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을 짓는 일, 살아가는 일

-5 다섯 번째 일상

by 윤에이치제이

5.

계속 잘 맞지 않을 수 있고 계속 싫을 수 있고,

잘 맞지 않는 줄 알았는데 이제는 좋을 수 있고



요리하는데 마늘은 꽤 중요하다. 우리나라 요리에는 마늘이 큰 몫을 한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마늘 소비가 세계적이라는 수치화된 기록도 있다. 마늘은 효능 면에서도 우수한 재료다.


그런데 마늘과 나는 그리 썩 사이가 좋지 않다.

나는 아린 맛에 매우 취약한데 혀에서 느껴지는 맛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위와 장이 이를 받아들이는 포용력 면에서도 친해지지 않는 사이다. 체질에 따라 잘 맞는 식재료와 잘 맞지 않는 식재료가 각자에게 있을 것이다. 내 몸이 모든 것과 조화롭게 지낼 수는 없다. 그건 문서화된 정보로 알게 되는 것보다 살면서 먹는 행위를 수없이 반복하다 보면 자신에게만 꼭 맞는 데이터를 체득하게 된다. 마늘이 훌륭한 재료인데도 나는 마늘과 잘 맞지 않는다는 얘기를 이렇게 한다.


그럼에도. 마늘을 아예 100% 배제하고 요리할 수는 없기 때문에 나는 생으로는 아예 섭취할 생각조차 하지 않고 불 위에서 조리할 때에 그나마 안심하고 사용한다.

많이는 사용하지 않는다. 구운 마늘이 맛있다고 마구 먹었다가는 위와 장이 하루 종일 생고생한다. 위에서는 뚝배기 속 시뻘건 찌개가 가스 불에 넘쳐흐르는 것 같은 부글거림과 함께 아리고 쓰리고 난리가 나고, 아래에서는 화학적 기호를 모르는 가스로 인해 터질 듯 빵빵하게 부풀어 올라 곧 굉장한 폭발(?)이 일어날 것만 같다. 이런 날은 속에서 뜨겁게 차오르는 열 때문에 마치 불에 덴 듯 가만히 있지 못하고 침대에 누워 이리저리 데굴거리다가 가까스로 잠이 든다. 잠이 들어도 당연히 숙면은 취하지 못한다.

이래서 마늘이 많이 들어간 요리에는 유난스럽게 군다. 왜 그렇게 유난스럽냐는 소리를 듣는다 해도 직접 겪은 사람은 유난 떨게 된다. 결론은, 어쩔 수 없이, 여전히 나는 마늘과 내외하는 사이다.


그럴 만도 하다. 마늘은 존재감을 제대로 드러내는 식재료다.

아주 잠깐 슬라이스 했을 뿐인데도 금방 손끝에 베는 강력한 마늘의 냄새. 요리에 사용하기 편하게 한꺼번에 다져놓기라도 하는 날에는 몇 번을 비누질해 씻어도 존재의 힘을 이겨낼 수가 없다. 냄새에 예민한 사람 따위는 그가 스스로 물러날 때까지 꼬리 내리고 기다리는 것 말고는 달리 무슨 방법이 있을까. 후각이 발달한 건지 그걸 넘어 극심하게 예민한 건지, 나쁜 냄새든 좋은 향이든 그것들이 짙은 농도로 콧속을 공격해 오면 난 어김없이 두통을 앓는다. 그런 사람들이 있고 내가 그렇다. 그래서 마늘은 냄새에서도 또 이렇게 거부감이 드는 것이다. 싫어하려고 대차게 마음먹은 게 아니라 그럴 수밖에 없게 생겨먹어서 어쩔 수 없게 된 일이다.


마늘과 같은 관계가 있다.

잘 맞지 않는데 좋아하려 노력하고 내게 유익한 사람이니까 배제하지 않으려고 무진장 애썼던 관계들. 사실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내가 이뤄내야 하는 목표와 유기적으로 얽혀있는 복잡한 조직망에서 나와 잘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특정 사람을 배제시키기는 어렵다. 그래서였겠지만 일적으로 뿐만 아니라 인간적으로도 포용하고 이해하고 관계 맺으려고 어지간히 신경 쓰고 공을 들인 때가 있었다. 게다가 모든 사람에게 좋은 사람이고 싶음을 지향하는 성격 때문에도 피곤을 자처했다. 상대가 나를 좋아하지 않는데도 상관없이. 겉으로는 별 문제없지만 실상은 곧 끊어질 것 같은 아슬아슬한 유대를 잃지 않으려고 무던히도 애썼다. 한정된 에너지를 갉아먹는 시간을 꽤 오랫동안 보내온 것이다.


