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여섯 번째 일상
나는 재료 본연의 맛을 최대한 살려 음미하며 먹는다는 말을 앞서 한 것으로 기억한다. 미식가라던가 맛에 조예가 깊다든가 그런 건 결코 아니다. 어림없다. 나는 지금 가진 재료, 지금 먹을 수 있는 정도에 만족하는 사람이고 궁극의 맛을 쫓지도 않는 사람이다. 하다못해 맛집 투어도 그다지 즐기지 않는다.
순수한 욕구가 일어 문을 박차고 나섰던 건 빵집 투어가 거의 전부다. 빵은 여전히, 어떤 나쁜 소문에도 결코 순정이 흔들리지 않을 평생 짝사랑하는 사람과 같으니까. 그런 대상에게는 좀처럼 실망하는 법 없이 오래 좋아하는 마음을 지키고 싶다.
물론 낯선 장소를 여행하는 동안에는 한두 군데 정도 유명세로부터 보장된 맛을 찾아다녀보고 먹어보는 시도를 하기도 한다. 그것도 한때였던 것 같다. 지금은 제철 재료로 만드는 적정 수준의 가정식에 충분히 만족한다. 말했듯이 재료 본연의 맛을 살려.
막 감자를 삶다가 든 생각이다. 소금을 넣지 않는 나의 방식을 상기하며.
옥수수를 삶을 때도 아무것도 넣지 않는다. 고구마는 누구나 그러니까. 대신 고구마에 김치를 싸서 베어 무는 경우도 없다. 이미 말했듯 향까지 먹는 버섯류의 재료에는 최소한의 소금과 후추 간만 한다. 만두나 전이나 튀김도 간장에 잘 찍어먹지 않는다. 애초에 간을 제대로 하지 못해서 엄청나게 싱겁거나 맛이 형편없지 않은 이상 소스는 사양하는 편이다.
회는 고추냉이 간장을 살짝만 찍고 먹다가 물리면 (부산사람이 회를 먹으면 가능한 상황이다) 그제야 초장에 비벼 쌈을 싸 먹는다. 또 뭐가 있을까. 고기도 양념보다는 그냥 구워 먹는 걸 더 선호하고. 멸치로 반찬을 만들기도 하지만 바싹 볶아서 그냥 먹거나 고추장에 찍어먹는 걸 더 좋아한다. 오이김치는 잘하지 못해서 만들지 않는 거지만 오이는 장 없이 그냥 먹어도 맛있고 그래야 입안이 개운해진다. 비슷한 맥락으로 마요네즈 없이 먹는 샐러리가 있다. 사실 생으로 먹을 수 있는 야채는 맨 밥과 양념 진한 반찬으로 차려지는 경우가 대부분인 밥상에서 상큼한 입가심용으로 그만이다. 야채로 샐러드를 만들어 먹을 때도 마요네즈나 케첩이나 시판용 드레싱을 사용하는 일은 없다.
그러고 보니 집 냉장고에는 소스라 할 것이 거의 없다.
내가 가장 좋아하고 즐겨 먹는 소스는 고추장, 간장, 된장 같은 기본 장. 거기에 수시로 만들어 두는 야채 간장(소신 있게 한 가지 야채를 재운), 쌈장(고추장, 다진 마늘, 깨, 꿀, 참기름을 넣은), 오일 드레싱(올리브오일, 백포도 식초, 꿀, 바질, 소금, 후추를 잘 섞은), 간장소스(적정 비율의 진간장, 들기름이나 참기름, 매실액이나 꿀, 식초, 깨로 만든) 정도가 최선인 것 같다.
문득 옛날 사라다나 (이건 이렇게 써야만 한다) 에그 샌드위치나 게살 마요가 먹고 싶을 때가 있는데 그럴 때는 마요네즈를 (그래도 가장 순수한(?) 상태의 소스라는 혼자만의 생각으로) 가장 작은 사이즈로 구입한다. 1,2년에 한 번 정도랄까.
부엌 장에는 설탕도 없다. 단맛은 매실액과 꿀로 대체한다. 소금은 작은 봉지를 사 두면 1년도 넘게 사용한다. 소금보다는 새우젓과 간장을 사용해서다. 나는 건강식 애호가도 아니다. 그냥 요리에서의 설탕 단맛과 소금 짠맛을 좋아하지 않을 뿐이다.
