친구가 내게 준 미션은 여기서 배를 타는 것이었는데, 마침 등 축제가 진행되는 중이라 야경을 감상하며 배를 탈 수 있는 낭만적인 시기였다. 하지만 우리만 이런 생각을 갖고 이곳에 왔을까? 똑같은 생각으로 이곳에 온 수많은 관광객으로 이곳은 아수라장.


사진 하단에 있는 저 수많은 검은 그림자가 보이는가, 모두 사람 머리다.


갑자기 티엔즈팡, 예원상성의 악몽이 떠오르며 발걸음 떼기가 무섭다. 하지만 이번에 남경을 다녀가면 다시 지역연구로 이곳에 올 수 없으니, 어떻게든 후회 없이 경험을 다 해봐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 용기를 내서 발을 떼 본다. 그렇게 많은 사람이 모여 보고 있던 풍경은 친화이허와 그 위의 화려한 조명들. 흡사 레이저쇼를 생각나게 하는 모습이다. 사실 이런 조명쇼가 취향은 아니라서 나는 조금 실망했다.


아 이 촌스러운 레이져 광선을 보라


레이저 조명쇼만 없었어도 좀 나았을 수도 있는데, 잔잔히 흐르는 강물 위로 눈을 찌르는 레이저가 웬 말인가. 어찌 보면 너무 중국스러운 연출이었다. 강물 위로 떠다니는 배들은 곧 우리가 탈 유람선. 여러 대가 한꺼번에 운영되고 있는 것 같았다. 강 구경은 이쯤 하고 목적이었던 배를 타러 가보기로 했다. 배 타러 가는 길에 사람이 너무 많아서 무척 걱정했는데, 마치 예원에서 그랬던 것처럼 막상 매표소 앞에는 사람이 몇 없었다. 천만다행이었다.



친화이허의 유람선 탑승 비용은 인당 100 위안. 한국 돈으로 2만 원에 가까운 비용인데, 밖에서 본 배의 비주얼은 사실 그 정도 값은 아닌 것 같다. 굳이 따지자면 정말 옛사람들이 탔을 법한 배에 가까운, 나무로 된 좌석과 좁은 공간을 가진 배. 하지만 한편 이해가 된다. 난징이라는 도시에서 관광코스로 홍보할 만한 곳 중 대표적인 곳이 바로 이 강인데, 가격이 수요와 공급을 감안해 결정됨을 생각해보면 이런 곳의 표값이 비싼 것은 당연지사다. 배를 기다리는 동안 선착장에 잠시 서 있으려니, 대기하는 사람들을 위한 의자와 테이블이 보였다. 강바람을 맞으며 잠시 기다리니, 어느덧 우리가 탈 배가 왔다고 한다.



배는 약 30분가량 강 곳곳을 떠다니며 여행객들에게 밤의 정경을 느끼게 한다. 그래도 100 위안이나 주고 보는 프로그램인 만큼 엉터리로 만들진 않아서 배에서는 난징과 친화이허, 그리고 보이는 풍경에 대해 설명하는 안내방송이 흘러나오고, 배로 지나치는 곳곳에 옛 정취를 더해주는 장치들, 예를 들면 옛사람으로 분장한 사람들의 공연 같은 것들을 간이 형식으로 볼 수 있다. 배가 워낙 좁고 의자도 불편해서 사실 표값만큼 양질의 프로그램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옛사람들이 이렇게 강에서 배를 타고 유람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색달랐다. 하지만 너무 조명으로 도배를 해놓아서 옛 건축물들이 주는 고풍스러운 느낌은 많이 절감된 것도 사실이다.


배에 같이 탄 사람들이 다들 여행의 설렘으로 조잘조잘 이야기를 나누는 터라, 배 안에서 방송해주던 내레이션의 내용을 많이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대략 그것이 친화이허가 난징 사람들에게 얼마나 중요한 강인지, 어떤 이유로 그가 난징의 어머니강이라고 불리는 것인지 등을 설명하는 것 같았다. 난징은 이곳에 '중국 최고의 역사문화의 강(中国第一历史文化名河)'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홍보를 하고 있다.


