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극히 개인적인] ㅆ 쓰기의 말들 ㄹ

안 쓰는 사람이 쓰는 사람이 되는 기적을 위하여 / 은유 지음

by Jin

이 책을 도서관 서가에서 꺼낸 이유는 단순했다. 몇 달째 글쓰기에 의문이 생겼고, 그 의문이 풀리기 전까지는 도무지 글을 쓸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책 안에는 유명 인사들의 문장들이 담겨 있었다.


어쩌면 내가 찾아 읽고 발췌하는 수고로움과 번거로움 없이 그들의 주옥같은 말들을 훔치고 싶어서 빌렸는지도 모르겠다. 가볍게 읽다 보니, 브런치 작가가 되던 날이 떠올랐다. 무엇이든 써보겠다며 애를 쓰던 그때의 나.


요즘 나는 오마이뉴스에 기존에 읽었던 책과 새로 읽은 책의 서평을 꾸준히 올리고 있다. 비록 기사 등급이 가장 아래이긴 하지만, 하루 종일 브런치에 머물러 있어도 허공에 기도하는 것 마냥 아무런 반응이 없는 브런치보다 소소하게 반응해 주는 오마이가 좋아졌는지도 모르겠다.


https://omn.kr/2h4sv


그런 의미에서 이 게시글은 <ㅆ 쓰기의 말들 ㄹ> 서평은 아니고, 주르르를 문장만 적어둡니다. >> 부분은 저의 글이 아닌 은유 작가님의 글임을 미리 알려드리는 바입니다.







데이비드 실즈

글쓰기는 나쁜 언어를 좋은 언어로 바꿀 가능성을 대변한다.

>> 미국의 소설가 데이비드 실즈가 자기는 말을 더듬기 때문에 작가가 되었다는데 나는 미련해서 글을 쓰게 된 것 같다. 글쓰기는 나만이 속도로 하고 싶은 말을 하는 안전한 한수단이고, 욕하거나 탁하지 ㅇ낳고 한 사람을 이해하는 괜찮은 방법이었다.


헨리 밀러

새 비료를 뿌리기보다는 매일 조금씩 땅을 다져라.

>> 하얀 종이 두 바닥을 나만의 언어와 사유로 채우는 일은 간단치 않다. 견적이 크면 시작을 미룬다. 그래서 '글을 쓰자'가 아니라 '자료를 찾자'며 시작한다.


테드 쿠저

미루겠다는 것은 쓰지 않겠다는 것이다.

>> 두세 시간 지났어도 한 페이지 간당간당, 내용도 우물거리고 산만하다. 자기가 쓴 이상한 글을 봐야 하는 형별을 면하려면 계속 다름 문장을 쓰는 수밖에 없다.


나탈리 골드버그

우리가 힘을 얻는 곳은 언제나

글을 쓰는 행위 자체에 있다.

>>글을 쓰는 에너지를 회복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글 쓰는 것. 몸의 감각이 쓰기 모드로 활성화되고 도움닫기를 할 수 있는 밑 원고가 다져진다.


작가의 임무는 평범한 사람들을 살아 있게 만들고, 우리가 평범하면서도 특별한 존재라는 사실을 일깨워 주는 것이다.



트레이시 키더

아주 서서히 글을 쓰는 목소리를 찾아냈다. 지적이고 공정하며 이성적인 누군가의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는 나의 것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내가 되고 싶은 사람의 것이었다.

>>나 좋을 대로 사는 건 내 선택과 책임인데 아이에게는 늘 뭔가 미안했다. 남들처럼 학원을 보내지도 않고 숙제를 봐주지 못해 불안했다. 아이가 도태될까, 자신감 잃을까, 나태한 성적이 빈곤한 미래를 예비할까, 걱정에 걱정으로 뒤척였다. 행복은 성적순이 아닌가 헷갈렸다. 그런데 여러 사람이 글로 쓴 구체적 일상, 내밀한 고백, 치열한 물음을 읽고 말하고 곱씹으며 나도 모르게 불안증이 가셨다. 성적과 행복이 비례하지 않아서 안도한다는 게 아니라, 삶은 성적이나 취직 같은 한두 가지 변수로 좋아지거나 나빠질 만큼 단순하거나 만만하지 않다는 것, 부단한 사건의 이행 과정이지 고정된 문서의 취득 수집이 아니라는 것을 어렴풋이 느꼈다.


이성복

시는 그것 자체로서 의미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삶에 대한 사랑을 받아 내는 그릇으로서 의미를 갖는다.

