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볕이드는창가 Dec 27. 2020

상해의 어느 공기 좋던 날

어머, 이런 날은 나가야 해!

나는 속았다.


파견 도시를 결정할 무렵, 누군가가 내게 '에이~ 아무래도 북경보단 상해가 좋지. 공기가 더 좋을 거 아니야~'라고 말했고, 북경의 파란 하늘은 국제 행사가 있을 때만 볼 수 있다는 것도 익히 알고 있었다. 실제로 교환학생 때 북경에서 모래바람 좀 맞아봤으니까. 나의 코와 폐는 소중하니까. '미세먼지 정도'도 내가 파견 도시를 결정하는 데 주요하게 작용한 척도였음은 당연하다. 그러나 실제로 상해에 도착해서 약 2주간 상해의 공기는?


왼쪽이 3월 말 집에서 찍은 상해 공기, 오른쪽은 11월 말 같은 곳에서 찍은 창 밖 풍경


침실 창문을 통해 밖을 보면 응당 오른쪽 사진처럼 고가 너머 건물들까지 다 보여야 하거늘, 고가 너머는커녕 고가 안쪽에 있는 건물들도 모호하게 보이는 이 절망적인 풍경. 몇 안 되는 우리 집 스마트 가전 '샤오미 공기청정기'는 세상에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아 겪는 고난과 시련에 정신을 못 차리고 빨간 불을 띄운다. 때마침 온 북경 파견자의 연락. "북경 공기 짱 좋은데?"


코와 목이 계속 적신호를 보내고 공기청정기가 멘붕하던 며칠을 보내면서, 나는 대체 왜 상해가 북경보다 공기질이 나쁜 건지 몰라 자신의 판단력에 회의감이 들기 시작했다. 도대체 실내 난방도 틀지 않는 상해가 왜 북경보다 공기가 안 좋은 거야! 내 기억엔 딱 그맘때, 그러니까 3월 말 즈음 한국의 미세먼지 지수도 엄청났던 것 같다. 그때 깨달았다. 상해와 한국의 수도권은 생각보다 많은 것을 공유하고 있다는 것을.


어찌 됐건 우리 같은 일반 사람들(라오바이씽, 老百姓)이 마음대로 추측할 수 없는 것이 중국의 하늘인지라(이 말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담겨있다), 그저 버티자는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견뎠다. 마스크를 쓰지 않는 중국인들을 보며 현지화를 하겠다고 덩달아 마스크를 쓰지 않은 것이 지금 생각하면 좀 웃기지만.


그렇게 3월이 가고, 4월의 첫날. 1교시 수업이 있는 날이라 일찌감치 눈을 떴는데 어라? 창 밖이 뿌옇지가 않다. 직감적으로 앞으로 이런 날이 흔치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공부하러 학교에 가는 학생의 신분이지만 오늘 같은 날을 놓칠 순 없었다. 책가방 안에 카메라를 넣고 등교했다.



아침의 교정은 참 여유롭다. 책가방 메고 쫄래쫄래 등교해 eMBA 건물에 있는 스타벅스에서 1교시의 졸음을 쫓아줄 아메리카노 한 잔 사들고 교실로 향하는 그 맛! 오늘은 카메라를 장착한 김에 강의실로 가기 전 여기저기 사진을 찍었다. 입학 등록 때 흐렸던 날을 보상이라도 받으려는 듯이.



옛 도서관 건물 근처의 공터에서 한 컷. 상해교통대학의 전신인 남양공학(南洋公学)의 이름이 새겨진 비석이 눈에 띈다. 교정 곳곳에 학교의 옛 역사가 담긴 건물들이 남아있는 점이 이곳을 좋아하게 된 이유 중 하나였다.



아직 봄다운 봄을 맞이하지 못한 상해인지라 나무가 앙상하다고만 생각했는데, 자세히 보니 끄트머리에 분홍빛 꽃들이 매달려있다. 그 나뭇가지들이 공터에 드리운 그림자가 또 하나의 풍경을 만든다. 곧 이 나무에도 더 풍성하게 잎이 돋아나고 또 다른 풍경이 캠퍼스를 채우겠지. 우측 하단의 그림 속 비석은 백주년 기념비다. 이 날은 기념사진을 찍는 일정이 있을 예정인지 기념비 앞에 이미 촬영을 위한 간이 의자가 설치되어 있었다.



볼 땐 예쁘다고 감탄을 하며 사진기를 들이댔는데 막상 그 결과를 보니 좀 실망스럽다. 눈으로 볼 땐 분명 예뻤는데.. 아직까지 그 이름을 알지 못하는 꽃인데, 교정 여기저기에서 그 얼굴을 드러내고 있었다. 효과라도 준 것 같은 느낌의 푸른 하늘과 분홍빛 꽃이 잘 어울린다.



