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징(南京) 지역연구 2일차 (1)
화려한 조명과 야경으로 가득한 난징에서의 첫날을 보내고, 둘째날 오전은 '난징'이라는 도시를 말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건, '난징대학살'을 다루는 기념관에 가기로 했다. 숙소에서 지하철을 타고 두 정거장 가서 윈진루(云锦路) 역에 내려서 조금 걸으면 바로 도착한다.
한국에는 '난징대학살 기념관'으로 알려져 있는데, 생각해보면 '난징대학살' 같은 슬프고 잔인한 역사적 사건과 '기념관'이라는 단어는 어쩐지 어울리질 않는다. 이곳에 도착하고서야 알게 된 것인데 이곳의 정식 명칭은 '침화일군남경대도살우난동포기념관(侵华日军南京大屠杀遇难同胞纪念馆)'이었다. 해석하면 '중국을 침략한 일본군이 남경에서 벌인 대학살에 의해 어려움을 겪은 동포들을 기념하는 곳'이다. 물론 이름이 너무 기니 중국인들도 남경대학살기념관(南京大屠杀纪念馆)이라고 부른다. 이쯤 되니 어쩌면 기념(纪念)이라는 말속에는 딱히 가치판단이 들어있지 않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옛날에 벌어진 일과 그로 인해 피해를 입은 동포들을 절대 잊지 말자는 의미만이 담겨있는 것 같다.
아침 8시 30분이면 개관하는 이곳은 입장료가 없다. 공자의 사당 부자묘도 입장료가 있는데 여기는 없다. 남경에서 2박 3일을 보내면서 입장료가 없는 곳이 딱 두 군데 있었는데, 이 기념관과 쑨원의 묘가 있는 중산릉이었다. 입장료가 없다는 것은 대중이 이곳을 참관하는 데 그 어떤 제약도 두지 않겠다는 의미이며, 그러니 기회가 되면 꼭 와보라는 의미이다. 중국 정부가 이 두 곳에 대해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보이는 대목이다.
19년 4월 우리가 갔을 때 이곳은 당일에 별도의 매표나 예약 절차 없이 들어갈 수 있었는데, 이 글을 쓰면서 다시 찾아보니 최근에 정책이 바뀐 것 같다. 이제 이곳 이름으로 된 위챗 공중호(公众号)에서 방문시간대에 따라 예약을 하고, 그것을 근거로 입장이 가능한 것 같으니 혹시 난징 여행 시 이곳을 방문하고자 한다면 미리 알아보는 것이 좋겠다.
또 중국에서는 이런 기념관이나 박물관 중에서 월요일이 정기휴무인 경우가 많다. 보통 주말에 참관객이 많기 때문에 월요일엔 지난 한 주동안 다녀간 사람들의 흔적을 정리하고 새로운 한 주를 맞이할 준비를 한다. 대부분의 곳이 이 정책을 취하기 때문에, 따라서 중국 여행인데 월요일이 껴있을 경우에는 웬만하면 월요일에는 기념관이나 박물관을 일정에 넣지 않는 것이 좋다.
기념관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입구로 가는 길에는 이렇게 다양한 조각상들이 놓여 있다. 난징대학살의 피해를 겪은 민간인들의 모습을 예술로서 승화시킨 작품들이다. 그중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하늘을 향해 서 있는 여성의 동상에 붙어있는 제목은 <가파인망(家破人亡)>. 가정이 깨지고, 사람도 죽었다는 뜻이다. 절망 가득한 표정으로 하늘을 바라보고 서 있는 그 모습에 잠시 할 말을 잃는다.
난징대학살이라는 역사적 사건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이나 소개는 굳이 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영화 <진링의 13소녀(金陵十三钗)>나 <난징! 난징!(南京! 南京!)>으로 간접적으로나마 경험할 수 있다. 그 피해규모에 대해서는 국가별로, 이익집단별로 주장이 다르지만, 어쨌든 일본군이 중국 난징이라는 도시에서 사람들을 무차별 살해했던 사건 자체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일본 역시 최근에는 그런 사실이 있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인정하고 있다.
일본군이 난징에 들어와 사람들을 죽이고 건물들을 파괴한 지역은 사진을 보면 알 수 있다. 총알 자국이 있는 곳들이 격전지인데, 심지어는 안전구역으로 지정된 곳까지 총알 자국이 나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전날 우리가 둘러보았던 중화문(中华门), 푸즈먀오(夫子庙)도 그 격전지에 해당한다. 푸즈먀오는 이 공격으로 완전히 파괴당한 일이 있다.