>> 글쓰기가 자기를 겉꾸미고 남의 삶을 끌어다 왜곡하고 자기 편의대로 가공하는 수단이 되는 게 어쩐지 가슴 아프다. 약한 것, 모자란 것, 초라한 것을 가리고 누르는 수단이 되는 게 너무도 쓸쓸하다. 무시나 과장이 아닌 있는 그대로의 인정과 옹호의 글쓰기는 이 부조리한 사회 현실에서 불가능한 일일까. 손해 나는 일일까. 어떤 실패나 어떤 상실도 삶으로 통합해 낼 수 없다면 글쓰기는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일까.


헨리 데이비드 소로

글쓰기에는 어떤 것도 운 좋게 찾아오지 않는다. 글쓰기는 어떠한 속임수도 허용하지 않는다. 모든 문장은 기나긴 수련의 결과이다.

>>"그는 성인이라기보다는 방치된 어린아이 같았다. 나는 이런 사람들이 나이보다 훨씬 어려 보이는 경우가 아주 흔한 것은 책임질 일이 없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이런 문장을 만나는 재미에 빠져 조지 오웰을 읽는다. 빼어난 미문이라 서라기보다 인간과 세계에 대한 예리한 관찰, 정확한 분석에 놀라곤 한다.


장석주

'쓰다'라는 동사는 작가들이 따라야 할 궁극적인 도道이다.

>> 매일 글을 쓰는 사람의 글. 이 말이 무슨 훈장처럼 들렸다. 나도 한때는 매일 글을 쓰는 사람이었다. 지금은 안 쓰는 날이 있다. (중략) 어쨌든 매일 써서 글 쓰는 일로 먹고살게 되었으니까. 매일 글을 썼던 그때는 내 생애 최악의 날들이었다. 일상을 망가뜨리는 일들이 자꾸 일어났다. 그 난리통에 어떻게 글을 썼을까 싶지만, 휘정이는 일상을 부여잡을 방도는 글쓰기가 유일했던 것 같다.


잭 하트

우리가 진짜 알고 싶은 것은 인간이 무엇을, 무엇을, 어떻게, 왜 하느냐이다.


리베카 솔닛

작가의 재능이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희귀하지 않다. 오히려 그 재능은 많은 시간 동안의 고독을 견디고 계속 작업을 해 나갈 수 있는 능력에서 부분적으로 드러나기도 한다.

>>재능이 있나 없나를 묻기보다 나는 왜 쓰(고자 하)는가를 물어야 한다고 여긴다. (중략) 쓸 수도 없고 안 쓸 수도 없는 딜레마에 놓은 한 사람은 어떤 선택을 한다. 쓰는 고통이 크면 안 쓴다. 안 쓰는 고통이 더 큰 사람은 쓴다.


발터 벤야민

사랑에 빠진 남자는 자신이 읽는 모든 책에서 사랑하는 여인이 모습을 찾아보게 된다.


김우창

사람이 받는 영향이라는 것은 자기가 필요한 것을 받는 거지, 바른 이해나 영향 자체의 좋고 나쁘고 한 것은 별 관계가 없는 일이다.


귀스타프 플로베르

나는 언어가 살아 있는 한 언젠가 자기 모습을 드러낼 모든 독자들을 위해 쓴다.


존 버거

삶에서, 의미란 순간적인 것이 아니다. 의미는 관계를 짓는 과정에서 발견된다.


엘렌 식수

자기 자신을 글로 표현하는 것을 자기만의 운동으로 삼으라.


데니스 존슨

벌거벗은 자신을 쓰라. 추방된 상태의, 피투성이인.

>> 슬픈 일은 터놓을 마땅한 장이 없다. 복잡한 서사와 감정이 중첩되어 몇 마디 말로 설명하기 어렵고 말하고 나도 영 개운치 않다. 자기 슬픔을 내보이면 약점이 되기도 한다. 이해 관계로 얽힌 경쟁 사회에서 슬픔 말하기는 금기다. 슬픔이 노폐물처럼 쌓여 갈 때 인간의 슬픔을 말하는 책은 좋은 자극제다. 슬픔을 '말하는 법'을 배우고 슬픔을 '말해도 괜찮다'는 용기를 준다.


https://brunch.co.kr/@summer2024

(이 부분을 읽다 보니 송지영 작가님이 떠올랐다.)