그런데 나의 이런 음식 취향을 고백할 때 종종 누군가의 공격을 받곤 하는데, (이 이야기는 또 다른 새로운 글에서 자세하게 언급될 예정이다. 일종의 스포일러) 기름에 부치고 튀긴 요리를 좋아하지 않으면서 치킨엔 환장하는 것처럼, 단맛 가득한 요리는 좋아하지 않으면서 초콜릿은 좀 달고 산다. 하지만 그 정도의 모순, 예외는 괜찮지 않은가.
나의 방식은 어쩌면 다수보다는 훨씬 적은 수의 사람들이 선호하는 방식일 수도 있다. 하지만 요즘은 시절이 달라졌다. 다수가 쫓는 것들이 모두 옳고 좋고 따라야 하는 것은 아닌 것이다. 소수가 추구하는 것들도 옳고 좋고, 따르거나 말거나와 상관없이 인정받아야 한다는 생각이 지배적인 요즘이다. 난 그렇게 느끼고 생각하는데 아니라고 반박하면 좀 슬플 것 같다. 긍정적인 변화를 부정당하는 거니까.
여하튼 모두에게 당연히 받아들여지는 생각은 아닐지 몰라도 다수의 무언가에 갇혀 나머지를 배척하는 것은 이제 너무 촌스러운 삶의 방식이다. 그들 삶의 역사가 그래 왔던 사람들과, 여전히 오래 고인 것을 고수하는 사람들과, 마음과 달리 잘 고쳐지지 않는 사람들이 비난받아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들의 방식만 인정하고 그 외의 것들은 싸잡아 비난한다면 그런 사람들에게는 답이 없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러니까’라는 문장이 곧 생각인 사람과 단순한 습관이나 행동의 차이에 대해 언쟁을 시작했다가, 서로를 설득할 수 없는 문제를 문제 삼고 있구나, 이 대화가 더없이 좋은 방향으로 진전되는 것은 무리구나, 싶었을 때 좌절감이 들었다. 하지만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할 수 있을까. 그 순간의 나의 확고함이 그렇듯 상대의 확고함도 쉽게 무너뜨릴 수 없고 그래서도 안 되는 걸. 안타깝지만 이해를 구하려는 노력이 실패했을 때 동질의 대화는 다시 시작되지 않았다. 이 좌절감에 관한 이야기가 그와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에게 소수의 취향을 인정받으려는 항의처럼 느껴지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는 말을 믿는 사람이라고도 고백했다.
그다지 열심히 하지 않는, 대국민 톡의 프로필에 오래 이런 글을 적어 두었다.
‘생각은 고집이 세다. 생각은 잘 바뀌지 않고 그 생각을 가진 사람은 더 바뀌지 않는다. 노력은 자주 헛일이 된다.’
오래 전시하고 있는 것은 여전히 그때의 감정의 결론이 유효하기 때문이다. 그때, 친한 지인에게서 뿐만 아니라 누구보다도 가족으로부터 마음의 상처를 받았을 때, 끓어오르는 섭섭한 마음을 표출할 길이 없어 글로 적어두었고 시간이 좀 더 흐른 뒤에도 풀어지지 않은 그 마음이 굳어져 여태 거기에 남아있다.
사람은 원래 가족이나 가족처럼 끈끈한 사람에게서 더 쉽게 상처받는다. 누구보다 이해받을 수 있다고 믿는 관계에서는 그렇지 않나. 대신 쓴 말도 서슴없이 할 수 있는 그런 관계이기에 어쩌면 그들이 낸 생채기가 좀 더 오래 묵어버리는 게 아닌가 싶다.
그렇다고 박제된 글 속에 그때의 섭섭함이 영원히 지속되는 건 아니다. 왜냐면,
불특정 다수에게 전시되는 글이기에 조금은 순화되고 정리된 생각을 적어두었고, 누구보다 내가 더 자주 들여다보고 곱씹으면서, 그건 누구에게도 적용되면서 무엇보다 나에게도 예외 없는 문장들이라는 생각을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조금만 분노의 마음을 거두고 관계 속에서 역지사지를 실천하려는 노력을 애써 하다 보면, 타인에게 느끼는 불편한 감정들의 갖가지 이유를 그들 역시도 나에게 느끼지 않겠느냐는 폭넓은 생각과 마음을 갖는 것이 가능해진다. 물론 그게 쉬운 일은 아니다. 우리는 아무 일 없이 평온한 상태에서야 확장시킬 수 있는 폭넓은 이해심을 막상 감정이 과잉되는 상황에 닥치면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는 인간이니까. 우리 중 누구라도 모든 일에 쉽게 해탈할 수는 없으니까. 우리는 법적 성인(成人) 일뿐, 인간사 희로애락을 초월한 성인(聖人)이 아니니까.
