윈난(云南) 지역연구 7일차 (2)
중국에 있던 기간 동안 다녔던 곳 중에 아직도 기억에 깊게 남아있는 곳 중 하나가 랴오닝 선양에 있는 선양 고궁(沈阳故宫)이다. 뭔가 엄청난 게 있어서 기억에 남는 게 아니라 그 분위기가 인상 깊었다. 지역연구 가기 전에 별로 공부를 못하고 가서 베이징 고궁의 모태가 되는 곳이 그곳이라는 사실도 모른 채 찾아갔는데, 베이징 고궁의 웅장하다 못해 살풍경한 느낌과는 사뭇 다른 소박하고 아기자기한 면이 참 좋았더랬다. 그런데 선양에서 한~참 떨어진 이곳 리쟝에서 선양 고궁의 향기가 풍길 줄은!
선양의 향기를 느낀 곳은 점심식사 후 방문하게 된 바이샤고진(白沙古镇)이다. 나시족이 가장 처음 정착한 곳으로, 리쟝의 토사인 목 씨 가문이 시작된 곳이기도 하다. 토사 목 씨가 리쟝고성에 목부를 세우기 전까지 바이샤고진은 리쟝의 중심지였다고 한다. 고성에 목부가 세워진 후에는 목 씨 가문의 사당이나 각종 직물의 공방 등이 바이샤 고진에 남게 되었다고.
선양에 다녀온 후에도 한참 선양 고궁이 생각났던 것처럼, 리쟝에 다녀간 뒤에는 한참 이 바이샤고진이 생각났다. 얼핏 생각하면 완전히 다른 두 곳인데, 왜 다녀오고 나서의 감상은 비슷한지 생각을 해보니, 아마도 내가 '처음'을 귀하게 여겨서 그런 것 같다. 선양 고궁은 청이 처음 세워질 때에 만들어진 황궁이고, 바이샤고진은 나시족과 그 지배 계급이 처음으로 정착했을 때 만들어진 마을이다 보니 두 곳 모두 '처음'이 가진 소박함과 서툼을 갖춘 곳이라서가 아닐지.
이유야 어찌 됐든 바이샤고진은 리쟝에서 한 의외의 발견이었다.
수허고진에서 점심을 배불리 먹은 뒤 택시를 타고 바이샤고진으로 향했다. 바이샤고진이 좀 더 옥룡설산에 가까운 마을이라 그런지 가는 길 앞에 산이 보이는데 구름에 가려져 있어 아쉬운 마음이 든다.
택시에서 내려 마을 입구로 가는 길, 익숙한 문자들을 발견했다. 이곳 역시 나시족 마을이라 그런지 동파문자가 쓰인 벽들이 보인다. 고성에서 한 번 봤다고 약간 정겹게 느껴지기도 하고.
바이샤고진 입구에 도착했다. 수허고진과는 달리 별도의 입장료는 없었다 (2019년 7월 기준). 마을 곳곳을 발 닿는 대로 걸어보니 고성에서는 오히려 제대로 보기 힘들었던 나시족 전통 양식의 가옥들이 많이 눈에 띈다. 또 마을길 사이로 산봉우리도 빼꼼 머리를 드러내고 있다. 아마도 구름 아래 보이는 것이 오는 길에 봤던 옥룡설산이리라.
동파문을 이용한 장신구나 홀치기염색 공방 같은 것들도 눈에 띈다. 이 광경을 보면 따리에서는 자신들이 염색의 원조라고 이야기할 것 같은 느낌. 수공예품들이 전시된 모습이 고성의 그것보다 서툴어 보이는 것이 오히려 더 매력적으로 느껴진다.
나시족 전통 가옥을 개조한 것으로 보이는 카페에 들어가 커피를 시켰다. 로스팅도 직접 하고 나름 시그니처 메뉴도 있는 곳이었고, 주인장도 커피와 카페 꾸미기에 꽤 공을 들인 것으로 보였다. 커피를 시켜 바깥 자리에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하니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모를 지경이었다. 작은 마을에서 느끼는 행복한 여유. 2026년 3월, 이 카페를 찾아보니 이미 폐점한듯하다. 추억의 장소가 하나 사라졌네. 아쉽다.
소박하고 서툰 매력의 바이샤고진. 흥미롭게도 이렇게 느낀 것이 나뿐만은 아닌 듯, 요즘 리쟝을 찾아가는 사람들도 수허고진보다는 바이샤고진을 가라는 후기를 많이 남기는 듯하다. 관광객이 많아져서인지 이젠 곳곳에 카페도 많고 갤러리도 있다고 하고. 지금 다시 바이샤고진을 찾으면 19년 당시의 순박함은 찾아보기 어려울지도 모르겠다. 화무십일홍이지.
바이샤고진을 둘러보고 고성에 돌아오니 벌써 여섯 시가 넘었다. 저녁식사를 해야 할 시간인데, 점심을 늦게 먹은 데다 고기를 배불리 먹었다 보니 배가 하나도 고프질 않다. 일행과 상의 끝에 고성 구경하면서 간단히 주전부리나 사 먹기로 했다. 돌아다니다 발견한 과일가게.
다양한 과일들이 진열되어 있고, 마음대로 고른 뒤 가게 주인에게 주면 무게 단위로 돈을 받는다. 운남이라 그런가 상해에서 보던 것보다 과일 종류가 더 다양한 것 같다.
여기서 중국 과일가게를 이용할 때의 팁을 하나 공유하자면, 중국 과일가게는 '깎아주는' 서비스가 있다. 가격을 깎아준다는 뜻은 아니고, 과일을 골라서 '请帮我切一下(칭빵워치에이씨아)'라고 하면 직접 껍질도 까주고 먹기 좋은 크기로 잘라도 준다. 찍어 먹으라고 이쑤시개도 준다. 예전에는 이걸 몰라서 망고를 무턱대고 사온 뒤 잘 잘라먹질 못해서 곤욕을 치르곤 했는데, 중국인 친구랑 다니다 보니 알게 된 팁이다.
추측컨대 중국 젊은이들은 주로 기숙사에 살다 보니 주방을 쓸 일이 많지 않아 잘린 과일에 대한 수요가 생겨 만들어진 서비스인 것 같다. 우리나라 마트처럼 이미 잘라서 그릇에 담아놓은 '컷팅 과일 플래터' 같은 것도 가게에서 같이 팔긴 하지만, 신선도를 생각하면 현장에서 내가 직접 고른 과일을 깎아주는 서비스를 이용하는 것이 좋다. 편리한 것도 편리한 거지만, 가끔 생소한 과일을 접하면 어떻게 잘라야 하는지 모를 때도 있는데, 과일 가게 주인은 그 분야의 전문가이니 전문가의 손길을 한 번 빌려보는 셈 치고 말이다.
간단하게 요기하려고 고른 과일인데, 다 자르고 나니 부피가 꽤 나간다. 과일만 만 원어치를 샀다. 중국의 싼 과일 물가를 감안하면 엄청나게 많이 고른 것. 여행지에 있다 보니 손이 좀 커진 것 같기도 하다.
숙소로 돌아와 사온 과일을 먹으며 일행들과 오랜만에 여유로운 저녁 시간을 보냈다. 보드게임도 하고, 밀린 과제도 하고, 그간의 일들에 대한 소회를 나누던 시간들. 지금 돌이켜보면 참 귀한 추억들이다. 예쁜 노을이 함께한 감사한 시간이었다.
[윈난 7일차 일정 (리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