기념관 안에는 난징 대학살이 벌어졌던 사건의 경과와 그 피해 규모, 일본군이 자행했던 각종 행위들이 아주 상세하게 구성되어 있다. 어떤 구역은 너무 잔인해서 차마 열심히 볼 수 없어 그냥 넘어간 구역도 있었다. 사건이 벌어질 당시 난징에는 외국인들이 꽤 있었고, 이들은 그 신분의 특수성 때문에 공격 대상이 되지 않는 점을 활용하여 난징의 모습들을 카메라로 열심히 기록했다. 그래서일까? 이곳은 무고한 희생자들과 관련된 사실을 가감 없이 보여주는 것뿐 아니라, 당시 난징에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던 국가들에 감사하는 내용도 많았다.
앞서 그 피해규모에 대해서는 집단마다 주장이 다르다고 했는데, 중국 정부가 난징 대학살의 피해규모로 공식 주장하는 숫자는 삼십만 명이다. 그래서 기념관 곳곳에서 300,000이라는 숫자를 볼 수 있다.
'역사는 역사고, 사실은 사실이다.' 기념관의 맺음말에 적혀있던 문장이었다. 그 어떤 내용보다 무거운 전시 내용을 다 보고 나오면 밖에서 우리를 기다리는 것은 평화를 상징하는 동상. 중국 정부가 말하고 싶었던 가장 중요한 한 마디가 저 말이 아니었을까. 적어도 벌어졌던 사실만은 인정하자. 잘못을 했다면 인정하고 진심을 다해 사과하자.
전시관을 처음부터 끝까지 둘러보는 동안 사실 많이 괴로웠다. 19년의 나는 05년 처음으로 이곳에 왔을 때보다 중국어를 훨씬 잘하는 상태였고, 차라리 모르고 못 알아듣는 편이 마음 편했을 전시 내용을 다 읽고 이해할 수 있게 되었으므로. 하지만 다 보고 나오는 길에 마주친 평화의 상을 보자 이런 생각이 들었다. 결국 전시관을 무료로 대중에게 개방하고 이런 전시를 보게 하는 것은, 방문자로 하여금 어떤 특정 집단에 대한 분노의 마음을 갖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런 참담한 사건이 있었다는 사실을 잊지 말고 평화로운 공존을 위해 노력하자는 의미이지 않을까 하는.
난징의 참혹한 근대사를 뒤로 하고, 우리가 향한 곳은 난징 요리를 전문으로 하는 음식점 난징따파이당(南京大牌档). 본래 중국어로 따파이당(大牌档,大排档)이라 하면 우리나라의 포장마차나 야시장과 같은 느낌의, 좌판을 늘어놓고 음식을 파는 곳을 의미하는데, 이 식당은 그런 포장마차 같은 서민적인 음식들을 파는 분위기 속에서 난징 특색 요리들을 선보이고 있다. 난징 요리는 중국 8대 요리 계통(中国八大菜系) 중 강소성 요리, 즉 쑤차이(苏菜)에 속하는데, 자극적이지 않으면서 삼삼하고 약간 단 맛이 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중에서도 강소성의 가장 번화한 도시였던 난징의 요리는 특별히 진링차이(金陵菜)라고 하여 별도로 카테고리를 하나 만들어둘 정도로 그 특징이 뚜렷하다.
사실 이날 점심은 다소 특별한 자리였다. 지난 매거진 글에서 언급했듯, 난징 지역연구 일정을 짤 때 여러모로 열정적으로 조언을 해주었던 친구가 있었는데, 그 친구를 초대해서 같이 밥을 먹는 자리였기 때문이다. 본인의 일도 아니고 그 어떤 이해관계도 없는데 팔 걷고 많은 도움을 주어서 고마운 마음에 일행들의 동의를 받고 밥 한 끼 대접하기로 했다. 우리가 사는 밥인데 친구는 식당을 난징 요릿집으로 잡았다. 난징 요리는 질리도록 먹었을 것 같은데.. 고향인 난징에 와준 한국인 친구들을 위해 한 끼를 양보한 셈이다. 위챗 공중호(公众号)를 통해 예약이 가능하다면서, 다음 일정인 명효릉에서 가까운 곳에 있는 지점을 집어서 알려준다. 그게 바로 난징따파이당 중산릉점. 앞의 일정이 다소 밀려서 약속시간보다 좀 늦게 도착했는데 친구가 미리 도착해서 좋은 자리도 미리 맡아주었다.
