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 29번의 잠 - 22 로마 오직, 비테르보 Viterbo
꼭 21번의 잠, 로마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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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비테르보로 시작해 비테르보로 끝이 난다
로마에 오래 일정을 두고 있을 예정이라면
낡고 오래된 것을 사랑하는 나와 취향이 다르지 않다면
비테르보는 꼭 한 번 가봐야 할 곳이다 나에게도 오늘 그 한 곳이 추가되었다
이미 사랑에 빠진 곳을 제외한다면 최우선 순위에 두고 나는 이 도시를
오래 잊을 수 없을 것이고 오래 그리워할 것이다
그곳의 흔적은 기억보다 사진으로 또렷하게 남아
곳곳을 놓치지 않고 수없이 셔터를 눌러대며 찍은 사진들을 다시 들여다보니
다소 엉성해지고 흐려진 기억의 조각이 맞춰지고 비로소 생생하게 완성된다
스크롤 압박을 미리 예고해 두지만 이는 일부에 지나지 않고
직접 이곳을 밟아보지 않아 나의 이런 감정이 과잉으로 느껴지거나
(나에겐 하나도 똑같지 않고 비슷하지도 않지만) 비슷비슷해 보이는 사진들의 열거가
의문으로 남지 않을까 염려될 뿐이다
로마에서 비테르보로 가는 열차는 1시간 간격으로 운행해서
시간의 선택폭이 넓지만 오늘 하루를 온전히 이곳에 투자하겠다는 마음으로
아침 일찍 출발하는 기차표를 끊었다 그리고 당연히 며칠 전의 교훈으로
pm18:10에 로마로 돌아오는 기차표도 미리 끊어두었다
일정이 빡빡한 경우를 위해 tip을 하나 남기자면
이 기차는 브라치아노 호수를 지나쳐 가기 때문에 해가 긴 날의 여행이라면
두 곳을 한 날에 둘러보는 일정을 짜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아침에 일어났을 때 하늘이 맑고 날씨가 춥지 않아 미리 계획하지 않고도
주저 없이 아끼고 미뤄두었던 이곳으로 가기로 결정했고
유럽에서 기차를 탈 때에는 꼭 2층에 앉아서 간다
그러므로 오늘도 나는 이층 창가 좌석에 앉아 있다
처음 도착했을 때에는 별 다를 것 없다는 생각을 할지도 모른다
나도 그랬으니까 그렇지만 의심을 거두고 조금만 서둘러 도시의 속으로 들어가면
세월을 그대로 품고 있는 낡은 돌들의 건물과 길들 사이에서
금방 두근거리기 시작할 것이다
비테르보는 로마의 오랜 시간이 새로운 시간의 손을 거의 타지 않고
중세시대의 모습 그대로 잘 보존되어 있는 도시 중의 하나이다
그 모습이 로마의 거대한 문화유산들을 떠올리면 소소하게 느껴질지도 모르지만
이 낡은 도시의 품속에 머물다 보면 외부의 어떤 것에 물들지 않고
순수하게 늙어 간 그 모습에 어느새 반하고 만다
오래된 벽돌과 무너진 벽을 그대로 품고 있는 도시를 천천히 걸으며
현재의 삶의 불편함을 감수하고 과거의 삶을 기꺼이 껴안고 살아가고 있는
이 도시와 이곳 사람들에게 존경의 마음을 전하고 싶어진다
낡고 오래된 것은 아름답다 새롭고 세련된 것만이 아름다움의 가치를 가질 수 있다고
단정할 수 없다 어느 것 하나 조화롭지 않은 것이 없고 우아함이 넘치는
이 풍경 속에 있으면 그 사실을 새삼 깨달을 수 있다
오늘은 햇빛까지 조화로워 모든 각도에서 다른 풍경으로 아름답게
빛나는 모습들이 빠짐없이 사랑스럽다
하염없이 골목을 지나고 또 다른 골목을 발견하고
