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들은 점심에 학교로 온다
14년 1월에 대학을 졸업하고 약 5년 만의 캠퍼스 생활이다. 설레지 않을 수가 없다. 교정을 거니는 학생들만 봐도 즐겁고, 과제에 시험공부에 골머리 썩는 유학생 친구들을 보고 있자니 짠하기도 하지만 그마저도 좋아 보인다. 학교가 그냥 좋았다. 한국에서 학부생으로 대학을 다녔던 6년의 시간 동안엔 몰랐던 것들을 회사에 찌들었다 운 좋게 캠퍼스로 복귀한 나는 이제 알고 있었다. 무엇보다 캠퍼스가 돌아오고 싶다고 마음대로 돌아올 수 있는 공간이 아니라는 것도 이제 잘 안다.
시한부 교통대 생활 속에서 내가 좋아했던 공간을 생각해보면 몇 군데가 떠오른다. 아침마다 디카페인 아메리카노를 수혈해준 교내 스타벅스, 나뭇잎 사이로 햇살이 비치면 그렇게 근사할 수 없던 오동나무(梧桐树) 길, 점심마다 경보와 달리기를 하는 사람들이 뒤섞여있던 운동장 등등. 그중에서도 가장 기억에 남는 공간은 학생식당이다. '무질서 속 질서'. 학생식당은 그야말로 중국 사회의 축소판이었다. 그래서 나는 학생식당에 가는 것이 참 즐거웠다.
처음 식당에 갔던 날을 기억한다. 학교 오리엔테이션 때, 학생카드에 돈을 충전하고 카드 체킹을 해야 식사를 할 수 있다고 안내받았다. 청결 등의 이유로 인해 학생식당에서는 현금 거래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학생 식당 도전을 결심한 그 날, 오전 수업이 끝나고 바로 카드 충전을 한 후 식당으로 향했다. 이런. 이미 수많은 학생들이 식사를 하기 위해 줄을 서 있었다. 줄의 개수도 많고 사람도 많아서 도대체 내 줄 끝에 무슨 음식이 있는지조차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럴 때 필요한 건 뭐? 눈치(眼力劲儿)! 일단 가장 줄 선 사람이 많은 줄에 서 본다. 이렇게 많은 사람을 그냥 보내지는 않겠지 싶은 마음에. 줄을 서는 창구가 대충 봐도 열 곳이 넘는데, 뭔가 줄의 번호에 따라 구분이 되는 것 같다. 내가 선 줄은 7번 줄인데, 이쪽 구역에 줄을 서 있는 사람이 제일 많다.
식당의 배식 시스템은 한국과 달랐다. 한국에서 학교를 다닐 땐 원하는 메뉴를 고르면 그 메뉴를 배식해주는 줄에 선 후 식권을 내기만 하면 배식받을 수 있었는데, 여긴 자기 차례가 되면 '이거 주세요 저거 주세요'를 해야 배식을 해주는 시스템인 것 같다.
앞 손님들의 주문과 배식이 워낙 오래 걸려 언제 줄이 줄어드나 싶었는데, 어느새 앞에 한 세 명쯤 남았다. 이제부턴 정말 눈치싸움이다. 앞사람이 어떻게 하는지를 잘 보고 필요한 부분은 모방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중요하다. 그때 들려오는 맨 앞 여학생의 주문 소리.
"밥은 반만 주시고, 저건 뭐예요? 가지? 저거 주시고, 저기 있는 저 돼지고기... 맞나? 돼지고기 요리 주시고요. 저거 치킨 맞아요? 치킨 몇 조각 주세요." (사실 주변에서 들리는 엄청난 소문을 뚫고 이 말을 들어야 했다)
대화가 끝난 뒤 그녀는 카드 체킹을 마치고 유유히 식탁으로 걸어갔다. 저 몇 마디 안 되는 대화로 내가 알 수 있었던 정보들은 아래와 같다.
1. 밥을 반만 달라고 하는 것이 가능하다.
→ 탄수화물 적게 받고 좋네!
2. 음식 이름이 (아마도) 앞에 적혀 있지 않다.
→ 식재료의 중국어 명칭을 모르면 지시대명사로만 대화를 해야 할지도 모른다.
3. 누군가와 끊임없이 대화를 해야 한다.