사실 난징의 전통 요리를 맛볼 수 있다는 점 외에 이 식당의 특징이 하나 더 있는데, 그건 바로 강남지방 공연예술의 하나인 평탄(评弹) 공연을 보며 식사를 할 수 있다는 점이다. 특별히 정해진 시간은 없는 것 같고, 식사가 한참 진행되는 정오, 저녁 6시쯤 공연이 진행된다. 평탄이 가장 유명한 지역은 쑤저우(苏州)지만, 비슷한 방언(吴方言)을 쓰는 강소성, 절강성, 상하이까지도 그 유행 지역에 포함시킬 수 있기 때문에 난징에서 봐도 전통과 부합한다고 할 수 있다.
난징 토박이인 친구의 추천 메뉴 몇 가지와 전날 고수 향 가득한 야시에펀스탕에 겁에 질린 오빠들을 위한 안전한 메뉴 몇 가지를 섞어서 주문을 완료했다. 중국에 있던 1년 동안 정말 열심히 갈고닦았지만 지금 생각해도 어려운 일이 바로 여러 명이 식당에 갔을 때 적절한 배합으로 요리를 주문하는 것인데, 이럴 때만은 역시 현지화라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실감한다. 한편으론 한국에서도 식당에 가면 능숙하게 주문을 못하는데 외국에서 잘하는 게 이상한 거 아닌가 싶긴 하다.
난징에 왔으니 일단 시켜야 할 것은, 지역 맥주인 진링맥주(金陵啤酒). 중국은 지역마다 그 지역에서만 파는 독특한 맥주가 있는데, 지역연구 때마다 그 지역의 술을 시켜보는 것만큼 즐거운 일이 없다. 사실 한 자리에 놓고 모두 비교해본 것이 아니라서 맛이 어떻게 다르다고 구체적으로 말하긴 어렵지만, 이런 건 다 기분이 아니겠는가.
요리는 지금 생각하면 좀 균형이 안 맞는 조합인데, 우선 고기 요리로는 오리고기가 유명한 난징의 대표적인 오리 요리 옌수이야(盐水鸭)와 진링카오야(金陵烤鸭)를 시켰고, 오빠들이 궁금해한 바오빙니우러우송(薄饼牛肉松, 얇은 밀전병에 잘게 썰은 소고기 야채볶음을 싸서 먹는 요리)도 시켰다. 또 돼지곱창을 볶은 요리를 하나 시킨 것 같은데 이름은 못 찾았다. 야채 요리로는 연근 요리가 유명한 지역이니만큼 미즈오우(蜜汁藕, 연근을 꿀물에 졸인 조림)를 시켰다. 언제 어디서나 안전한 새우 마늘구이도 시켰다. 그리고 마지막 디저트류로 탕위먀오(古法糖芋苗, 시럽 농도의 단 물에 토란으로 만든 완자를 넣은 디저트)를 시켰다.
복기하면 전체적으로 고기가 너무 많고 야채가 좀 부족한 메뉴 선택이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난징에 가면 꼭 각종 오리 요리를 먹어보라고 하는데, 생각해보면 난징 토박이와 난징 요리를 먹을 일이 일정 중 이번 한 번 뿐이라 이번에 모두 시켜볼 수밖에 없었다. 결론적으론 정말 이 한 끼로 난징의 유명 요리를 모두 다 먹어볼 수 있었고, 다른 끼니는 다른 지역 요리를 파는 식당에서 먹어도 되게 되었다. (그만큼 많이 먹었단 얘기..)
난징의 오리 요리는 그 식감으로 보면 삶은 오리고기에 가깝다. 옌수이야(盐水鸭)야 그 이름대로 소금물에 졸여낸, 혹은 삶아낸 오리이니 그럴 거라고 생각했지만, 심지어 오리구이라는 이름이 붙은 진링카오야(金陵烤鸭)마저 그런 축축한 느낌일 줄은 생각도 못했다. 그저 '북경에 카오야가 있는데 왜 난징에도 같은 카오야가 또 있지?'라는 생각만 했을 뿐. 생각해보면 북경보다 남경 사람들이 좀 더 부들부들하고 달콤하고 짭조름한 맛을 좋아해서 이런 요리가 발달하지 않았나 싶긴 한데, 개인적으로는 북경의 카오야가 입맛에 더 맞았다.
