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룡설산, 양치통의 비밀

윈난(云南) 지역연구 8일차 ~ 마지막날

by 볕이드는창가

양치통이 뭐냐면요


파견 전 외국어생활관에서 중국어 수업을 들을 때의 일이다. 지역연구 계획을 짜야해서 동학들과 골머리를 싸매고 있을 때, 누군가 운남 지역 계획을 짜면서 옥룡설산 이야기를 꺼냈다. 그때 담임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꼭 양치통을 챙겨야 해! (一定要带양치통!)"


양치통?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우리 반 동학들 모두가 살짝 벙쪘던 그 순간이 기억난다. 처음엔 한국어인 줄 알았다. 비록 선생님께서 중국인이시긴 해도 한국어를 하실 줄 아는 분이라는 걸 알았기에 우리가 알아듣지 못할까 봐 한국어로 해주신 줄 알았다. 산 위에 올라가서 양치라도 해야 한다는 얘길까? 누군가 물었다. "이 닦아야 해요? (要刷牙吗?)"


약 3초간의 정적 후 선생님께서 다시 한번 강조하신다. "양치토옹!"


문득 생각났다. 아- 여기 외국어생활관이지. 한국어 하면 안 되는 곳이지. 그니까 저 말은 중국어라는 거다. 중국어 모드로 머리를 급하게 돌리고 나서야 깨달았다. 아, 산소통! 중국어로 산소는 '양치(氧气)', 통은 통이다. 양치통은 산소통이었던 것.


모두 눈을 마주치며 깔깔깔 웃었던 어느 오후의 기억. 그래, 우리가 그 '양치통이 필요하다는' 옥룡설산에 왔다.




사실 산에 가고 싶지 않았다. 풍경을 보는 지역연구에는 별로 흥미도 없거니와, 산행은 더더욱 즐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운남까지 가놓고 그 유명하다는 호도협 트레킹을 일정에 넣지 않은 것도 그 때문이었다.


꾸역꾸역 옥룡설산에 가게 된 연유는 이곳의 야외무대에서 진행되는 한 공연 때문이었다. 제목은 <인상여강(印象丽江)>. 장이머우(장예모, 张艺谋) 감독이 연출했다는 '인상 시리즈' 중 하나로, 실제 풍경을 이용하여 연출하는 이름난 실경 공연(实景演出)이었다.


'인상 시리즈'는 계림에서 진행하는 <인상유삼저(印象刘三姐)>를 시작으로 항저우, 총칭, 하이난 등 중국에 총 7개의 작품이 있는데, 옥룡설산의 <인상여강(印象丽江)>은 장이머우가 시리즈 중 두 번째로 제작한 공연이다. 인상 시리즈는 실재하는 자연물을 무대로 연출하고, 해당 지역에서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를 십분 활용하면서 현지인을 배우로 올림으로써 전통 보존 및 지역 일자리 창출 등에 기여하여 관광수입을 올리는 데 기여하고 있는데, <인상여강> 역시 약 500여 명의 현지 소수민족을 무대에 세워 공연을 진행한다.


공연 표는 관람 전날 미리 예매했는데, 공연을 보려면 옥룡설산에 입장을 해야 해서 결론적으로 공연 비용과 설산 입장료를 다 내야 한다. 설산 입장권을 샀으니 마음먹으면 설산에도 갈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설산을 보는 것은 그리 녹록지 않다. 날씨가 좋지 않으면 산에는 들어갈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간 날은 하필 구름이 많이 끼고 부슬비도 내렸기에 공연만 보고 올 수밖에 없었다.


왼쪽이 사전예매한 공연 관람권, 오른쪽은 현장구매한 옥룡설산 입장권


그리고 바로 여기, 입장권을 파는 이 매표소에서 소문의 그 '양치통'을 살 수 있다. 공연을 관람하는 무대만 해도 해발 3,000m가 넘는 높이라 고산병이 오기 쉬워서 만일에 대비해서 하나 가져가는 편이 좋다.


또 하나 중요한 건 방한복이다. 산 위는 춥다는 얘기를 듣고 혹시 몰라 패딩 조끼를 챙겨가긴 했는데, 막상 도착해 보니 훨~씬 더 추웠다. 게다가 비까지 부슬부슬 내리니 더 춥게 느껴졌다. 양치통을 파는 곳에서 유료로 방한복도 대여를 해주니 혹시 춥다면 꼭 대여하길 바란다. 롱패딩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겹겹이 껴입으니 좀 낫다. 이제 공연을 보러 갈 차례.


