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 29번의 크리스마스 - 14 로텐부르크
꼭 14번의 잠, 세 번째 도시에서의 열네 번째 크리스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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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이불을 싸매도 한기가 들어 미세한 두통을 느끼며 깼다
라디에이터 5, 그런데도 온기가 없다 화장실도 마찬가지다
아마도 카린이 새벽이면 난방을 끄는 것 같다
사실 하루 이틀이면 알지 못했을 카린의 다혈질 성향을 몸소 겪고 나서 좀 침울했었다
와이파이나 난방이 자주 문제가 되어 조심스럽게 질문을 해도 언성이 높아진다
인종과 언어가 달라도 건들지 않으면 친절한 사람들의 심성에는
악의는 없고 카린은 연세도 있으시니 불편함을 감수하는 게 나을 것 같아
이후로는 별 말하지 않고 지내고 있다
별일 만들지 않고 잘 있다가 잘 떠나고 싶은 마음이다
침묵엔 한없이 평온하고 친절하니까
다시 한번 인증컷을 남겨보는, 이층 싱글 룸 창이 보이는 카린의 집
am 10시경, 싱글 룸 게스트가 체크아웃을 한 후 방을 옮기게 됐다
기다리던 옛 공간과 조우하는 순간이다
청소를 막 마친 카린과 함께 짐을 옮기고 나머지 정리를 한다
그런 와중에, 딴에 다른 게스트와 비교하자면 장기 투숙자라고
인터넷이 먹통인 동안 꼬인 예약 상황을 나에게 하소연하는데
성격 따라 말이 빨라지고 높아진 카린과의 소통은 반토막이 난다
그런 상황에 나는 그저 나의 잠자리 새 침구를 받아 정리하는 걸 도우며
소통되지 않은 나머지 대화에 한껏 오버된 웃음 리액션을 취하는 게 최선이다
격앙된 시간은 무사히 지나가고 홀로 남은 방에서 옛 기억이 되살아나 뭉클해진다
그렇지만 반가움은 잠시 방안에 남겨 두기로 한다
비가 오는 오전, 게스트용 뒷문을 나오며 마음속 파이팅을 외친 후
오늘의 나 홀로 여정을 시작해야 하는 시간이다
성벽 안에서 바깥의 먼 풍경을 바라보며 홀로 결심한 계획을
가장 먼저 실행한다 친구와 갔던 길보다 멀리 더 멀리 가보겠다는,
한글로 쓰인 작별의 인사에 마음을 단단히 다지며
로텐부르크 아닌 인적이 드문 길로 들어서는 순간이 아주 조금은 두렵다
하지만 길을 걷기 시작하면 얼마의 두려움은 사라지고 만다
길을 따라 드문드문 등장하는 지금과 익숙한 풍경들이 금세 이방인을 안심시킨다
크리스마스는 이곳에서도 머무르고 있다
겁이 도망간 여행자의 걸음에는 일시정지나 스탑 버튼이 잘 듣지 않는다
집들이 사라지면 숲길이 나타나고 그 길 너머 다시 집들이 나타나는데
전형적인 시골길의 풍경을 좋아하는 나는
나의 살던 곳과 비슷한 듯 다른, 자연을 머금은 이 풍경들이 사랑스럽다
동화책 속 같은 로텐부르크를 벗어나니
좀 더 현실이 묻어나는 소설 속 같은 일상들을 마주할 수 있어서 좋다
오락가락하는 비에 우산을 폈다 접었다 반복하면서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이 호기심을 언제 멈춰야 할까
고민을 할 법했을 때 나아가는 길에서 돌아가는 이정표를 만났다
이제 멈추라는 경고인지 이걸로 충분하다는 격려인지
그게 뭐든 직진의 길이 계속됐다면 진한 고민에 빠질 뻔했던 나를 대신해
결단을 내려 준 이 상황이 고마울 뿐이다
되돌아가는 길이 온 길과 달라서 그 또한 고마웠다
인적 없이 고요한 길과 따뜻한 집 안에 머무르고 있을 이들이 옹기종기 모여사는 마을을 지나
또다시 이어지고 이어지는 길들을 걷는데 멀리 보이는 성벽 위 로텐부르크의 지붕들이
멀리 떠났다 돌아오는 탕자를 두 팔 벌려 맞이해주는 것 같아
막 끝이 난 오전의 긴 산책의 시간을 잊을 뻔했다
그렇게 멀리 높이 시선에 잡힌 그 장면이 진심으로 반가웠다
돌아온 길은 익숙하다
그 익숙함에 알지 못했던 긴장감이 풀어지는 기분이다
몸은 정직해서 머리가 인지하지 못한 것을 알려줄 때가 있다
여태 걸었지만 여전히 걷고 싶다
친구와 걸었던 성벽 위 좁고 긴 길의 절반, 그 이후의 보류해 두었던
나머지의 길들을 걷기 시작한다 그 길은 어느 길보다 일보 전진이 쉽지 않다
각도에 따라 변하는, 로텐부르크 지붕들이 만들어내는 기하학적이고 예술적인 풍경이
수십 번을 반복해 봐도 비슷해 보이기는커녕 자꾸 새롭기 때문이다
이 멋진 장면들을 놓치고 있는 거리의 사람들과 지금 사진의 일부만 보는 이들은
아름다움에 대한 시선이 나와 달라 어떨지 모르겠지만
자꾸 봐도 나는 여기가 또 보고 싶다
마음을 듬뿍 채웠으니 배도 좀 채워야 하지 않을까 싶을 때 친구와 갔던 카페를 찾아간다
커피와 케이크를 주문하고 저녁용으로 브레첸(독일 건강빵)을 포장한다
대화할 누군가가 없이 가만히 앉아 밖을 보는 시간이 귀하다
한 시간 정도 머무르는 동안 다시 걷고 싶은 힘과 마음이 생긴다
다시 걸을 때 시선을 끄는 건 책들이다 지난 여행과 마찬가지로,
좋아하는 것들을 그렇게 눈으로 가득 담고 다니다 보면
또 해는 진다 조명이 하나둘씩 켜진다 밤이 빛나기 시작한다
크리스마스의 로텐부르크가 화려해진다
내가 지나야 하는 성벽의 문으로 나와 나를 기다리는 유일한
방으로 돌아가는 길의 불빛은 소담하다
그것 나름대로 운치 있는 길을 지나 둘일 때보다 이른 저녁 시간 홀로 돌아온다
내일을 위해 오늘의 밤을 비축해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