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볕이드는창가 Jan 03. 2021

오리와 거위와 변검과 나

네가 왜 거기서 나와?

날씨가 더할 나위 없이 좋았던 하루(전편 <상해의 어느 공기 좋던 날> 참고)가 지나고, 2019년 4월 2일, 예상대로 상해에는 다시 흐린 날이 찾아왔다. 하지만 날씨가 좋든 좋지 않든 상해라는 공간에 내가 있을 수 있는 시간은 한정되어 있으니, 내게는 다가오는 하루하루를 일분일초도 허투루 보내면 안 된다는 일종의 사명감이 있었다.


이날은 학교 수업을 마치고 홍챠오루(虹桥路)에 있는 사천식 음식점에서 회사 분들과 저녁을 먹기로 되어 있었다. 수업이 끝나고 바로 식당으로 가면 중간에 시간이 약간 뜨는 상황이라 주변에 갈만한 곳이 있는지 찾다가 신홍교중심화원(新虹桥中心花园)이라는 곳을 찾아냈다. 이렇게 시간이 애매하게 남을 땐 공원을 가는 것이 가장 실패 없는 선택이다.



공원으로 가던 길에 발견한 벚꽃. 나무가 있던 자리에 해가 잘 들었는지 분홍 벚꽃과 흰 벚꽃이 모두 활짝 피어 있었다. 하늘이 더 푸르렀다면 좋았겠다는 아쉬움은 남지만, 마음에 드는 꽃봉오리를 발견하고 열심히 초점을 잡아보려고 카메라를 이리저리 기울여 보았다.



신홍교중심화원(新虹桥中心花园). 상해 지하철 10호선 이리루(伊犁路) 역에서 내리면 바로 보이는 이 도심 속 공원은 뭐든 등급 매기기 참 좋아하는 중국 사람들에 의해 '상해 4성급 공원'으로 분류된 곳이다. 2000년 홍교 지역의 개발이 시작됨에 따라 시민에게 개방된 공원 같은데, 입장료는 없다. 회사 상해 사무소가 전에 이 공원 바로 맞은편에 있는 국제무역센터(国际贸易中心)에 있었는데, 그렇게 출장을 자주 다녔는데도 맞은편에 이런 공원이 있는지 전혀 몰랐다. 당연하지. 여행이 아니라 출장이었으니.



공원에는 이미 일과 후 산책을 나온 시민들이 많이 있었다. 상해에 있을 때 부러웠던 것 중 하나가, 참 도심 속에 공원이 많다는 것이었다. 한국을 생각해보면 넓은 부지에 호수까지 딸려 있는 공원이 도시에 그렇게 많지는 않은 것 같은데, 상해는 거의 구(區)에 기본 하나 이상씩은 있었던 것 같다. 상해 말고 다른 도시도 마찬가지고. 물론 땅덩이가 워낙 크니까 그렇겠지만, 이 많은 인구가 바쁜 일상 속에 숨 돌릴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는 것 자체는 큰 장점이라는 생각이 든다.


진분홍빛 벚꽃과 이름 모를 꽃들에 이끌려 들어간 공원. 아기와 함께 산책하는 아주머니, 퇴직 후 공원에서 여유로운 시간을 즐기는 주민들이 공원 곳곳에 있었다. 카메라를 들고 풍경을 감상하며 공원 안을 산책하던 나는 어떤 생경한 존재가 시야에 들어온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건 바로, 마치 나와 함께 산책을 하듯 유유히 내 곁을 걸어가던 이 친구들.



이미 사진에서 꽥꽥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이 친구들은 (아마도) 오리다. 이렇게 사람을 무서워하지도 않고 그와 함께 공원길을 걷는 오리는 처음이라 여간 신기할 수 없었다. 심지어 한 마리는 우리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아 얼마 되지 않는 햇빛을 쬐고 있었다. 할머니와 함께 나온 아기는 그 모습이 신기한지 눈을 떼질 못한다. 잠시 오리와의 시간을 보내고 또 다른 곳으로 좀 가보려고 할 때, 내 눈에 띈 또 다른 친구들!



어째 아까 본 친구들과는 좀 다르게 생겼다. 목도 훨씬 더 길고, 부리도 좀 다르고, 무엇보다 머리에는 혹이 있다. 여기저기 탐색하며 먹이를 찾는 듯한 이 친구들의 이름을 불러준 것은 공원을 산책하던 또 다른 중국인들. 거위(鹅)다! 거위를 이렇게 가까이서 본 것도 처음이었다. 혹시나 해서 네이버에 '오리 거위 구분'을 검색하니 '머리에 혹이 보이면 거위입니다'라고 판결을 내준다. 땅땅땅.



지근거리에서는 처음 만나는 이 신기한 친구에게서 나는 몇 분 동안 눈을 떼질 못했다. 낯선 사람이 옆에 계속 서 있는데도 이 친구들은 전혀 경계하지 않고 주변 탐색에 여념이 없었다. 공원 안에는 특별히 거위를 기르는 누군가가 있는 것일까? 아니면 사람들이 주는 무언가를 먹고 자라는 것일까? 왠지 궁금해졌다.



이 공원에는 또 다른 동물 친구가 있었으니, 바로 흑조(黑天鹅). 사진에 여러 오리들과 어울리고 있는 친구가 바로 이 흑조다. 인터넷에서는 '분리수거를 하는 흑조'로 유명했는데, 실제로 쓰레기를 분리할 줄 아는지는 모르겠지만 호수를 유유히 헤엄치며 사람들에게 그 신비한 모습을 보여주는 모습이 신기했다. 그런데 상해 생활을 오래 하고 다른 공원들을 가볼수록 사실 이 풍경은 전혀 신기한 풍경이 아니라는 것을 나는 알게 되었다. 공원마다 호수가 있으면 흑조가 있었다! 맙소사. 그저 한국에서 보기 힘든 풍경일 뿐, 중국에서는 너무도 흔했다.