사실 이 집의 가장 시그니쳐 메뉴는 또우쟝과 마를 함께 갈아 만든 죽인 민궈메이링저우(民国美龄粥, 민국미령죽)인데, 아쉽게도 우리가 갔을 땐 이미 품절이라 먹지 못했다. 장개석의 부인인 쑹메이링이 입맛이 없을 때 이 죽을 먹고 입맛이 되살아났다는 전설의 죽인데, 우리는 입맛이 없어지질 않아서 죽이 우리에게 기회를 주지 않았나 보다.
식사가 거의 끝나가자 원래 우리가 사기로 한 자리인데 자꾸 이 친구가 계산을 하려는 듯한 움직임을 보인다. 거래선과 식사할 때의 기지를 발휘해야 할 때가 된 것 같다. 그것은 바로 화장실 가는 척하고 계산하기 신공! 슬쩍 자리를 벗어나 카운터에서 먼저 계산을 완료하고 자리로 돌아왔다. 슬슬 다음 일정으로 가려고 짐을 다 챙기고 나가려는데 친구가 그때서야 카운터에서 이미 계산이 완료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신세를 많이 졌으니 고마운 마음에 우리가 사려고 했다고 한참을 이야기하고서야 친구는 현실을 받아들인다.
중국 친구들은 보통 고향에 온 친구에게 절대 밥을 사게 하지 않는다. 사실 그 친구 입장에서 보면 내가 체면을 세워주지 않은 셈이지만, 친구이기 이전에 회사일로 만난 사이라 얻어먹는 일은 만들지 않는 편이 좋겠다는 생각에서 그런 것이다. 친구는 식사 대접 작전이 실패로 돌아간 대신 간식으로 먹으라고 난징에서 핫하다는 빵집에서 샀다는 과자를 내민다. 이것마저 거절할 수는 없어 받아 들었다. 그래도 상해에서 난징으로 왔다는 말에 버선발로 나와 만나준 고마운 친구다.
난징 요리로 배도 채우고, 친구의 따뜻한 마음으로 마음의 양식도 채운 우리는 일행과 함께 오후 일정을 시작하러 길을 나섰다. 둘째날 오후 일정은 사실 난징 지역연구 일정 중에서 그다지 기대를 하지 않았던 일정이었다. 남의 무덤만 잔뜩 구경하는 일정이었기 때문이다. 무덤 구경이라 하면 으레 떠올리게 되는 것이 한국에서 수학여행 가면 지겹도록 보는 고분군이나 왕릉 같은 것인데, 나와 혈연관계없는 누군가의 묘역을 참관하는 것이 그다지 재미있게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난징을 간다고 하니 만나는 사람들이 다 꼭 이 무덤 구경을 해야 한단다. 대체 왜 그런 건지 궁금해서 일단 일정에 넣기는 했는데, 문제는 여기가 산을 끼고 있는 지역이고 규모가 엄청나서 반나절은 무조건 잡아야 했다. 여행 일정을 짤 때 이런 곳이 있으면 여간 성가신 것이 아니다.
이 지역의 정식 명칭은 중산풍경명승구(钟山风景名胜区). 이곳에 위치한 산의 이름이 중산(钟山, 자금산紫金山이라고도 함)이라서 붙여진 이름이다. 중산풍경명승구로 묶여 있는 이 지역 안에는 두 묘역이 포함되어 있는데, 하나는 명나라 초대 황제 주원장의 무덤인 명효릉(明孝陵)이고, 또 하나는 중화민국의 국부 손중산(쑨원)의 묘인 중산릉(中山陵)이다. 중국 역사에서 중요한 인물의 묘역이 둘씩이나 위치해서일까? 이곳은 중국의 그 수많은 관광지 중 가장 먼저 국가 지정을 받은 관광지이자, 처음으로 5A라는 등급이 매겨진 곳이다.
