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1월 17일

꼭 29번의 잠 - 20 로마 브라치아노호수+모든골목길들+이탈리아의불합리

by 윤에이치제이

꼭 19번의 잠, 로마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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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고 싶은 것은 나무 빼곡한 산으로 둘러싸인 곳인데

날마다 바다를 볼 수 있으면 좋겠다는 욕심

그 욕심을 좀 꺾어야 한다면 강이나 호수가 있는 곳이면 좋겠다

그런 소망이 실제의 풍경으로 존재하는 곳을 오늘 기차를 타고 간다


외곽으로 가는 기차를 타고 갈 때 주의 사항!

로마에서 꼭 왕복 티켓을 사서 가기를 당부한다

그러지 않았다간 돌아와야 할 때 나에게 닥칠 일을 똑같이 겪을지도 모른다고

이 여정의 작은 에피소드를 미리 예고한다





기차 타기 딱 좋은, 파란 하늘이 머리 위에 그득하게 펼쳐진 날

트램을 타고 간 기차역에서 티켓 머신으로도 가뿐히

브라치아노 행 편도 티켓을 끊는데 벌써 내게 주어진 임무 하나

완수한 뿌듯한 기분이다


기차의 창 밖으로 도시가 지워지고 푸른색으로 채워지는 순간을

지켜보는 것은 지구 어디에서든 설레는 일이고 설렘 펌프는 지금 이 순간에도

어김없이 작동한다 1시간이 좀 더 걸려 기차가 목적지에 다다르려 할 때에

창 밖으로 슬쩍 모습을 드러낸 호수의 짙푸른 빛깔에

기대 이상의 놀라움과 두근거림이 동시에 느껴진다 심장아 벌써 나대면 안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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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의 외곽에 위치한 Braccino 브라치아노 호수

시간이 있다면 날이 좋은 날 이 바다처럼 깊고 짙푸른 호수를 꼭 봤으면

안면 없는 사람에게도 그렇게 전하고 싶은 곳


기차에서 내려 소담한 기차역을 통과해 가파른 계단과 골목으로 내려가면

호수와 마을을 가까이 만날 수 있다

기차역은 브라치아노 호수와 마을 중심으로부터 가장 높은 지대에 있다


S1, 이라고 투박하게 적힌 표지판 두 개를 따라가는 길은 호수를

바로 코 앞에서 볼 수 있는 장소로 안내하는데

이 날 기차에서 내렸을 때부터 불어 온 심상치 않은 강풍은 목적지에 가까워질수록

더욱 사나워졌다 모자를 뒤집어쓰고 눈을 찌푸리며 골목 사이사이로

온전히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호수를 애타 하며 좁은 길을 내려가는데

다다른 마을의 중심에 버티고 있는 단단하고 정갈한 성이 눈길을 끈다

그곳을 잠시 올라 성과 성에서 보이는 호수를 내려다보며

곧 들이닥칠 심장의 요동을 천천히 예열한다


드디어 호수에 다다랐을 때

호수마저 바다와 다름없는 파도를 일으킬 정도로 심술 맞게 바람이 불어댔다

내가 서 있는 이곳이 바다인지 호수인지 가늠할 수 없는 기분이 들었지만

사실은 바람이 아니어도 이 크고 깊고 푸른 호수는 바다 같기도 했다

포말을 일으키며 끝없이 밀려오는 호수의 흰 물결 앞에서 눈을 제대로

뜰 수조차 없어서 건물 모서리에 서서 바람을 피했다가 호수와 몇 초간 눈을 맞췄다가

이 행위를 몇 번을 반복하고서야 겨우 호수를 눈에도 사진으로도 담아 둘 수 있었다

아름다운 호수를 지척에서 마주하고도 제 몸 하나를 가누지 못하는

미약한 존재의 처절하고 우스꽝스러운 몸부림이 가엾고 그 모습에 잠깐 웃음이 났다

결국,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상상할 수 없는 바람의 잔인한 위력 앞에

20분 만에 백기를 던지고 호수와 바람을 등지고 뒤돌아서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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뻥 뚫린 호수 앞과 달리 바람을 막아주는 골목길로 피해 들어오자

길 잃을 염려는 없을 것 같은 작은 동네를 천천히 걸어 볼 힘이 났다

모든 길들이 다 좋았다 여유 있는 넓은 길도 겨우 한 사람이 지나갈만한 틈새 같은 길도

두 사람이 나란히 손잡고 걷지는 못할 만큼 좁은 길에서는 연인들에게 이 길은

좋은 수도 나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어느 골목 끝에 나타난 작은 공터에서는 날카롭게 반짝이는 눈빛과 칠흑처럼

검고 매끄러운 털을 가진 검은 고양이를 만났는데 그 녀석이 풍기는 카리스마와는

달리 도망가도 쫓아와 내 발에 엉기는 살가움은 반전이었다

외로움보다는 사랑을 많이 받아 개냥이처럼 사람에게 애교를 부리는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는데 아무리 그래도 이 녀석이 집요하게 내 발 하나를

차지하고 놓아주지 않으려 하는 통에 떼어내느라 조금 애를 먹었다

네 장난에 맞장구쳐주고 싶지만 나는 갈 길이 바빠 외지인이란 이름은 언제나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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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지만 고풍스러운 동네는 닥치는 대로 아무 길로 들어서도