오리와 거위, 그리고 흑조까지 생각지 못한 동물 친구들과의 만남도 신기했지만, 역시 봄의 공원은 꽃이다. 공원 곳곳을 장식한 각종 꽃들이, 날은 흐리지만 공원에 울긋불긋 색을 더해 주었다. 또 호수 수면을 헤엄치는 오리들과 그 너머로 보이는 호심정(湖心亭), 그것만으로도 공원 산책은 성공이었다. 이제 슬슬 약속 장소인 식당으로 발길을 옮길 시간이다.



저녁 식사는 상해로 파견된 회사 지역전문가들이 사무소 주재원 분들과 정식으로 처음 만나 저녁을 함께 하는 자리였다. 다른 회사의 경우 같은 도시에 파견된 회사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지만 그다지 케어해주지 않는 경우도 있었는데, 우리 회사는 파견 인원들이 그다지 많지 않기도 했고, 주재원 분들도 세심한 분들이셔서 감사하게도 상해에 있는 동안 이런 자리를 몇 번 가질 수 있었다.


처음 얼굴을 보는 자리인 데다 '중국'이라는 지역에 왔다는 것에 대한 환영의 의미로 주재원께서 고르신 식당은 변검 공연도 볼 수 있고 맛있는 사천 음식도 먹을 수 있는 사천요리 전문점 <파국포의(巴国布衣)>였다. '파국(巴国)'은 지금의 중경(重庆) 지역을 일컫는 옛 지명인데, 흔히 중경과 청두를 포함한 사천 지역을 '파촉(巴蜀)'로 통칭하기도 한다. 식당 이름부터 사천요리 파는 집이라는 것을 알려준다.



홍챠오루에 있던 이 지점은 분명 19년 4월 이 저녁 모임 때만 해도 개업 상태였는데, 글을 쓰는 지금 이미 폐점된 상태임을 발견했다. 그래도 이 지점 외에 상해에 분점이 4개 정도 더 있고, 상해 외에 다른 지역에도 체인점이 있는 유명 식당이다. 내 기억이 맞다면 짠내 투어 상하이 편에서도 이 식당이 소개된 적이 있다. 파는 요리도 물론 맛있지만 (혹자는 상해 현지 입맛에 맞추느라 실제 사천 지역에서 먹는 요리보단 좀 덜 맵다고도 한다) 이 식당의 가장 큰 특징이자 장점은 변검(变脸)을 눈 앞에서 볼 수 있다는 점!


눈 앞에서 정말 '뙇!'하고 얼굴이 바뀐다


이제 막 중국에 와서 어버버 하느라 쉽게 하기 힘든 경험을 시켜주시려고 주재원분께서 직접 무대 바로 앞자리로, 그것도 공연 시간에 맞춰 식사 예약도 해주신 덕분에 인생 첫 변검 경험을 해보았다. 처음 보는 변검인데 그것도 이렇게 가까이에서 보게 되어 정말이지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짠내 투어에서 소개될 때 공연하시는 분이 관객들과 소통을 자주 시도하시는 게 그저 방송 촬영을 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는데, 실제로 평상시에도 그러시는지 공연 중에 식사 중인 모든 테이블을 돌아다니며 사진도 찍어주고 악수도 해주었다. 가까이 앉은 덕분에 나도 그와 악수를 한 번 해 보았다.


대놓고 카메라를 들이대자니 좀 민망해서 (사실 공연하시는 분은 오히려 대놓고 찍어서 인터넷에 올려주는 것을 더 좋아했다. 홍보가 되기 때문이다.) 이날 촬영은 대부분 휴대전화로 했는데, 다행히 영상이 남아있어 현장 모습을 짤막하게나마 전해 본다. 10분 남짓의 공연 중 마지막 부분이었던 것 같다. 앞부분에 열심히 얼굴이 변할 때는 눈으로 보느라 찍지 못한 것이 지금 생각하니 조금 아쉽다.


■ "파국포의(巴国布衣)" 변검 공연 중 일부 (소리 주의!)


공연이 끝나고 자리에 함께한 다른 지역전문가들과 도대체 저 얼굴은 어떻게 변하는 것일까에 대해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누었던 것이 생각난다. 처음엔 손으로 급하게 내리는 것일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나중에는 아마도 머리에 쓰고 있는 저 모자에 비밀이 있을 것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하지만 굳이 비밀을 밝힐 필요가 있을까? 오히려 몰라야 공연 그 자체의 즐거움을 즐길 수 있지 않을까.


묘하게도 이날 함께했던 회사 주재원분들 모두가 지역전문가 출신이셨다. 이 시기에 우리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지, 어떤 어려움을 겪고 있을지 잘 알고 계시는 분들이라 진심으로 축하해주시는 한편 이런저런 조언도 많이 해주셨다. 말로는 '억지로 뭔가를 하려고 하지 말라'고 하셨지만, 우리가 조금 더 적극적으로 새로운 경험을 하고 새로운 환경에 스스로를 내던져보기를 바라는 마음이 변검 공연을 포함한 저녁 식사 시간 내내 느껴졌다. 감사하게도 딱 적절한 시기에 적절한 메시지를 받았던 것 같다. 다시없을 하루하루를 알차게, 그리고 좀 더 적극적으로! 나에게 주문을 걸어본 19년 4월 2일이 지나간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