<인상여강> 공연은 차마고도를 힘겹게 넘어 다니던 마방(马帮)들, 나시족과 소수민족의 삶과 사랑 등을 그리는 내용으로, 공연장 양쪽 화면에 중국어와 함께 영어자막을 제공해 중국어를 몰라도 영어를 알면 대략적인 내용 흐름은 파악할 수 있다. 앞서 말한 대로 약 500명의 현지인들이 등장하고, 중간에 실제 말을 타고 무대와 관객석을 돌아다니거나 전통악기를 연주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눈앞에 무대가 꽉 차게 보여서 장엄하게까지 느껴진다.



공연 마지막엔 배우들이 무대에 등장해 관객들에게 인사를 건네는데, 나는 이 부분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이 신비한 옥룡설산 앞에 선 우리가, 각지에서 온 여러분을 위해 진심으로 기도합니다. 하늘이 당신의 소원을 들어주고, 당신에게 좋은 기운을 내려주길. 우리가 이곳에서 진심으로 당신을 위해 기도하며, 당신이 다시 올 그날을 기다리겠습니다."

(站在这神奇的玉龙雪山前的我们,虔诚地为从四面八方而来的你祈愿,祈求天为你实现心愿,为你喜降福气。我们在这里虔诚地为你祈愿,等你再来。)


옥룡설산은 1년 내내 녹지 않는 만년설이 하얀 용을 연상시킨다 하여 이름 붙여진 산으로, 나시족에게는 신성한 성지다. 이곳에 모인 우리를 위해 현지인들이 이 신성한 곳에 우리들의 안녕을 빌어준다는 것, 또다시 올 그날을 기다린다는 그 말이 큰 울림을 주었다. 대사가 끝난 후엔 운남 사투리로 관객들에게 작별인사를 하는데, 이 부분 또한 인상적이었다.


날씨가 좋은 날에 공연을 보면 무대 뒤쪽에 만년설이 쌓인 설산의 모습이 보여 장관이라는데, 아쉽게도 우리에게 그런 행운까진 주어지지 않았지만, 공연장에서 들은 축복의 말만으로 아쉬운 마음이 많이 사그라들었다.




공연이 끝나고, 옥룡설산에서 리쟝고성까지 가는 버스가 있어 그것을 타고 숙소로 돌아왔다. 갈 때는 택시로 100 위안 가까이 나왔는데, 돌아오는 버스는 편도 15 위안밖에 하지 않았다. 아- 우리가 돈으로 편리함을 샀구나.


옥룡설산 공연을 보고 돌아와 오후 내내 숙소에서 빈둥거렸다. 설산이 추워도 너무 추워서 다녀오고 나니 기운이 확 빠져서다. 저녁은 좀 따끈한 것이 먹고 싶어 찾은 곳이 미씨엔(쌀국수, 米线) 가게.



닭고기 쌀국수와 토마토소고기 쌀국수, 그리고 '꼭 시켜야 한다는(必点)' 우유계란감주(牛奶鸡蛋醪糟)를 시켰다. 우유계란감주는 말 그대로 우유와 계란, 중국식 감주를 넣고 끓은 음식으로 우유 막걸리 같은 느낌의 부드러운 식감을 가진 디저트계 음식이다. 본래 감숙성 요리인데 가게 주인의 외할머니가 직접 담근 감주를 사용했다고 판매하고 있는 듯했다.


운남 지역연구의 마지막날이니만큼 맥주도 한 병 시켰다. 며칠 전 샹그리라 송가 맥주를 마셨는데, 이번에도 같은 샹그리라 크래프트비어 계열의 팡줘마(胖卓玛) 맥주다. 송가 맥주보다 좀 더 비쌌는데, 알고 보니 송가 맥주는 단순한 라거 계열인데 이 팡줘마는 과일향을 더한 유럽식 맥주라서 그런 것 같았다. 샹그리라 맥주에도 종류가 여러 가지 있으니 다양한 맛으로 즐겨보기를 추천한다.