옛날 남경은 강남(江南) 문화의 상징이었다. 강남 문화를 대표하던 오나라의 수도였고, 당나라 때는 삭막한 장안(长安)에서 관직 살이 하다가 수도를 떠나는 지식인들이 으레 이곳을 찾곤 했다. 강남에는 따뜻한 기후가 있었고, 맛있는 술이 있었으며, 아름다운 여인들도 많았기 때문이다. 이백(李白), 두목(杜牧) 등 내로라하는 당나라 시인들이 남경에서 머물며 풍류를 즐기곤 했고, 이곳에서 머물며 느끼는 소회를 시로 적어냈다. 왕창령(王昌龄)이라는 시인은 이곳에서 벼슬 살이를 하며 느낀 우울감을 시로 표현하기도 했는데, 시의 영감이란 어디서 오느냐 하면 술이었다. 얼마나 자주 이곳을 찾았는지 난징시는 그가 종종 술을 마시곤 했던 곳을 고증해내서 찻집으로 열었는데, 바로 왕창령연음처(王昌龄宴饮处, 아래 첫 번째 줄 우측 사진)다.


곳곳에 있던 옛 사람 대역들. 하루 종일 이걸 하려면 힘들겠다 싶다.


하지만 아마 그 당시 이름 있는 시인들이 강을 유람하며 영감을 얻을 때 보았던 풍경은 분명 이런 화려한 조명이 곁들여진 풍경은 아니었으리라. 오히려 아래 사진과 같이(물론 이 사진도 조명이 있긴 하지만) 잔잔하고 조용하고 가옥들로 가득한 강의 풍경이 아니었을까. 라오먼동처럼 화려했던 친화이허지만 이곳에서도 역시 나의 마음을 사로잡은 건 그 수많은 사진 중 아래 사진 한 장이었다.




마이크를 든 공자(孔子) 아저씨


약 30여 분간의 뱃놀이가 끝나고 우리가 향한 곳은 푸즈먀오(夫子庙, 부자묘). 푸즈먀오와 친화이허는 같은 관광 구역 안에 속해 있어서 뱃놀이가 끝나고 내리는 곳에서 조금만 걸으면 바로 도착한다. 배가 다니던 루트에서도 이곳을 살짝 지나간다. 중국의 일반적인 관광지들은 오후 다섯 시만 되면 칼같이 닫는데, 이곳은 아무래도 야경을 보러 오는 사람이 많다 보니 밤 11시까지 개방한다. 덕분에 첫날 저녁 일정에 넣을 수 있었다. 입장료는 15 위안. 문 앞에 공자 사상의 핵심 키워드인 인(仁), 의(義), 예(禮), 지(智)를 적어둔 것이 인상적이다.



한자 독음으로 읽은 이곳의 이름은 부자묘. 이 독음만 들으면 '아버지와 아들이 묻힌 묘'인가 싶기도 하지만, 사실은 전혀 다르다. 부자묘의 '부자(夫子)'는 공자를 일컫는 여러 호칭 중 하나인 '공부자(孔夫子)'를 뜻하는 말로, '선생(先生)'의 의미이다. 여기서 선생이란 한자 뜻 그대로 '먼저 태어난 사람'이라는 의미도 있고, 학문의 경지가 높은 사람에 대한 존경의 의미도 있다. 따라서 '공부자(孔夫子)'라고 하면 공 씨 성을 가진 선생님이라는 뜻이 된다. '묘'는 무덤을 뜻하는 묘(墓)가 아니라 '사당'을 뜻하는 묘(廟)다. 즉 '부자묘', 푸즈먀오는 공자 선생님을 모시는 사당이라는 뜻이 된다. 중국어로 하면 발음이 달라 헷갈릴 일이 없으나, 한자 독음만 보면 같아 혼돈을 주곤 한다.


4대 공묘라고 하면 북경, 곡부, 길림, 남경의 공묘를 뜻하지만, 중국의 웬만한 도시에는 다 이렇게 공자를 모시는 사당이 있다. 그 호칭은 도시마다 다소 차이가 있지만 대체로 공묘(孔庙, 공자의 사당)나 문묘(文庙)인데, '문묘'는 당 현종 때 공자가 문선왕(文宣王)으로 추대된 것에서 온 이름이다. 다만 부자묘라는 이름이 붙은 곳은 난징의 그것이 유일하다. 옛날에는 공부를 하려면 공자를 무조건 모셔야 했기 때문에 공자에게 제사를 지내는 공묘는 늘 학교와 함께 있었다고 하는데, 난징의 이곳이 중국에서 제일 먼저 세워진 최고학부(学府, 요즘 말로 하면 대학교?)였고 과거를 보는 곳(江南贡院)까지 함께 있어 가장 웅장하고 중요한 곳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이런 특별한 이름을 얻지 않았나 싶다.