→ 회화 실력 느는 건가요....
이제 남은 건 앞에 두 명. 왠지 긴장이 된다. 나 오늘 처음 식당 와봤는데. 주문도 제대로 못하고 우물쭈물하다가 이상한 반찬만 잔뜩 받아가면 어떡하지? 그때 느꼈다. 여기서 뒷사람을 배려한답시고 필요한 걸 제대로 말하지 않으면, '속전속결'을 생명보다 중요하게 생각하는 식당 직원분들에게 떠밀려 가게 될 것이라는 것을.
내 차례가 되었다. 맨 앞에서 보니 정말 요리 이름이 하나도 적혀 있지 않다. 대충 저 요리 안엔 뭐가 들어있겠다 정도만 알 수 있는 비주얼. 배식해주는 분들은 인내심이 없다. 뭐가 필요하냐고 재촉한다.
"밥 반만, 저기 두부, 저기 컬리플라워(有机花菜) 요리, 저거 튀긴 거 저거 하나 주세요."
그러지 않으려고 했지만 결국 지시대명사가 잔뜩 담긴 말로 주문을 해버린다. 다 말하고 나니 눈앞에 카드 리더기에 금액이 찍힌다. 아니, 10위안도 안 하잖아? 학생카드를 꺼내 카드 체킹을 하고 왼쪽을 보니 국이 담긴 그릇이 여러 개 놓여있다. 국은 무료인 것 같다. 국 옆에 숟가락이 있었는데 모르고 그냥 식탁으로 왔더니 식탁에는 젓가락만 있다. 식당 안에 사람도 많고, 가방을 봐줄 사람도 없어서, 결국 첫날 국은 그냥 입을 대고 마셨다. 그렇게 먹은 첫날 학식이 이렇다.
첫 학식 경험 덕에 진땀 좀 뺐음에도 불구하고 이상하게 그 뒤로 점심엔 학생식당을 자주 갔다. 왠지 이 작은 중국에서 나 스스로 규칙을 발견하는 희열을 느껴보고 싶었다. 모두가 암묵적으로 따르는 룰이 분명히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몇 번의 시행착오 끝에, 배식구는 크게 네 개의 구역으로 나뉘며, 그 각각의 특징은 이렇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 마라탕 구역 : 식당 가장 왼쪽에 위치. 한국의 흔한 마라탕 가게처럼 스스로 바구니에 야채와 부재료를 담고 배식구로 가면, 배식구 직원이 비용 결제를 도와준 후 번호를 하나 알려준다. 그 번호가 불려지면 배식구로 가서 탕을 찾아가는 시스템. 다만 꼬치류를 추가하고 싶으면 배식구에서 추가 주문을 해야 한다. 점심시간엔 인기 최고인 코너로 식사시간보다 좀 먼저 가야 그나마 여유가 있다.
■ 주식(主食) 구역 : 중국에서 주식이라 하면 밥, 면, 만두 등 탄수화물을 주재료로 한 메뉴를 말한다. 주식 구역은 또 여러 갈래로 나뉘는데, 훈툰(馄饨, 만둣국) 구역, 전병(饼) 구역, 찐빵 구역, 만두 구역, 볶음면 구역, 볶음밥 구역 등 다양하다. 훈툰/볶음면/볶음밥 구역은 점심에도 손님이 좀 있는 편이지만, 찐빵이나 만두, 전병 등은 아침 시간에 인기가 좋다. 훈툰은 고기만두/야채만두/새우만두 중에 고를 수가 있는데, 추가로 주문하지 않아도 만둣국 밑에 계란후라이가 들어있다. 무척 든든하다.