순전히 내 의지로 한없이 헤매고 다니는 이 시간들로 인해 꺼질 듯하기도 했던
감성이 되살아나고 좋은 기운이 몸속에 가득 채워지는 기분을 느낀다
눈으로 보는 모든 것들이 영혼을 건드려 깨우는 느낌이다
골목을 지나다가 작은 분수가 있는 동그란 쉼터의 공간을 만나고
다른 골목으로 들어섰다가 또 다른 분수가 있는 길쭉한 쉼터의 공간을 만나고
그러다 탁 트인 광장에 다다른다 그곳에는 골목골목의 모두를 위한
(이탈리아에서는 역시 흔한) 교회가 있고 평일의 고요한 그곳에
들러 잠시 나에겐 선물 같은 이곳의 안녕을 기도한다
다시 광장으로 나와 광장에 다다르게 해 주었던 골목이 아닌
맞은편의 다른 골목으로 들어간다 저곳은 또 어떤 풍경을 품고 있을까 설레며
골목길 여기저기에서 현재 진행형의 다양한 삶들이 목격된다
하나도 다를 바 없을 같은 시대와 시간을 지나고 있는 삶들
그런데도 그들의 삶의 어떤 부분은 나와 확연히 다르지 않을까 생각하게 된다
바쁘게 몰아치는 도시의 삶과 다르게 흐르는 시골에서의 삶의 시간을 떠올릴 때처럼
모든 사람이 그렇지는 않더라도 어쩌면 사람들은
서로가 서로의 시간을 동경하고 때때로 그 시간을 훔치거나 바꿔치기하고
싶어 하지 않을까 자신에게 운명처럼 주어진 지금의 행복을 눈치채지 못하고 말이다
두 가지 의미의 미련이 모두, 사람에게서는 영 잘 떨쳐지지가 않으니까
골목을 지나와 또 다른 넓은 광장에 다다랐다
좁은 길들을 걷다 마주한 뻥 뚫린 공간이 광활하게 느껴진다
이 도시는 말 그대로 마을이나 동네보다 큰 단위로 분류되는 곳이라
걷다가 이르는 곳곳이 다른 공간감으로 다가와서
오래된 기억 속에서도 조각조각 각기 다른 곳으로 떠올랐던 장면들이 합쳐지며
모두 이곳 비테르보에서 보았던 풍경이었다는 것을 사진을 보며
다시금 깨달아 기억을 새로이 정렬하고 있다
오래 걸어 광장을 건너와 또 다른 공간으로 들어간다
쉼터나 광장에서 몇몇의 사람을 지나친 것과
때때로 돌길이 도로를 만나 지나는 차들을 살피는 것 외에는
인적이 드문 이곳에서 골목을 다니는 동안은 인기척조차 느낄 수 없다
그러니 이 오래된 역사의 도시를 걷는 동안 마치 현재인 중세 도시를
미래의 내가 어떻게 걷고 있는 걸까 허튼 공상에 빠지게 된다
미래에서 왔다면 이미 현재의 모든 걸 알고 있다면 좋을 텐데
나는 길을 걸으며 마주하는 역사적인 건물들의 흔적을 경이로운 시선으로
꼼꼼히 살피면서도 화사한 날씨에 급히 결정을 내려 이곳에 오느라
아쉽게도 이곳의 어떤 것도 제대로 알아두지 못해
뭣도 모르는 채로 연거푸 감탄만 해대고 있다
그러다 이 길의 끝자락에서 가장 큰 감탄사를 내뱉게 된다
골목의 비좁은 사이로 뭔가 근사한 풍경이 빼꼼 얼굴을 드러낸 것이다
홀리듯 그곳을 따라간 곳에는 또 하나의 커다란 공간이 펼쳐져 있었고
그 공간의 건너편 저 멀리에 오랜 성곽의 아름다운 자태가
서둘러 오라며 나를 종용하고 있었다
내가 선 곳은 상상하지도 못했는데 지대가 높은 쪽이었다
저 아래 광장에서 올려다보면 그랬다
그리고 내려다본 광장은 지금까지 본 그 어떤 광장보다 크고
조금은 현재의 편의가 더해진, 아마도 중심가인 것 같았다
사실 그건 중요하지 않다 나는 커다란 중심가가 궁금한 게 아니고
이 크고 긴 공간을 지나 저 너머의 성으로 가는 게 시급했다
다리가 조금 아파오기 시작했지만
어디 앉아 잠시 쉬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오로지 직진
보기에 가까워 보였던 곳은 카메라로 줌인을 하는 것처럼
