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을 들여야만 맛이 나는 것

시안(西安) 지역연구 4일차

by 볕이드는창가

한 땀 한 땀 만들어낸 종이 그림자, 피영희(皮影戏)


마펑워(马蜂窝)라는 어플이 있다. 여행 관련해서 공략이나 리뷰 등이 많은 중국 어플인데, 이전에는 많이 참고하진 않았었다. 하지만 본격적인 지역연구 시즌이 되고, 장기간 동일 지역에 투숙하거나 가본 적 없는 지역에 갈 일이 생기면서 이 어플을 참고할 일이 많아졌다. 개인적으로 많이 도움을 받았던 부분은 도시를 설정한 뒤 나오는 ‘놀 곳(景点玩乐)’ 메뉴였다. 완전히 처음 가보는 도시일 경우에도 도움이 되었지만, 시안처럼 간 적이 있는 도시여도 새롭게 가볼 곳을 찾는 데 좋았다.


이날 가게 된 고가대원(高家大院)도 마찬가지다. 도시를 시안으로 설정한 뒤 찾다가 발견한 400년 가까이 된 고택. 그중에서 나의 눈길을 끌었던 것은 여기서 정시마다 그림자극(皮影戏)을 한다는 사실이었다. 무형문화유산의 보존 차원에서 하는 공연이었는데, 중국에서 아직 정식으로 그림자극을 본 적이 없었던 터라 보기로 했다. 고가대원까지는 지하철로 이동. 탑승권에 쓰인 실크로드 문구가 인상적이다.



고가대원에 도착해 우선 그림자극 표를 샀다. 정시마다 공연을 하는데 공연 시작 시간이 거의 임박했기 때문이다. 입장료 15위안에 공연 관람료 역시 15위안. 한화로 3천 원 정도 하는 가격이라 부담 없이 볼만하다. 공연을 기다리며 무대 앞에 앉으니 무대 구석에 그림자극에 쓰이는 인형으로 보이는 것들이 나무 막대에 붙어 걸려있는 모습이 보였다.



오늘 공연의 주제는 ‘백골요괴를 세 번 때리다(三打白骨精)'라는 내용의 서유기 속 이야기. 아무래도 연령이나 성별을 불문하는 불특정 다수 관객이 오는 공연장이다 보니 주제도 중국인이라면 모두 알법한 주제로 선정하는 게 아닌가 싶다. 실제로 이날 공연장에는 소풍온 듯한 아이들과 패키지여행을 온듯한 어르신들이 함께했다.



공연 시작 전 무대 옆에 보였던 그 나무막대가 매달린 종이인형들이 무대에 등장해 진행되는 그림자극이다. 대사가 잘 들리지 않아도 괜찮다. 무대 위 전광판에 대사가 다 나오니 언어만 된다면 이야기를 따라가는 데는 문제가 없다. 서유기야 나도 익숙한 이야기고 하다 보니 나름대로 재미있게 관람했다. 그림자극이라 하면 손으로 나비나 늑대, 토끼나 만들 줄 알았던지라 정교하게 꾸며진 종이인형 소품들이 신기하게 느껴졌다. 관람이 끝나면 건물 내에 있는 피영희 박물관을 구경할 수 있는데, 박물관이라 하지만 작은 소품점처럼 아기자기한 규모다.



그림자극을 관람하고 나와 정식으로 고가대원을 돌아봤다. 고씨 댁(高府)이라 적힌 홍등이 인상적이다. 방목하여 기르는듯한 거위와 닭들도 신기했다. 실제 이 집과 그림자극이 얼마나 연관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고택과 무형문화유산을 엮어 관광 요소로 사용한 것은 좋은 아이디어인듯하다.



으슬으슬 추울 땐, 양고기 파오모(羊肉泡馍)


고가대원을 본 뒤 숙소 근처로 돌아와 점심을 먹었다. 예전 학과 답사로 서안에 왔을 때 회족 거리에서 파오모라는 회족 음식을 먹었던 게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었는데 이번 지역연구에 기회가 되질 않아 못 먹고 있다가 숙소 근처에 파오모로 유명한 집이 있다 하여 방문했다. 통셩샹(同盛祥)이라는 가게였는데, 회족 요리를 파는 곳으로 유명한 집인 듯했다.



파오모(泡馍)의 ‘파오泡’는 물에 담근다는 뜻이다. '모馍'는 앞서 로우쟈모(肉夹馍) 설명할 때 얘기했던 넓적한 빵이니 파오모는 모를 물에 담가 먹는 요리를 뜻한다. 양고기 파오모는 양고기 탕에 모를 넣은 음식이라 으슬으슬 추운 날 더욱 먹고 싶어지는 요리였다. 간단한 채소 요리와 소고기빵(페이스트리에 가깝다), 그리고 양고기 파오모를 시켰더니 위 사진처럼 그릇과 모馍 두 덩이가 나왔다. 직접 모를 찢어놓고 종업원을 부르면 탕을 부어주는 시스템인 듯했다. 나름 예전에 해봤다고 모를 손으로 큼직큼직 찢고 난 뒤 종업원을 불렀다. 종업원은 나와 일행의 그릇을 보더니 혀를 차며 자기가 해주겠다고 하고 다시 그릇을 가져갔다.