매시 매초 반하는 풍경을 가졌다 게다가 어느 골목의 끝에서는 다시 얼굴을

살짝 내미는 호수가 매력적이었고 그 유혹을 쫓아 길을 내려가다 보면

멋진 호수를 둘러싼 마을과 집들이 아름드리 내려다보이는 전망 좋은 넓은 쉼터가 나왔다

지도가 없고 정보가 없다면 이렇게 끊임없이 내 걸음을 다그쳐야 한다

그러지 않고 쉽게 지치는 여행자라면 중요한 무엇 하나는 놓치고 떠나게 될 테니까


파란 하늘과 푸른 호수와 작고 우아한 마을의 풍경

바람만 불지 않는다면 이곳 벤치에 앉아 음악을 들으며

여유도 한껏 부리고 호수도 실컷 바라보기를 오래오래 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는 날씨의 여행이 아쉽기만 했다 그래도 버틸만한 바람과

호수를 제대로 볼 수 있는 이곳에서의 시간이 다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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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스러운 골목길들과 작별을 고하고

마을의 중심으로 돌아와 가지 않았던 다른 길로 들어선다

아기자기한 상점들과 겨우 인적이 보이기 시작한 큰 길을 따라 걷다가

대로변 큰 건물의 사이에서 빼꼼 빛을 뿜어내는 오후의 햇빛을 만난다

조금 있으면 이곳에서도 파란 하늘을 멋진 색으로 물들이며 이별을 준비하겠구나

서쪽으로 기우는 해가 있는 곳으로 조금 올라봤지만

더 이상은 무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때보다 아쉬움을 가득 머금고

로마로 돌아갈 오후의 기차를 타러 기차역으로 돌아가야 했다


기차역에서 티켓을 끊으려는데 티켓 머신은 카드밖에 되지 않고

매표소는 이미 불이 껴지고 텅 비어있다 그리고

기차역 안에는 당황한 한국인 여자 1인과 성별이 섞인 5인의 10대 무리가 있다

추워서일까 갈만한 데가 없어서일까 여기가 아지트인가

나는 여자 아이 하나에게 기차표를 살 수 있는 다른 곳이 있는지 물었다

그녀는 나를 역 밖의 BAR로 데리고 갔는데 아쉽게도

소통이 잘 되지 않아 데리고 간 그곳에는 지하철 티켓만 판다고 했다

그냥 카드로 티켓을 끊으면 됐는데 사실 지갑에 현금만 들고 다니던 나는

비상용 카드를 가장 안쪽 셔츠 주머니에 넣어 두었었다 그래서

겹겹이 껴 입은 옷 사이을 뒤적이기 흉하고 귀찮아 마침 도착한 기차에 올라

승무원에게 직접 요금을 지불할 수 있냐고 물었다

그럼 현금으로 5유로, 아니 8유로를 줘 그럼 탈 수 있어

티켓값은 3유로인데 어째서..? 현금으로는 그렇게 지불해야 탈 수 있어

어이가 없었다 하지만 그럴 수 있었다 이탈리아에서는


지난 여행에서

가죽 지갑을 샀던 가게에 카메라를 두고 오는 바람에 다시 찾으러 갔는데

저녁 일찍 상점 문을 닫아 다음 날 다른 일정을 포기하고 아침 일찍 다시 갔건만

끝까지 시치미를 떼어 카메라를 돌려받지 못했었다 새 카메라인 게 중요한 게

아니라 로마가 마지막 일정이었기에 지난 한 달여의 유럽 여행 사진이 찍힌

메모리까지 함께 포기해야 했던 사실이 억울하고 분한 일이었다

눈물을 삼키고 오래 상심하느라 이후 일정이 엉망이 되어 그때 사랑하는 도시 로마가

너무 실망스럽고 미워졌었다


하지만 오늘은 이 정도의 불합리함에 당황하거나 놀라지 않는다

그 경험이 사랑하는 도시 로마에서의 오래 전의 아픈 경험 중 하나였고

유독 이탈리아 여행 내내 그런 식의 소소한 일들을 경험했던 나는

이번엔 기차에서 내려 흉하든 말든 진즉에 그리 했으면 좋았을, 비상용 카드를 꺼내

티켓 머신에서 티켓을 사서 다시 기차에 올랐다

이렇게 얻은 교훈 하나는 기차 티켓은 큰 도시에서 왕복으로 미리 구매해

두는 게 현명하다는 것이다 이번은 카드로 결제할 수 있어 다행이었지만

로마의 외곽과 같은 이탈리아의 작은 역에 도착할 때에는

티켓을 구매하지 못할 수 있는 이러저러한 난감한 상황이 많이 발생한다

그래서 반드시 인근 지역으로 이동할 때는 출발지에서 왕복 티켓을 구매하는 게 좋다


기차에 올라 추위로 한껏 움츠러들어 뻣뻣해진 근육과

꽁꽁 얼어 있는 얼굴과 손발을 녹이며 쉬고 있는데 올 때도 하지 않았고

이런 짧은 구간의 열차에서는 거의 하지 않는다던 티켓 검수를

아까 대면한 직원이 하러 왔다 주저 없이 기차표를 보여주었다 그때 나는

그의 얼굴에서 꼼꼼히 날짜를 살펴보다가 당황하며 티켓을 돌려주는 표정을 읽었다

그는 나를 허투루 봤을 수도 있지만 꽤 여러 번 이탈리아의 불합리함을 겪어

교훈을 얻은 사람은 그렇게 만만하지가 않다


돌아오는 길의 기차 창 밖으로 서쪽 해가

구름에 먹히며 힘을 잃어가는 것을 바라보았다 이제 집으로 돌아가면

바람을 이겨내느라 힘이 들었고 풍경을 놓치지 않느라 진이 빠진

피곤한 몸과 마음을 잘 달래 주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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