2026년 3월 기준, 현재 검색을 해보니 가게가 많이 바뀌었다. 가게 자체는 그대로인데 내부도 바뀌고 메뉴도 바뀌고. 23년 정도부터 바뀐 것 같다. 본래 끓여져 나오는 쌀국수를 팔았는데 지금은 끓인 육수에 직접 재료를 넣어먹는 过桥米线을 주력으로 팔기로 한듯하다. 우유계란감주는 그대로 있긴 하다.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 많은 시간이 흘렀으니.. 아직 운영하고 있다는 데 만족한다.





마지막날 비행기.jpg


始发地 LIJIANG - 目的地 SHANGHAI


자, 이렇게 장장 8박 9일의 운남 지역연구를 마무리한다. 9일차는 오전에 바로 체크아웃하고 비행기 타고 상해로 돌아온 것뿐이니 사실상 운남에는 8일 정도 있었다고 봐야겠다.


운남은 '꼭 가보라'는 말을 정말 많이 들었던 지역이었다. 거기에 교환학생 시절 같은 반 동학이 훌쩍 떠났던 기억이 더해져 내게는 정말 가고 싶으면서도 좀 신비로운, 그런 곳이었다. 그리고 그런 곳을 내 두 발로 직접 밟아볼 수 있었다는 것 자체가 즐거웠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소문으로만 들어온 곳들을 두 눈에 담아보는 것만으로도 의미 있던 여정이었다.


천혜의 자연환경과 다양한 소수민족이 모여 사는 곳. 중국에서 다녀본 곳 중 가장 이국적인 곳이자 소수민족을 가장 많이 접한 곳. 미얀마·라오스와의 접경지역으로 그야말로 '이국적'이었던 시솽반나부터 시작해, 우연히 훠바지에 축제에 참여하게 된 따리, 귀여운 동파문자가 인상적이었던 리쟝까지, 이 지역들을 '운남성'이라는 하나의 지역으로 묶는 게 미안할 정도로 각 지역이 각기 다른 이야기를 품고 있었다.


인생에서 마음처럼 되지 않는 일이 다반사라는 말(人生不如意十有八九)처럼, 이 여정에는 '여의치 않은(不如意)' 일들도 꽤 있었다. 그중 가장 영향이 컸던 것은 바로 날씨. 아열대기후에 고산지대라 그런지 수시로 변하는 날씨가 우리에겐 복병이었다. 비가 너무 잦아 우산을 항시 가지고 다녀야 했고, 맑게 갠 하늘을 보기가 어려웠다. 옥룡설산은 기온까지 낮아 몸살이 올 것처럼 으슬으슬 추웠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수시로 변하는 날씨 덕에 오히려 우리는 잠깐의 화창함을 더 소중히 여기고 즐길 수 있었고, 불친절한 빠오처 기사 덕에 일행들과 맥주 한 잔 하며 이야기 나눌 좋은 화젯거리가 생겼으니 오히려 좋았다. 게다가 여행에서 만나는 수많은 不如意는 인생 전체를 두고 보았을 때 정말 아무것도 아닌 일이 아닌가!


너무 여유로워 오늘이 무슨 요일인지조차 잊고 지냈던 운남 여정을 이렇게 마무리한다.



[윈난 8~9일차 일정 (리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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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문 일기 in 위챗 모멘트(朋友圈)]

(譯) 리쟝에서의 이 3일은 정말 좋았다. 여행 후기에는 따리가 리쟝보다 좋았다던데, 나는 리쟝이 따리보다 규모가 더 커서인지 더 돌아다니기 좋았다. 구불구불한 골목 속에 소수민족의 이야기가 많이 감춰져 있는 느낌이었고, 나시족의 건축 양식까지 볼 수 있었다. 리쟝 근처 두 마을을 둘러보다가, 여기가 차마고도의 중점이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인상여강> 공연은, 보다가 비에 흠뻑 젖긴 했지만 그래도 규모가 크기도 했고, 단어 하나로 형용하기는 어려운 공연이었다. 나시족의 동파문자도 빼놓을 수 없지! 갑골문보다 200년이나 앞섰다는 말도 있단다. 리쟝에서 진정한 '느린 삶'의 매력을 느꼈다. 너무 여유로워서 오늘이 무슨 요일인지조차 잊을 정도의 느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