위 사진이 빼앗긴 후 다시 돌아온 파오모다. 잘게 찢은 모 조각들 사이에 내가 대충대충 찢어놓은 모 조각들이 보인다. 생각해 보면 우리로 치면 토렴한 순대국밥이나 콩나물국밥처럼 후룩후룩 마시듯 먹어야 하는 요리가 파오모인데 처음 내가 했던 것처럼 모를 크게 찢어 넣으면 확실히 먹을 때 거슬릴 것 같긴 하다. 숟가락 사용도 보편적이지 않은 중국 문화이니 말이다. 친절한 종업원 덕에 서안 사람들처럼 파오모를 즐긴 점심이었다. 최근 후기를 찾아보니 요즘은 아예 처음부터 잘게 찢은 모로 만들어져 나온다고 하는 걸 보니 나처럼 서툰 손님이 꽤 많았던 모양이다. 왠지 위안이 된다.



의외의 발견, 대당부용원(大唐芙蓉园)


점심식사를 마치고 어디를 갈까 고민했다. 곡강지(曲江池)를 갈까 대당부용원을 갈까 했는데 소화도 시킬 겸 도보로 갈 수 있는 곳을 고르다 보니 대당부용원(大唐芙蓉园)으로 결정했다. 이름에 연꽃이라는 뜻의 '부용芙蓉'이 들어있다는 점에서 알 수 있듯 연꽃이 많기로 유명한 곳이다.



부슬비가 내리다 말다 하는 와중에도 열심히 걸어서 도착한지라 입구에서 큰 인공폭포를 봤을 땐 다소 기대를 품었더랬다. 하지만 절반이 공사 중인 데다 날씨가 좋지 않아 기대했던 공연도 하지 않는다 하여 크게 실망했다. 그래도 도착은 했으니 둘러는 봐야 할 것 같아 지도를 살펴보던 중, 원내에 '당시협(唐诗峡)'이라는 단어가 지도에 보여 한 번 가보기로 했다.



도착해 보니 (아마도) 인공 암석에 당시를 새겨놓은 주제원이었다. 큰 돌벽에 시혼이라는 한자가 쓰여 있는 모습이 아주 인상적이었다. 장한가의 주제인 당현종과 양귀비 조각도 보였고, 어학당 당시 수업 시간에 발표했던 <황학루(黄鹤楼)>나 <송두소부지임촉주(送杜少府之任蜀州)>의 유명 시구도 보여서 불과 몇 달 전 수업 준비했던 기억이 새록새록했다. 대당불야성 거리에서 시인들 조각을 보고도 생각했지만, '당시'라는 한 장르를 주제로 이렇게 주제원을 만들 수 있다는 점 자체가 이곳이 명실상부 당의 수도인 장안-서안이라는 점을 보여주는 듯해 조각된 수많은 당시들을 보며 대단하게 느껴졌다. (물론 이곳에 있는 대부분의 시들을 암송할 수 있을 대다수의 중국인들 역시.....)



부용원에 왔으니 연꽃 구경도 놓칠 수 없지. 중간에 흑조(黑天鹅)를 발견해 사진도 찍고. 예원의 구곡교 같은 느낌의 다리 밑에 연꽃이 많이 피어있는 호수가 있어 사진을 많이 찍었다. 안개가 드리운 호수에 떠있는 연꽃들이 신비한 느낌을 자아냈다. 보려고 했던 공연은 못 봐서 아쉬웠지만 그래도 당시나 연꽃으로 나름의 소확행을 느낄 수 있었던 오후였다.



시간을 들여야만 그 맛이 나는 것들


최근 ‘바쁘다 바빠 현대사회’라는 말이 유행한 적이 있다. 말마따나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시간은 꽁무니를 잡지 못해 아쉬운, 언제나 부족하고 너무나도 빨리 지나가는 어떤 것이다. 중국인들에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하다못해 요즘 중국은 드라마도 숏폼 드라마가 유행할 지경이니 말이다. 도파민에 찌든 현대인들에게는 몇 초 이상 끈덕지게 무언가를 할 끈기는 더 이상 남아있지 않다.


하지만 이날 서안에서 본 피영희, 파오모, 시들은 모두 긴 시간을 들여야 그 맛이 나는 것들이다. 한 땀 한 땀 종이를 잘라내 만드는 그림자극, 도란도란 일행과 이야기 나누며 모를 잘게 찢어 먹는 파오모, 한 글자 한 글자 의도하는 바가 드러나도록 숙고 끝에 지어내는 시. 그야말로 시간을 녹여 만드는 것들. 비록 직접 종이 인형을 만든다거나 시를 지어본다거나 하는 등 시간을 들이는 체험은 하지 못했지만 이날 간접적이나마 느리게 가는 시간을 경험해 볼 수 있었다. 바쁘게 흘러가는 시간 속 잠깐의 느림을 느끼는 것, 그 역시 여행을 통해 얻을 수 있는 특별한 것이 아닐까.




[시안 4일차 일정]


[중문 일기 in 위챗 모멘트(朋友圈)]

(譯) 오늘 오후 대당부용원 '당시협'에서 이번 학기 학교에서 배웠던 시를 보게 되어, 짧았던 학교 생활이 떠올라 사진을 몇 장 찍었다. 대당부용원은 원래 당대에 황제들이 연회를 열었던 곳이라는데, 지금은 여기에 당시 를 주제로 한 주제원이 만들어져 있다. 중국에 이렇게 활용할만한 문화적 자원이 많은 것은 정말 복인 것 같다. 특히 서안에서 이 점을 강하게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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