강의실로 수업을 들으러 가던 길에 늘 지나가던 건물. 빨갛고 예쁜 꽃이 피어있는 이 곳은 체육관이다. 이따금 대형 강연 같은 것이 이곳에서 진행되곤 했다.



카메라에 해를 담았다. 싱그러운 초록빛과 햇빛이 어우러진 풍경. 캠퍼스를 거니는 학생들도 눈에 띈다. 교통대 쉬후이 캠퍼스는 사이즈가 참 인간적이다. 자전거를 못 타는 나 같은 사람도 주변 풍경을 보며 마음껏 산책할 수 있을 정도의 크기다. 게다가 캠퍼스는 또 얼마나 예쁜지.



앗! 고양이다. 캠퍼스 곳곳을 그 특유의 걸음걸이로 여유 있게 걷는 길고양이. 볼일이 모두 끝났는지 교문을 통해 유유히 빠져나가는 모습이 마치 이 학교 학생 같다.



수업이 끝나고 집에 들러 책가방을 놓고, 발걸음도 가볍게 오후 일정을 소화하러 집을 나섰다. 오후의 목적지는 서점. 근처의 서점을 검색하니 임시숙소인 호텔이 있던 인민광장까지 가야 큰 서점이 있단다. 거기가 아니면 비교적 규모가 작고 판매하는 서적의 장르가 한정적인 서점들 뿐. 소설책이나 베스트셀러를 사려면 그런 서점을 가도 충분히 구할 수 있지만, 사려는 책이 대형서점이 아니고서는 팔지 않을 것 같은 책이라 난징시루에서 인민광장까지 좀 걷기로 했다. 걸어서 약 30~40분 정도 걸리는 이 길은 어쩌면 상해에 있던 1년 중 내가 가장 많이 걸었던 길일지도 모르겠다.


인민광장(人民广场)으로 향하던 길에 본 목련. 노란 목련은 처음 본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뭔갈 먹을 시간이 되었다. 푸저우루(福州路)를 걷다 중국인들이 줄을 서 있는 샤오빙(烧饼) 집이 눈에 띄어 점심은 샤오빙과 내 소울푸드 쩐주나이차(珍珠奶茶)로 하기로 한다. 탄수화물 폭탄이지만 뭐 어떠랴? 이렇게 많이 걷고 있는데!


중국 사람들이 간단하게 요기하기 위해 많이들 먹는 샤오빙(烧饼)은 직역하면 "구운 빵"이라는 뜻이다. 밀가루 반죽 속에 맛을 더하는 부재료를 넣고 간이 화덕에 구워내는 요리로, 북경 교환학생 때부터 참 좋아했던 먹거리다. 바삭바삭하게 구워낸 아주 얇은 호떡 같은 느낌이라고 생각하면 될 것 같다. 값도 저렴하고 맛도 좋아서, 중국에서 일정 기간 생활한 사람이라면 아마 한 번도 못 먹어본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먹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중국의 각 지역마다 지역 특색의 샤오빙이 있는데, 오늘 내가 먹은 샤오빙은 절강성(浙江省) 특색의 샤오빙인 진윈샤오빙(缙云烧饼)이었다. 토핑은 나의 최애 토핑 메이깐차이(梅干菜). 무청 같은 채소를 소금에 절여 말린 것인데, 바삭한 샤오빙에 짭짤한 맛을 더해줘 꼭 필요한 친구다. 목이 막힐 수도 있으니 쩐주나이차(珍珠奶茶)도 하나 사서 길에서 우걱우걱 먹으며 다음 목적지로 향했다. 누가 봐도 중국인의 모습이다. 현지화 성공!


내돈내산(?) 인증. 뜨끈뜨끈할 때 먹는 샤오빙은 정말이지 꿀맛이다.


배를 채우며 푸저우루를 걸어 도착한 곳은 샹하이슈청(上海书城, 상해 서성). 북경에 있을 땐 씨단(西单)에 있던 투슈따샤(图书大厦, 도서대하)가 크다고 해서 방문했다가 씨단역 앞에 있던 에스컬레이터 달린 육교에 압도당한 기억이 있는데(그때만 해도 - 지금도 그런진 모르겠지만 - 한국에 에스컬레이터 달린 육교는 없었다.), 상해에도 번화가 중 번화가인 인민광장에 그만큼 큰 서점이 있다는 정보를 보고 찾아가게 되었다. 북경은 빌딩(大厦)인데, 상해는 성(城)이다.