역사적인 인물의 무덤이 두 곳이나 있다 보니 이곳은 무척 넓은 면적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각 관광 스팟별 요금 정책이나 관람 정책도 달라서 꼭 미리 확인을 하고 와야 한다. 앞서 난징대학살기념관과 중산릉은 입장료가 무료라고 했는데(입장료가 없는 대신 사전 예약을 꼭 해야 한다), 명효릉과 기타 스팟들, 관광 스팟 사이를 오가는 셔틀 등은 이용료가 있다. 한꺼번에 묶어서 입장권을 파는 롄퍄오(联票)도 있으니, 시간을 넉넉하게 하고 관람하는 경우에는 롄퍄오로 끊어도 될 것 같다. 우리는 큰 필요성을 느끼지 못해 따로따로 구매하였다.
점심을 먹은 식당에서 나오면 바로 중산풍경명승구로 들어가는 셔틀버스 정류장이 나온다. 알고 보니 친구가 이런 점까지 생각해서 이곳으로 약속 장소를 잡은 것이었다. 또 한 번, '집에 있을 땐 부모에게 의지하고, 밖에 나가서는 친구에게 기대라(在家靠父母,出门靠朋友)'는 중국의 속담을 마음으로 느낀다. 셔틀버스 탑승을 위한 입장권을 사고,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으니 셔틀이 속속 정류장으로 온다. 어떤 건 푸른 간이 차량이고, 어떤 건 열차같이 생긴 차량이다. 뭘 타느냐는 랜덤인 것 같았다. 내심 후자가 걸리기를 바라고 있었는데, 운이 좋다.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아이들도 나와 같은 마음이었는지 신이 났다.
4월 12일의 난징은 이미 봄기운이 가득하여 한낮에는 가디건도 필요 없을 정도의 온도였다. 입구에 마침 셔틀이 보이기도 하고, 안이 무척 크니까 걸어가는 건 무리라는 친구의 조언도 있고 해서 아무 생각 없이 일단 셔틀에 몸을 실었는데, 셔틀 안에서 밖을 바라보니 수많은 중국인들이 자전거도 타고, 걷기도 하고, 여유롭게 산책을 즐기며 이동하고 있었다. 참 건강하게 산다. 셔틀이 가는 길에 온통 플라타너스가 심어져 있어 상해 조계지를 연상시킨다.
셔틀에서 내렸다. 이때만 해도 몰랐다. 이 셔틀은 중산릉까지 우리를 데려다주는 셔틀이라는 걸. 사실 중산릉 예약 시간이 4시 30분이었던 우리는 그전까지 명효릉을 먼저 좀 참관하고, 시간이 될 때쯤에 중산릉에 갈 계획이었다. 그런데 셔틀은 아직 입장 자격이 없는 우리를 중산릉까지 데려다준 것이다. 설상가상 초행길이라 어찌 된 상황인지 잘 몰랐던 우리는 일단 셔틀을 내리자마자 사람들의 발이 향하는 곳을 따라 걷기 시작했고, 이런 장면을 목격하게 된다.
그때 시간은 3시 50분. 이렇게 되면 인간은 일단 희망 회로를 돌리게 되어 있다. 내심 이런 생각을 했다. '에이~ 그래도 시간 얼마 차이 안 나는데 예약한 이력만 있으면 그냥 들여보내 주지 않을까?' 희망을 갖고 휴대전화를 꺼내 예약된 화면 스크린샷을 켜 둔다. 두근두근. 차례가 되어 예약 화면을 보여주자, 직원이 하는 말.
"4시 30분부터 입장 가능합니다. 그때 다시 오세요."
아, 중국을 너무 얕봤다. 사실 중산릉이 입장료는 무료지만 철저한 사전 예약제로 운영되는 이유는 그 참관인원수를 통제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니 우리 같이 먼저 왔다고 먼저 들여보내 달라는 사람은 당연히 못 들어가지. 어쩔 수 없다. 40분을 때우기 위해서라도 주원장의 무덤을 보러 가야겠다. 어떻게 가냐고? 도보로. 이것이 바로 리얼 현지화!
흐르는 강물을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는 연어의 심정으로, 방금 셔틀을 타고 바람을 맞으며 신나게 올라온 그 길을 다시 내려가는 기분은 이루 말할 수 없이 고독했다. 그나마 햇볕이 좋고 초록빛 풍경이 우리를 맞이해줬기에 한결 나았지만. 내리막을 따라 조금 걷다 보니 명효릉 쪽으로 가는 샛길이 나온다. 우리와 비슷하게 잘못 온 사람들이 좀 있었는지, 여기서부턴 그래도 좀 덜 외로웠다. 걷다 보니 슬슬 희망이 보인다.
