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2월 3일

꼭 29번의 잠 - (미완성의 나머지) 8 리옹

by 윤에이치제이

꼭 7번의 잠, 리옹 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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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호 광장에서였을 것이다

고등학생 정도로 보이는 남녀 아이들이 지나가며

일본어로 인사를 하고 뭐라고 계속 말을 거는데

느낌으로 알았다 그건 반가움의 대화가 아니라 비아냥이 섞인 장난이라는


내 경우는 휘말리거나 대응하지 않는 편이라 그냥 지나쳐 가려는데

그들은 멈출 생각이 없는지 뒤통수에 대고 계속 떠들어 댄다

(내가 알기로는 리옹에 일본인들이 많이 거주한다고 하고 공원에서도 산책하는

일본인 엄마와 아이들을 많이 봤다 그들은 이곳에 섞여 잘 살고 있는 것 아니었나)


뒤를 돌아봤다 그들은 이제야 자기들에게 대꾸를 해 주나 싶어

싱글거리며 내 대답을 기다렸다

나는 일본인이 아니야 난 한국에서 왔어 한국인이야

내 대답에 순간 그들의 표정이 얼어버린다 왜?

확신이 실수라서 당황한 건가 일본과 한국의 관계를 알아서 그런 건가

아니면 한국인에 대해서는 별 감정이 없어서인가

그들은 굳어진 표정을 풀지 못한 채 미안하다는 말을 하며

어정쩡하고 조심스러운 몸짓으로 뒤돌아 길을 갔다


프랑스가 아무리 다국적 민족이 어울려 살고 있는 나라라고 해도 역시

진보적인 국민성을 지향하는 것과 반비례하여 인종차별이 아예 없을 수는 없겠지

사실 여행하면서 그걸 느낀 적 없었던 건 아닌데

오늘 할 말을 한 건 잘한 것 같다





구도심의 어느 길을 걷는다

첫날 세세하게 보지 못한 개성 넘치는 장면들을 많이 발견한다

그래서 길을 걷는다는 건 산책을 한다는 건 반복을 해도 자주 새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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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숀 강이 더 좋은가 보다 세 번째 이곳에 왔다

아마도 론 강의 풍경보다는 역사적인 건물들이 멋진 배경으로 강 풍경을

더 아름답게 만드는 그 이유 때문이겠지

강바람을 맞으며 멍하니 풍경을 주시하다가 테호 광장을 거쳐 잠시 집으로 돌아왔다

어제에 이어 바람이 강한 탓이다 기온이 낮은 건 아닌데 아직 물러나지 않은

겨울의 바람이 꽤 매서워 살짝 어질어질하다 덕분에 하늘은 멋지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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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방을 쓸 일이 없을 거라고 말해 두었는데

속을 따뜻하게 데워야 할 것 같아 로마에서 사 왔던

나비를 의미하는 이탈리아어 Ffarfalla에서 파생된 파스타 파르팔레 Farfalle

보다 더 작고 앙증맞은 파르팔리네 Farfalline 일부를 국물 요리 형태로 끓여 먹었다


늦은 오후에 다시 나선다

론 강을 건널 때 해가 지려고 하는 시간인 경우가 많다 물론

집으로 가기 위해서든 중심부로 가기 위해서든 반드시 론 강의 다리 위를 지나야 하지만


숀 강으로 이어진 골목으로 들어서기 전 어린 왕자 동상이 있는 쪽의

벨쿠르 광장 끝 쪽에 있는 3층짜리 (지하를 합치면 4, 5층인가) 대형 서점에 들른다

여러 버전의 어린 왕자 책 중 무엇을 사야 가장 만족스러울지

오래 머물며 고민하는 건 내게 주는 선물 같은 행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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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에 이어 해 지는 시간에 다시 찾은 숀 강

오후의 햇빛이 구름과의 지분 다툼 끝에 묘하게 지상으로 내리 꽂혀

일부에만 든 빛이 만드는 풍경이 어쩌다가 너무 멋지다


멀리 푸흐비에흐 언덕을 올라다보고 돌아서면서 지금은

그곳에 오르려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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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를 건너지 않은 길 쪽 구도심을 구경하며 지나다가 언덕으로 오르는 길 앞에 선다

저절로 내 앞에 나타난 계단의 유혹 결국 노을을 보기 위해 그 길을 오르기로 한다

그래 그 풍경을 어떻게, 그 풍경에서 보는 해 질 녘의 노을을 어떻게, 모른 척한단 말인가

바람이 아무리 심하고 몸을 가누기 힘들어도 정지된 사진 속에서는

하늘은 맑을 테고 이런 날의 노을은 뜨는 빛과 다른 눈부심으로 짙은 감동을 안겨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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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나 걸음 하지 않았다면 큰일 날 뻔했다 못 봤으면 몰랐을 테니

후회할 수도 없었겠지만 내 의지를 부추긴 언덕으로 가는 길 앞의 결심이

지금 너무나도 고맙다 그리고

내 눈앞에 펼쳐진 믿을 수 없는 광경 그것은 그냥 넋을 놓고 응시하는 수밖에

이 노을빛의 축제가 끝날 때까지 그저 바라보는 수밖에 없다


해가 사라지고도 아직 남아있는 밝음 속의 풍경을 또 계속 바라보다가

사방이 완전히 어둠에 잠기고 다른 빛들이 다시 어둠을 채울 때까지 또

하염없이 언덕 아래의 도시를 바라보고 바라보고 바라보기만 계속했다 아무래도

이 감정 이 감동 이 울림이 쉽게 가라앉을 것 같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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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빛나는 언덕을 뒤로하고 다시 발랄한 길로 내려와 걷는데

내내 시선이 가는 곳은 레스토랑이다 대체로

혼자 들어갈 자신이 없는 경우가 많지만 오늘은 리옹에서의 마지막 날이고

든든히 잘 먹어두고 싶었고 들뜬 기분 탓에 용기가 뒤로 숨지 않아

길을 걷다 눈에 보이는 어느 레스토랑의 문을 열고 들어가

자리를 안내받고 앉았는데 시간 때문인지 계절 때문인지 손님은 나 밖에 없다


음식을 내 오는 이는 친절했고 코스를 시켰는데 시간을 두고 천천히 놓이는 음식들

음식이 나올 때마다 설명도 충분히 덧붙여 준다

유명한 레스토랑이거나 꼭 먹어봐야 하는 음식이거나 그런 것 없이

그냥 들어간 곳에서 이 정도의 대접과 이 정도의 맛은 만족스러웠다

서비스 비용 포함 (18.09 + 1.81) 19.90 유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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든든히 배를 채운 탓인지 숀 강의 강바람이 이전의 두 번보다 사납지 않다

이 풍경도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니 쉽게 발이 떨어지지 않는다

리옹도 이번에 처음 온 곳인데 진즉이 아니었더라도 지금이라도 이곳을

찾아낼 수 있어서 정말 다행이다 나는 여기 다시 오고 싶다


처음으로 가야 할 곳과 다시 와야 할 곳 그 모든 곳들을 위한 시간이 얼마나 있을까

만약 내게 주어진 시간이 한정적이라면 나는

새로운 곳보다는 다시 오고 싶은 곳을 위해 그 시간을 쓸 것이다

그때 리옹으로 다시 돌아올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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