입구를 들어서면 가장 먼저 보이는 큼지막한 공자의 석상. 들어오고 나갈 때 항상 선생님을 보고 인사하라는 의미로 풀이된다. 그 뒤로 보이는 대성전(大成殿) 옆에는 많은 사람들의 염원이 담겨있는 기원패들이 모여 있다. 일본의 신사에 가면 있는 에마(绘马)처럼(지난 매거진 글 <카메라 상견례 여행> 참고), 중국도 사찰이나 사당에 가면 비슷한 물건을 파는 곳과 달아두는 곳이 있다. 이곳 푸즈먀오에도 장원방(状元榜), 평안복(平安福), 공명성(功名成) 등 다양한 목적에 맞는 부적을 다는 곳이 있다. 각각 학업에 성공하기를, 만사가 평안하기를, 이름을 널리 알리기를 바라는 기원이 담긴 기원패(祈愿牌)다.



중국에서 길함과 복을 상징하는 붉은색으로 된 이 수많은 기원패들을 보니 7년 전 인민대 교환학생 시절 북경 공묘에서 샀던 기원패가 생각이 난다. 그때 친하게 지내던 대학 선배가 있었는데, 사법고시를 준비 중이었다. 로스쿨이 생겨나고 사법고시 폐지가 논의되는 시점이라 합격하지 못하면 오랫동안 공부해온 것이 물거품이 될지도 모르는 안타까운 상황이었다. 그때 나는 북경에서의 교환학생 기간이 거의 끝나가는 상황이라 한국의 지인들에게 뭘 사가면 좋을지 고민하던 중이었다. 이 선배도 선물을 사주고 싶은 지인 중 한 명이었다.


그러던 중, 중국인 친구가 그 선배의 상황을 듣더니, 공묘(孔庙)에 가서 기원패를 사가는 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사실 일종의 부적 같은 거라 좀 미신 같긴 해도, 그 선배가 꼭 붙었으면 좋겠다는 기원의 의미도 담을 수 있고, 마음을 써서 선물을 준비했다는 느낌도 줄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북경에 있는 동안 가보지 않았던 공묘에 가서 구경도 하고, 영험이 있다는 공묘의 기원패를 사서 그 선배에게 선물했다. 그 마음이 통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다음 해인가 그 선배는 사법고시에 합격을 했고, 지금 그가 하고 싶었던 분야에서 법조인으로서 활약하고 있다.



만세에 길이 남을 스승의 모범. 만세사표(万世师表)로 추존되고 있는 공자의 사당. 푸즈먀오 안에는 온통 공자가 제자에게 가르쳤던 말로 전해지는 <논어(论语)> 속 구절들이 적힌 편액(扁額)들로 장식되어 있다. 또 동남지역의 가장 큰 학교라는 뜻의 동남제일학(东南第一学)이라는 편액도 있다. 이곳을 찾는 많은 중국인들은 본인의, 자식의, 혹은 지인의 학업적인 성공을 기원하며 마음을 담은 기원패를 단다.


중국인들에게 공자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곳에 오면 현대 중국인들에게 공자란 학업운을 상징하는 인물인 것처럼 느껴진다. 마치 관우가 중국인들에게 재물을 상징하는 인물이 되었듯이. 물론 중국에서는 중국의 문화나 언어를 전파할 목적으로 세운 아카데미에 '공자학원(孔子学院)'이라는 이름을 붙일 정도로 공자를 그 문화의 얼굴마담으로 생각하고 있지만, 문화 대혁명 때 그들이 공자를 위시한 유교문화에 대해 벌였던 만행을 생각하면 이 모든 것이 그저 체제 유지를 위한 취사선택이 아니었나 싶은 생각이 든다.


궁금해서 문화 대혁명 때 이곳에서 어떤 일이 있었나 찾아보니, 불행인지 다행인지 문화 대혁명을 겪기도 전인 중일전쟁 때 이곳은 일본군에 의해 완전히 파괴되었다고 한다. 그 후 복구되지 못하고 있다가 80년대에 이르러서야 복구작업을 진행했다고 하니, 그나마 본인들 손으로 무너뜨리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혹시 동전이 가지고 싶은 건 아니지?


푸즈먀오 뿐 아니라 이후 곳곳의 지역연구를 진행하면서 위와 같은 풍경을 아주 자주 접했다. 물이 담겨있는 항아리나 연못만 있으면 거기에 동전들이 그렇게 쌓여있다. 심지어 푸즈먀오에는 접시마다 소원의 유형이 적혀있고, 원하는 소원에 동전을 던져 넣게까지 되어 있다. 이쯤 되면 혹시 관광 수입을 위해 일부러 그러는 건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들기는 하는데, 설마 그렇게까지 악랄하지 않을 것이라고, 인간의 본성을 믿어 본다.