그런 사실을 나중에야 제대로 깨달았을 때는 참 허무한 일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로는 어쩔 수 없었다 하더라도 모든 요리에 마늘을 쓰듯 모든 순간에 그 사람을 내 삶 속으로 끌어들여 올 필요는 없었던 것이다. 모든 순간 필요한 존재는 아니었던 것이다.

더군다나 마늘 같은 사람은 아리고, 강력한 자신의 특성을 중화시키려는 노력도 하지 않는데, 조화와 배려의 감각에 우둔하기 그지없는데, 그 때문에서 결국 내가 탈이 나도록 곁을 주어야 했나를 생각하면 더더욱 한심하다. 좀 더 현명하게, 서로의 필요를 공감할 때에만 함께 보조를 잘 맞추고 서로에게 만족스러운 결과를 만들어내는 그 정도면 충분하지 않았나 싶은 것이다.


사람이, 변하지 않을 것 같다가도 어떤 계기가 있어 변하기도 하고 또 아주 거대하고 거창한 계기가 아니더라도 어느 순간엔가 자연스럽게 안착하는 생각의 변화들이 있다. 그건 시간과 더 관계있는 일일지도 모르겠다. 세월이 흐른 뒤에야 그 변화를 인지할 수 있게 되니까.

타인에게 어떻게 보일지 신경 쓰던 에너지를 나에게 돌리면 얼마나 마음이 여유롭고 풍요로워지는지. 나와 맞지 않는 사람에게까지 나의 한정된 에너지의 얼마를 할애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그걸 자신을 돌보고 다독이는 일에 쓰는 것이 훨씬 현명한 일인데 말이다.

모두가 어느 순간에는 알게 되는 사실이다. 애써 그럴 필요 없다고 주위에서 말해줘도 들리지 않았는데 애써 누가 말해주지 않아도 스스로 그럴 필요가 없음을 깨닫게 되는 순간이 있다. 이제 결코 잘 맞지 않을 것에 아등바등하지 않아도 된다.


또 다행인 것은 모든 게 마늘 같지는 않다는 것이다.

게다가 잘 맞지 않아서 계속 싫었던 것이 갑자기 좋아질 수도 있다. 콩이 그랬다.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나는 밥 한 공기가 내 앞으로 오는 게 설레는데 그날은 엄마가 콩밥을 한 날이었고 그럴 때면 나는 콩을 골라내느라 밥이 식는 걸 감내해야 했다. 콩을 편식하는 어린아이에 관한 이야기는 흔해서 내가 특별히 유난스러운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다행인데

더 다행인 것은, 서른이 넘어도 좋아지지 않던 콩이 어쩌면 그렇게나 야무지게 고소한 지. 요즘엔 밥 할 때 콩을 넣고 어떤 콩은 샐러드에 곁들이고 어떤 콩은 갈아서 부쳐 먹기도 한다. 모든 콩은 다 다른 고소한 맛을 지녔고 그렇게 다채롭게 고소한 맛과 모양을 가진 콩이 최근에 가장 좋아진 식재료 중 하나다.


그 사람 참 콩국처럼 깊고 짙은 사람이라는 걸 한참 늦어서야 깨닫기도 하는 건, 느지막이 콩 맛을 깨달은 것과 같다. 있는 듯 없는 듯 끊어지지는 않고 기어이 지금까지 이어진 관계를 나의 늦은 깨달음 덕분에 이제야 애착을 갖게 되기도 한다.

그런 사람에겐 그간의 소홀함을 매우 깊이 반성하며, 이 콩 저 콩 할 것 없이 매끼마다 맛과 영양을 책임지는 콩을 좋아하는 마음처럼 지겹도록 아껴주고 싶다. 진가를 몰라봤던 지난 시간보다 나에게 자양분이 되어 줄 참 좋은 사람과의 앞으로의 시간들이 길고 긴 인생에서 더 많이, 충분히, 남아있기 때문에 그걸 감사히 여기면서 말이다.


계속 싫어할 수 있고 싫어하다 좋아질 수도 있는 건 오기나 변덕이 아니다.

살아가면서 변함없기도 하고 변하기도 하는 입맛처럼 살아가면서 내게 맞는 것들을 잘 추려내는 현명한 삶의 방법이다. 비단 사람과의 관계뿐만 아니라 살면서 솎아내야 할 거리는 널리고 널려서 어쩌면 업보처럼 살아가는 동안은 계속 해내야 할 일인지도 모르고.


그러니, 마늘은 마늘대로 콩은 콩대로

싫으면 싫은 대로 좋으면 좋은 만큼

내 삶은 내 마음이 가는 방향대로 가면 되겠다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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