■ 아침식사 구역 : 여기는 아침시간 한정으로만 여는 배식구다. 또우쟝(豆浆), 계란, 우유, 죽, 고구마, 감자, 옥수수, 샤오마이(烧卖), 찐만두 등 아침식사에 적합한 메뉴들을 판다. 10시 정도까지만 운영하는 코너인데 기름에 볶아지지 않은 야채를 만날 수 있는 몇 안 되는 코너라 유학생들, 특히 서양에서 온 유학생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 일반 학식 구역 : 앞서 첫 경험에 나를 떨게 했던 그 구역이자, 가장 흥미로운 공간이다. 사실 잘 보면 배식구 위에 여러 가지 요리 이름이 적혀있는데, 이 요리가 실제 그 배식구에서 배식해주는 요리는 아니다. 그럼 뭘 주는 줄 알고 배식을 받느냐! 이 학생들도 모른다! 학생들의 행동을 잘 살펴보면, 일단 최대한 줄이 짧은 곳에 가서 선다. 줄을 서 있는 동안 다른 학생들이 받아가는 메뉴를 스캔한다. 그리고 자기 차례가 되면 본인이 서있던 배식구에 있는 반찬을 보고 주문을 하되, 원하는 반찬이 다른 줄에 있을 경우 배식구 직원에게 저쪽 줄에 있는 무슨 음식을 가져다 달라고 말한다. 직원은 귀찮아하기는 하지만 최대한 가져다준다. (직원이 친절하지 않으면 상당히 난처한 상황이 올 수 있기 때문에, 보통은 자기 줄이나 옆줄 정도에 있는 음식 안에서 주문을 끝내는 경우가 많다.) 비용은 밥의 분량, 반찬의 개수로 책정되는 것 같다. 앞서 말한 것처럼 국은 공짜인데, 숟가락이 식탁에 놓여 있지 않으므로 필요하면 꼭 국 코너에서 가져가야 한다. 한 가지 좀 걸리는 것은, 배식구 직원의 국자는 인당 하나. 밥도, 반찬도 한 국자로 퍼주다 보니 여러 반찬을 왔다 갔다 할 땐 좀 비위생적이다. 가끔 밥에 내가 주문하지 않은 반찬의 건더기가 묻어있는 웃지 못할 해프닝도 벌어진다.
어느 날은, 밥을 받으려고 또 혼돈의 학식 코너에서 '오늘은 어떤 배식구 직원을 만날까' 콩닥콩닥 뛰는 심장을 부여잡고 줄을 서 있는데, 뒤에서 누가 등을 두드렸다. 돌아보니 백발의 할머니. 한참 어린 나를 보고 연신 고개를 숙이며 뭔가 말씀을 하시는데, 손에는 현금 몇 위안이 들려 있다.
상해 사투리로 말씀을 하셔서 처음엔 잘 못 알아들었다. 좀 천천히 말씀해달라고 하고 뭐라고 하시는지 들어보니 "내가 학생카드가 없는데, 현금을 줄 테니 학생카드로 결제만 좀 부탁해도 될까?" 하는 부탁을 하시는 것이었다. 어렵지 않은 부탁이니 들어드렸는데, 궁금증이 생겨 한 마디 되물었다. "그런데, 왜 학교에 오셔서 점심을 드세요?" 할머니의 대답은 간단했다. "여기가 밖보다 싸~"
상해 물가 비싸다. 물론 재료 공수가 쉬우니 먹거리에 있어서 한국보다는 그 값이 싸다고 할 수 있지만, 중국의 다른 지역과 비교하면 확실히 비싼 편이다. 그래서 이런 대학교의 학생 식당은 점심이 되면 상해 사람들 모두의 식탁이 된다. 특히 바깥에선 식사를 할 엄두를 못 내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학교로 오신다. 외부인에 대한 특별한 제재 조치가 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캠퍼스 생활을 했던 시간 동안 특별히 교직원들이 이에 대해 제재하는 모습은 보지 못했다.
나는 학생 식당이 참 좋았다. 점심시간만 되면 혼돈의 카오스지만 그 누구도 당황하지 않고 어떻게든 제 자리를 찾는 그 '무질서 속 질서'가 좋았고, 지역 주민들의 끼니까지 책임지는 그 포용이 좋았다. (물론 공짜도 아니고, 학생들은 좀 귀찮을 수 있겠지만 말이다) 혹시 중국 대학의 캠퍼스에 갈 일이 생기면, 유학생 식당 말고 로컬 학생이 들르는 학생 식당을 꼭 이용해 보길 바란다. 한 번쯤 배탈이 날 각오도 해야 하고, 중국인들 사이에서 부대낄 마음의 준비도 되어 있어야 한다. 하지만 나름대로 맛도 있고 가성비도 좋다. 무엇보다 배울 점이 어떻게든 생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