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 29번의 잠 - 27 로마 버스를타고가다마음에들면+그냥내려서즉흥적으로
꼭 26번의 잠, 로마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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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머니에게 마지막 세탁을 부탁드렸다
로마를 떠나는 날의 이른 기차 시간을 떠올린다면 오늘을 포함시켜도
길게 느껴졌던 로마에서의 시간이 3일밖에 남지 않았다
그걸 모르지 않아서 서서히 이별을 준비 중이다
오늘도 특정 지역을 꼽아 계획적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로마 근교에 갈 만한 곳이 없지 않지만 마음이 이끄는 정든 장소들을
끊임없이 배회하기를 아까워하지 않는다
진실의 입을 보러 갔던 길에서 그 옆의 아주 아주 높은 담벼락 위로
로마 특유의 크고 긴 나무들이 즐비한 호기심 솟구치는 장면을 목격했었다
다음 일정이 있었던 터라 그게 뭔지 그곳이 어떤 곳인지 기회가 되면
확인해 봐야겠다고 생각했었는데 그때가 바로 오늘이 되었다
트램을 타고 그 장면이 나타나길 기다렸다가가 얼른 내린다
내린 곳이 어딘지 그 길이 어디로 이어지는지 알 수 없지만
그걸 알기 위해 가는 길 위의 걸음이 즐겁다
로마 지도의 모든 장소와 모든 길의 이름을 안다면 좋겠지만
어차피 내가 사는 곳의 주소 외에는 다 잊어버릴 부질없는 기억
사는 동안 수없이 거쳐갔던 사물과 사람과 장소의 모든 이름을
결국 기억하지 못하는 것과 다르지 않을 결론이라서 굳이
지도로 확인해가며 이름을 외워가며 다니지 않는다
(대안으로 우연히 마주친 마음에 둔 거리의 이름은
신뢰하기 힘든 내 기억 속이 아니라 사진 속에 박제해 두었다)
그럼에도 이름을 기억하지 않는 이에게 길은
아름다운 풍경을 스스럼없이 열어 보이고 예상하지 못한 멋진 장소에
이를 수 있도록 우리를 안내한다 길의 포용력은 늘 옹졸한 사람의 마음을 능가한다
오래된 골목의 오래된 교회, 교회 옆으로 누구에게나 활짝 열린
아름드리 오렌지 나무의 정원 Giardino degli Aranci, 그곳에서
내려다 보이는 연인처럼 다정한 도시와 강 풍경
관심을 가지고 마음을 다해 눈 맞추면 속내를 보여주는 도시가
사람을 대하는 무엇과 크게 다르지 않다
올라왔던 길의 반대쪽으로 걷는 내리막길에서도
놓칠 수도 있었던 내 취향의 소소한 예쁨이 가득하다
버스를 타고 콜로세움에서 내렸다
그렇지만 지금의 콜로세움은 나에겐 정류장으로서의 역할 혹은
길 위의 배경으로서의 직분만 다할 뿐이다
콜로세움 건너편 오르막길로 올라 뒤편의 숨어있는 길로 찾아든다
이건 지구 어디서건 늘 내가 좋아하는 일이다
즉흥적인 발자국을 어느 길 위에 내 마음대로 찍는 것 그 자체가 즐겁고
시간이 한정 없이 주어진다면 특별한 경우를 제외한 대부분의 시간을 그렇게
즉흥적인 즐거움에 기대어 맡기고 싶다
본 적 없는 각도의 풍경 상상하지 못한 찰나의 장면
아무렇게나 굴지 않으면 발견할 수 없을 것들이 소중하다
길이든 시간이든 지금으로 인해 놓치는 다른 어떤 것들이든
잃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으면 언제나 그것을 채워주는 무엇이 있다
길과 길 사이로 건물과 건물 사이로 눈에 익은 광장이 보인다
좁은 길에서 탁 트인 베네치아 광장으로 나와서는
기념관이 멋지게 보이는 측면의 공원 벤치에 오래 앉아
움직이지 않는 건축물과 움직이는 사람들을 맥락 없이 바라봤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걷는 것도 좋고 이렇게
시간이 가거나 말거나 퍼지고 앉아 그저 그 순간을 온전히 느끼는 것도 좋다
포로 로마노를 편애하느라 늘 지나쳐 왔던
차선이 어마어마한 큰 대로변의 건너편 유적지를 눈여겨보기로 한다
우리가 늘 지나치는 길에서 앞과 목적만 보고 가면 놓치는 것들에 대해서는
길에서나 삶에서나 닮지 않은 것이 없다
포로 아우구스토 Foro di Augusto
지나쳤다면 끝내 알 수 없었을 빨간 꽃이 도드라지는 회갈빛 풍경이
사랑을 주지 못한 아픈 손가락 같은 자식처럼 아리다
트램이 아니라 버스를 타야 한다면 집 앞 정거장보다 한 정거장 전에 내려
일요일의 미사를 훔쳐봤던 교회 앞 광장으로 간다
드라마틱하게 해가 지는 하늘 위로 점점이 켜지는 조명은 대부분
집에 갈 시간을 알려주는 알람과 같았는데 귀가가 아까운 오늘 같은 날에는
버스를 타야만 한다 추위도 어둠도 이제야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 게
아쉬울 뿐 오늘도 밤을 가로질러 나보나 광장과의 재회를 서두른다
딱딱한 건물이 늘어선 길을 빠져나와 유유히 강이 흐르는 순한 길 위로 간다
떼베레 강은 이곳에서 참 아름답다 강 주변으로 늘어선 진귀하고 멋진
건축물들 때문이겠지만 강이 품은 그것의 그림자를 보는 일이
밤의 강 산책에서는 내가 가장 사랑하는 일이다
지난번 초입의 다리에서 봤던 작고 아름다운 이솔라Isola (섬)를 이 밤에
다시 보기 위해 강을 따라 걷는다 소음으로부터 멀어지는 한적한
산책길에는 내 발자국 소리와 빠르게 흐르는 강물의 소리와
가끔씩 차분한 공기를 헤치고 불어 드는 바람소리만 머문다
내 발자국 소리를 멈추고 다리에 가만히 기대어 서서
떼베레 강이 거울처럼 비추는 다리의 그림자와 다리가 몸이 붙은 쌍둥이처럼
서로를 아름답게 옥죄어 품은 모습을 바라본다 눈과 마음이 쉽게 놓지 못하는 이 순간들
몇 되지 않는 로마의 밤의 기억이 그리우면 어쩌나
벌써 마음이 아프다 어떻게 하면 이별이 슬프지 않을 수 있을까
답 없는 질문을 하는 밤이 깊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