상하이슈청(上海书城)은 상해 최초의 대형 서점으로 98년에 문을 열었다. 이곳에 이렇게 대형 서점이 위치하게 되면서 외국 문학 서점(外文书店)이나 고서적 서점(古籍书店), 과학기술 서점(科技书店) 등 전문서적을 다루는 서점들도 덩달아 푸저우루에 위치하게 되었다. 또 교보문고에 핫트랙스가 들어와 있듯 서점이 들어오자 함께 들어온 것이 문구 잡화를 파는 상점들. 푸저우루는 현재 상해의 중화문화거리(中华文化第一街)라는 이름으로 그 역할을 하고 있다.


서점 내부는 저작권 등 문제로 촬영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사진기는 잠시 내려놓고 편하게 책을 구경했다. 층별로 테마에 맞는 책들이 진열되어 있는데, 책의 종류나 서점의 규모가 정말 크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교보문고와 같이 책을 검색할 수 있는 공간이 없어 원하는 책을 찾으려면 해당 코너를 열심히 뒤지거나 직원을 불러 물어봐야 한다. 다만 직원을 찾는 것이 하늘의 별따기라는 점은 비밀.


책을 고르고 계산대에서 계산하면 계산이 완료된 제품이라는 의미로 책에 띠지를 둘러준다. 비닐봉지를 좀 사려고 하니 계산대에는 없다며 1층에 가서 사란다. 환경부담금 내고 비닐봉지 좀 사려는데 찔리게 영수증에는 '关注环保,人人有责(환경보호에는 너나없다)'라는 도장까지 찍어준다.


책을 세 권이나 샀는데 담아갈 가방이 없어 어쩔 수 없이 봉투를 사야 하니 1층으로 갔다. 출입문 앞 경비원 아저씨가 계신 곳에서 비닐봉지를 파는데, 재밌는 건 이 비닐이 서점 비닐이 아니다. 징루이교육(精锐教育)이라는 교육업체에서 제작한 비닐봉지인데, 서점 방문객에게 홍보도 할 겸 비닐봉지를 제공하는 모양이다. 결국 서점 자체적으로 만드는 봉투는 아예 없는 셈이다. 환경보호에 대한 관심이 느껴지면서도, 한편으론 '봉투는 내가 만든 게 아니'라는 사실을 통해 책임을 회피하려는 모습도 보인다.


서점에 학부형이 많이 와서 그런지 교육업체의 광고가 있는 비닐봉지


한자 필사를 하면서 당시(唐诗)도 좀 외워볼 요량으로 해서(楷书) 필사 책과 당시 삼백수(唐诗三百首) 책을 샀다. 또 곧 떠날 난징(南京, 남경)으로의 지역 연구를 대비하여 미리 공부를 좀 하려고 난징 여행책도 한 권 샀다. 한국에서 출판한 여행책보다는 좀 더 로컬 정보가 많이 들어가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샀는데, 막상 크게 차이가 없어서 실망했던 기억. 이후 지역 연구 갈 때는 이런 여행책을 사기보다는 마펑워(马蜂窝)나 씨트립(携程) 어플을 훨씬 많이 활용했다.



집으로 돌아와 필사 책을 꺼내 보니 파란 펜이 하나 들어있다. 특수 펜이라고 하는데, 필사 용지에 대고 쓰면 일정 시간이 지나면 자동으로 말라서 글자가 사라진다고 한다. 마술 잉크라니! 아이들이 반복적으로 글씨 연습을 할 수 있게 하기 위함인 것 같았다. 아직 해서(楷书)의 '해'자도 모르지만, 칼을 뽑았으니 무라도 썰자는 마음으로 사 온 첫날 필사를 한 문단 해보았다.



고서(古书) 속 문장들을 발췌해 필사하는 책인데, 어라? 첫 글이 어째 낯이 익다. <시경> 속 문장인데, '요조숙녀 군자호구(窈窕淑女,君子好逑)'라는 말이 포함된 관저(关雎)의 한 구절이다. <환락송(欢乐颂)> 속 부모님 말 잘 듣는 모범생 딸도 이 구절의 제목을 따 이름이 관쥐얼(关雎尔)이지. 왕카이(王凯)의 노래를 들으며 파란 펜으로 글씨를 쓱쓱 쓰고 있으니 마음도 진정되고 편해진다. 며칠 지나 다시 보니 정말 글씨가 지워져 있다. 가짜를 산 건 아닌가 보다.



어느 공기 좋던 날의 1분도 낭비하지 않았던 하루 기록은 그리운 난징시루의 저녁 풍경으로 갈음한다. 나무에 조명이 아직 눈송이 모양인 것을 보면 상해 사람들은 비록 4월 1일이어도 아직 봄이 오지 않았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물론 날씨가 춥기도 했고. ㅎㅎ




[중문 일기 in 위챗 모멘트(朋友圈)]

(譯) 오늘 날씨가 정말 좋았다. 공기질도 좋고! 상해에 온 뒤 정말 보기 힘든 날씨였다!



매거진의 이전글 제 첫 번째 중국 친구를 소개합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