빠르고 쉽게 내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길을 내려가 닿은 폭이 큰 도로를 몇 번 가로지르고 난 뒤에는
좀 전엔 보이지 않았던 넓은 잔디와 커다란 주차장을 마주했다 잘 가꿔진 잔디는
콘크리트 바닥보다 반갑고 눈도 정화됐지만 그래도 아직 갈길이 남았다는 게
더 현실로 다가왔다 서두를 것 없는데 조금 천천히 쉬엄쉬엄 가도 되잖아
그런 생각도 들었지만 내가 비테르보의 어디까지 이르렀는지 알 수가 없어
돌아가야 하는 기차 시간이 아마도 나를 초조하게 만든 것 같다
정말 빠짐없이 속속들이 비테르보의 모든 곳에 이르고 싶었기 때문에
결국 성벽에 오른다
그곳에서 내가 서있던 맞은편의 지나 온 비테르보를 바라본다
여기서 지치지 않고 성벽을 돌아 길을 들어서면
아무 정보 없이 갔다고 해도 범상치 않은 장소이며 건축물임을 감지할 수 있는
아름다운 공간이 나타난다
(결국 비테르보는 잊어버리지 않게 꾸역꾸역 기억 깊이 심어 두고
돌아와 더 많은 이야기들을 찾아내야 했는데)
비테르보는 20여 년 동안 로마 교황청이 자리했던 곳으로
이곳(로렌조 광장)에서는 아름다운 로지아 건축 양식과
두우모 디 비테르보 성당의 우아한 아름다움을 목격할 수 있다
하지만 그 당시에는 그 사실을 모른 채 나는 본능적으로
이곳에 가장 오랜 시간을 머무르며 중세의 그때를 깊이 느끼고 있었다
그냥 어느 공간 한쪽으로 잠시 들어왔을 뿐인데 지금까지 걸어 온 모든 길들이
끊어지고 외부와 동떨어진 신비로운 시공간에 머무는 느낌이었다
시계를 매번 들여다보지 않아도 맑은 하늘의 겨울 해가
수시로 돌아가야 하는 시간을 상기시켜 주고 있다
오후가 깊었다는 걸 느낌으로 알았고 다시 조금 서두른다
아직 가야 할 곳이 남아 있으므로 좀더 힘을 낸다
모든 길들은 하나같이 다른 아름다움을 보여 주었다 골목에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곳이라는 것을 상기시켜주는 사랑스러움과 반짝거리는
독특함이 오랜 벽돌과 조화롭게 새겨져 있었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동네 아이들이 여럿 몰려와 외지인이 드문 계절의
낯선 이의 행동을 호기심 어린 눈으로 지켜봤다
그렇지만 로마에서 본 호기심의 눈동자와는 달랐고
흘낏 엿보는 그들의 눈빛에는 수줍음이 함께 묻어났다
살짝 웃어주었다 아이들이 머뭇거리며 내가 골목을 떠날 때까지
오래 지켜보는 것으로 인사를 건넸다
아름다운 모든 풍경을 담을 시간이 없는 것이 너무도 아쉽다
해가 긴 어느 계절에 트래비 분수의 약속대로 또다시 돌아오게 된다면
짙은 가을빛을 닮은 이곳이 활기로 빛나는 모습을 보고 싶고 그 속에서
나도 차분함을 조금 지우고 여유롭고 즐거운 얼굴로 조우하고 싶다
골목을 벗어나고 이제 중세의 어느 순간에서도 벗어나
기차를 타고 현실로 돌아가야 하는 시간
하늘의 물드는 빛깔이 심상치 않다 이곳에서 멋진 해 질 녘까지 볼 수 있다면
더없는 마무리일 텐데 그런 생각을 했는데 그 소망은 기차역에 다다라 실현되었다
마지막까지 이렇게 멋진 선물꾸러미를 잔뜩 안겨주다니
내 품이 넘치도록 받은 행복을 오래 잊지 못할 것 같다
(그리고 역시 아직까지도 그 감정은 흐릿하지 않고 또렷하다
기억보다 감정은 더 솔직하고 쉽게 사라지지 않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