인간은 독하게 마음먹으면 변하기도 한다는 말에 이의 없다는 입장도 내비친 바 있다. 대신 변할 수 있는 건 대체로 몸이 기억하는 습관이나 뿌리가 깊지 않은 생각들 같다.
사람이란, 모름지기, 오랜 시간 동안 스스로 깨닫고 정돈한 사고와 가치관에 대해 누군가 스크래치를 내고 깨부수려 덤비면 ‘네, 알겠습니다’ 하고 쉽게 인정하고 무릎 꿇기는 힘들다. 그래서 그것이 때로는 옹고집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사실, 개인이 쌓아 온 시간들과 그 속에서 적립된 살아가는 방법들이 무시당할 이유는 없다. 누구도. 누구에게도.
그런 이유로 뿌리 깊은 것들은 잘 바뀌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그 이외의 것들에 대해서는, 마음을 컨트롤하고 몸을 훈련시켜 보다 좋은 방향으로 변화를 꾀하고자 시도한다면 나도 당신도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는 것이 가능할 거라고, 나는 믿고 있다.
예전에는 햄버거를 주 3회 먹던 때도 있었고 피자전문점을 주 2회 방문하던 때도 있었다. 집에서도 매일 먹는 한식을 굳이 밖에서까지 먹을 필요가 있나 싶어서 인스턴트는 아닌데 자연식에서는 먼, 프랜차이즈 음식점이 나의 빈번한 식사 장소였다. 물론 집에서 하기 힘든 고급 한식 요리 전문점에 가는 건 좋아했다. 고가의 음식이기에 여럿이 함께 가거나 회식으로 가게 되거나 감사하게도 누군가의 대접을 받아 가는 식이었다. 대부분의 청춘처럼 근로에 충심을 다하느라 집에서 밥을 차리는 게 사치스러운 시절의 이야기다. 월급 명세서엔 프리랜서로 분류되었지만 주로 한 곳에 소속되어 직장인처럼 일하던 시절의 이야기.
배곯는 날도 철저히 감수해야 하는 진정한 프리랜서로 전향하고부터는 늘어난 자유로운 시간을 요리에도 할애하게 됐다. 서툰 요리가 조금씩 능숙해지면서는 사 먹는 음식의 간이 아닌 내게 딱 좋은 간을 찾아냈다. 맵고 짠 자극적인 맛을 줄여갔더니 재료 본연의 맛을 느끼기 시작한 것도 이때쯤부터였다. 소금, 간장 같은 짠맛 간을 하지 않아도, 인위적인 단맛을 추가하지 않아도, 야채조차 어쩌면 그렇게 각각의 재료마다 다른 맛과 향을 지니고 있는지. 당연한데 감탄하게 되는 자연의 맛을 알게 되는 건 사실 약간의 노력만 필요한 것이다.
이렇게 어느 때에, 저런 나였던 사람은 이런 나인 사람으로 먹는 방식이 바뀌고 있었다. 마찬가지다. 살아가는 방식도 우리가 스스로 바꾸려고 노력하면 충분히 가능한 것들이 참 많다. 몸에 오래 밴 습관들이 고쳐지지 않을 것 같지만 신기하게도 일주일, 한 달 정도만 꾹 참고 노력하면 어느새 수십 년을 반복했던 행동의 패턴이 바뀌는 걸 보고 신기해한 적이 있지 않나. 살아가는 모든 방식을 모조리 고칠 수는 없더라도 말이다.
그나저나,
감자는 식어도 참 맛있다.
뜨거워서 후후 불어먹는 맛도 좋은데 한 김 식고 나면 삶은 감자가 내는 맛이 좀 더 제대로 혀끝에 느껴진다. 슴슴하다는 표현이 딱! 이다. 그 맛이 나는 딱,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