멀리서 봐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 것 같은 붉은 벽과 황금빛 지붕. 저것은 황제의 색이다. 이곳이 바로 명효릉의 정문, 문무방문(文武方门). 이곳을 들어가면 명효릉 묘역으로 진입한 셈이다. 아차, 어떻게 이곳에 오게 된 지를 설명하느라 명효릉이 어떤 곳인지 소개하는 것을 잊었다. 앞서 간략하게 언급한 것처럼 이곳은 명나라 초대 황제 태조 주원장(朱元璋)과 그 부인 효자고황후(孝慈高皇后) 마 씨의 합장 무덤이다. 부인이 먼저 세상을 떠나 이곳에 묻히게 된 것이라 그 이름을 따 효릉이라고 명명되었다. 당시 명나라의 수도인 응천부(应天府)가 난징이었기 때문에 주원장과 그 첫째 아들의 무덤은 난징에 위치해 있다. 그러나 이후 순천부(顺天府, 지금의 북경)로 천도를 하면서 후대 황제들의 무덤은 대부분 북경에 있는데, 이것이 북경에 있는 명13릉이다.
몇 개의 문을 지나면 이렇게 효릉(孝陵)이라고 적힌 거대한 건물 하나가 나타난다. 이곳이 바로 명효릉의 본체인 방성(方城). 여기 들어가면 메인 건물인 명루(明楼)로 올라갈 수 있다. 참고로 명효릉은 산을 의지하고 만든 무덤이라 메인 건물도 거의 봉우리 꼭대기에 있다. 계단을 아주 많이 마주해야 한다. 하지만 막상 여기까지 들어오면 도중에 그만두기는 너무 아깝다는 생각이 들 수 있으니, 꼭 편한 신발과 편한 복장으로 오기를 추천한다. 명효릉 때문만은 아니다. 중산릉도 무지하게 높다. 암튼, 그렇게 열심히 올라가서 보이는 풍경이 이것.
대충 이 정도 길을 다시 내려가야 다음 목적지인 중산릉으로 갈 수 있단 소리. 일단 앞으로 다가올 고난을 생각하기보단 눈앞의 탁 트인 풍경을 생각하기로 하고, 카메라에 몇 컷 담아본다. 사실 큰 감흥은 없다. 몇백 년 전에 세상을 떠난, 그것도 남의 나라 황제의 무덤에서 어떤 큰 깨달음을 얻으리라 기대하는 것이 더 이상하다. 굳이 찾자면, 이렇게 높은 산에 자신의 묘지를 마련해서 국토를 굽어다보려는 주원장의 마음... 정도? 이 역시 내 마음대로 생각해낸 것이다. 사실이 어떤지는 모른다.
한편으론 이런 생각을 해본다. 중국인들에게는 이곳이 어떻게 느껴질까? 14억 중국인의 마음을 다 들여다볼 순 없으니, 그들을 대표하는 중국 정부의 입장에서 보면, 이곳은 더할 나위 없이 중요한 유적지다. 명나라가 어떤 나라인가? 중국 인구의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한족(汉族)이 세운 마지막 황조다. 명이 멸망한 이후 청이 들어서면서는 만주족이 그 지배권을 잡았고, 한족은 일개 소수민족에 불과했던 만주족의 지배를 받는 피지배계층으로 전락한다. 그리고 그 청이 완전히 무너졌을 때, 쑨원은 효릉을 참배한다. 명확하게 밝혀지진 않았지만 그 속내에는, 한족이 소수민족의 지배를 받는 영욕의 세월을 벗어나 드디어 명의 정통성을 이어 새로운 국가를 만들어냈다는 생각이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생각이 지금의 중국 정부에까지도 이어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듯 명효릉이 있는 중산풍경구는 중국에서 처음으로 지정된 문화유적지다.
사실 오늘날까지도 극히 보수적인 중국의 역사가들은 한족 중심 사관을 가지고 명나라의 역사만을 인정하기도 한다. 대놓고 말은 안 하지만 사실 북경의 수도로서의 정통성도 좀 부족하다. 요즘 들어 자꾸 중국이 서안과 당, 송 시대를 강조하는 것도 그 근본 원인을 파헤쳐보면 한족 중심의 문화를 더 공고히 하려는 목적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난징이, 명효릉이, 무섭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