푸즈먀오 내부를 거의 다 보고 이제 슬슬 나가볼까 하는 찰나, 밖이 시끌시끌하다. 상황을 보아하니 공자와 그 제자의 이야기를 가지고 짤막한 연출을 준비한 것 같았다. 공자 선생님의 등장부터 연출은 시작되는데, 슬프게도 우리는 보고 말았다. 공자 역할을 맡은 배우님의 마이크를. 그는 마이크를 뒤로 숨긴 채로 성큼성큼 계단을 올라가 무언가 대사를 했다. 마이크를 들고 연기를 하는 공자 선생님은 너무 낯설었다. 게다가 너무 젊은 배우를 쓴 것은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들었다. 문득 친화이허 뱃놀이 때 강변에서 열심히 무언가를 연기하던 수많은 아르바이트생들이 생각이 났다. 여기서 이렇게 야간 연출을 연기하면 고생한 만큼 수당은 배로 받을까? 마이크 때문인지 연출에 집중은 안 되고, 그냥 이런 생각만 머릿속을 맴돌았다.



계화떡과 난징


푸즈먀오 참관을 끝내고 밖으로 나오니 밤 9시가 넘은 시간. 첫 지역연구의 첫날 맞이하는 밤이었던 지라 그냥 들어가기 좀 아쉬운 마음에 간단히 주전부리나 사 먹어볼 생각으로 푸즈먀오 근처의 상가 거리에 가 봤다. 사실 여기서 목표로 하던 것이 하나 있었는데, 그건 바로 계화떡(桂花糕). 계수나무 꽃으로 만든 떡이라고 했는데, 난징에 계수나무가 많아 계화떡이 유명하다고 들었다. 마침 거리에 있던 주전부리 파는 상점에 계화떡을 팔고 있어서 한 번 사 먹어 봤다. 하나만 먹긴 좀 아쉬우니 자극적인 꼬치구이도 함께.



아, 계화떡. 그것은 아무 맛도 나질 않았다. 꼬치구이를 사길 잘했다는 생각을 속으로 백 번 넘게 했다. 계화떡을 묘사하면 백설기보다 포슬포슬한 떡에 약간의 꿀을 바르고 거기에 계수나무 꽃 말린 것을 위에 뿌려놓은 것인데, 아쉽게도 떡의 질감도 익숙하지 않은 느낌이었고 꿀도 너무 적게 발라져 있어서 단 맛이 거의 나질 않았다. 간단히 말하면 꽃 향이 나는 아무 맛도 나지 않는 떡이랄까? 지금 보니 계수나무 꽃은 10월에 가장 향이 강하다는데, 혹시 10월에 먹었다면 좀 달라졌을까?


그러나 난징 첫날의 일정을 돌이켜보니, 계화떡의 삼삼함이 오히려 난징의 진짜 모습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꾸미지 않은 수수함, 은은한 향만 맴도는 그런 도시. 낮의 친화이허, 중화문의 그 모습처럼. 하지만 난징을 찾는 사람들이 원하는 건 꼬치구이 같이 향신료가 잔뜩 뿌려져 있고 자극적인 모습이었고, 그 수요에 부합하기 위해 고도(古都)의 우아한 이미지를 일정 정도 포기하고 레이저와 각종 조명을 사용해서 치장했던 것은 아닌가. 그 결과는 우리들이 계화떡보다 꼬치구이를 더 선호했던 것처럼 성공적이었고, 그것이 지금의 푸즈먀오, 친화이허를 만든 것이 아닌가 하는.


고대 난징의 모습을 보고자 했던 난징의 1일차, 우리는 결국 현대를 사는 사람들이 보고 싶어 했던 고대 난징의 모습만을 발견할 수 있었다.



[난징 1일차 일정]


 [중문 일기 in 위챗 모멘트(朋友圈)]

(譯) 난징은 내가 고등학교 1학년 때, 처음으로 외국 여행을 왔던 곳이다. 내 '중국 인생'의 시발점이라고 할 수 있겠다. 첫 지역연구 목적지를 이곳으로 잡은 것도, 난징이 내게 있어 이렇게 큰 의의를 가진 곳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난징 첫날을 무척 충실하게 보냈다. 다리가 좀 아프긴 하지만..

[사진 1&2] 상해역에서는 쑤선생(苏先生, <랑야방> 속 후거가 연기한 인물)이 나를 반기고, 난징역에서는 니황(霓凰, <랑야방> 속 리우타오가 연기한 인물)이 나를 반기네. 징왕전하(靖王殿下, <랑야방> 속 왕카이가 연기한 인물)만 없다.....ㅠㅠ

[사진 3] 사연 있는 야시에펀스탕(鸭血粉丝汤).. 나 고수 먹을 수 있게 된 것 같다.

[사진 4&5] 난징의 어머니강, 친화이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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