오귀스트 로밍

한 가지를 이해하는 사람은 어떤 것이라도 이해한다. 만물에는 똑같은 법칙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공부는 독서의 양 늘리기가 아니라 자기 삶의 맥락 만들기다. 세상과 부딪치면서 마주한 자기 한계들, 남을 이해하려고 애쓰면서 얻은 생각들, 세상은 어떤 것이다. 사람은 무엇이다라는 정의를 내리고 수정해 가며 다진 인식들, 그러한 자기 삶의 맥락이 있을 때 글쓰기로서의 공부가 는다.


롤랑 바르트

글쓰기의 실천은 기본적으로 '망설임들'로 꾸며집니다.

>> 며칠 전, 버스를 기다리며 보니 매대 물건이 바뀌었다. 여름 내 팔던 천도복숭아 대신 양파가 분홍 바구니에 담겨 나란히 놓여 있었다. 다리가 불편한 아들은 절둑거리며 매대에서 양파 바구니 위치를 계속 옮겼다. 앞에 두었다가 뒷줄 것과 바꾸었다가 다시 앞줄에 놓았다가 마냥 그러는 것이다. 버스를 타고도 그 장면이 떠나질 않았다. 그는 무엇을 하는 것이었을까. 더 좋은 물건을 잘 보이게 하고 사고 싶게 만드는 노력인가. 얼핏 그의 반복 행위는 아무런 차이가 발생하지 않는 것 '처럼' 보였다. 그게 그거 같았다. 그런데 그의 행위는 방금 전까지 내가 하던 짓 아닌가, 별반 다르지 않은 낱말을 주무르고 넣었다 뻿다 문장을 지웠다 살렸다 하는 일과 양파 바구니를 앞줄로 뒷줄로 옮기는 일은 얼마나 다를까. 그 망설임들로 꽉찬 시간들, 이게 나을까, 저게 나을까, 거기서 막 빠져나온 나에게 그의 동작이 낯설지 않았던 것이다. 무의미의 반복에서 의미를 길어내기, 무모의 시간을 버티며 일상의 근력 기르기, 사는 모습은 크게 다르지 않다.


에드워드 호퍼

그림이란 실제적 장소를 그대로 옮기는 작업이 아니라, 그곳을 이루는 여러 요소들이 제공하는 윤곽과 인상을 조합해 내는 것이다.


어니스트 헤밍웨이

어떻게쓰는지 배우려거든 신문, 잡지 쪽글을 많이 써 봐야 해. 머리를 유연하게 하고 언어를 지배하는 힘을 길러주거든.


수전 손택

연민이 내 삶을 파괴하지 않을 정도로만 남을 걱정하는 기술이라면 공감은 내 삶을 던져 타인의 고통과 함께하는 삶의 태도다.


이오덕

나쁜 글이란 무엇을 썼는지 알 수 없는 글, 알 수는 있어도 재미없는 글, 누구나 다 알고 있는 것을 그대로만 쓴 글, 자기 생각은 없고 나므이 생각이나 행동을 흉내 낸 글, 마음에도 없는 것을 쓴 글, 꼭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갈피를 잡을 수 없도록 쓴 글, 읽어서 얻을 만한 내용이 없는 글, 곧 가치가 없는 글, 재주 있게 멋있게 썻구나 싶은데 마음에 느껴지는 것이 없는 글이다.


아모스 오즈

다른 사람의 처지를 생각하고 그 처지가 되어 보는 것, 그것이 작가의 일이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결핍은 결점이 아니다. 가능성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세계는 불완전한 그대로, 불완전하기 때문에 풍요롭다고 여기가 된다.

>> 고통은 창작의 어머니란 말도 있지만, 상실을 체험한다고 다 좋은 작품을 쓰는 것은 아니다. 고통에 익사당해 세상에 빛을 보지 못한 작가는 얼마나 많을까 싶다. 그 차이는 뭘까. 오래 안고 가고 싶은 물음이다. 왜 어떤 상실이나 고통은 존재의 몰락을 초래하고, 어떤 결핍은 힘들의 과잉 상태를 낳는가. 개인마다 경제, 계급, 문화 자원 그리고 기질과 성향과 건강이 다르니까 일반화 할 수 없을 것이다.


스티븐 킹

지옥으로 가는 길은 수많은 부사들로 뒤덮여 있다.


https://brunch.co.kr/brunchbook/elizabeth6

(나는 요즘, 부사라고 함은 원래도 잘 쓰는 것이였지만 어쩐지 소위 작가님이 생각난다.)


김대중

상대방이 내 말을 쉽게 이해할 것이라고 착각하지 않는 것으로부터 글쓰기는 시작되어야 한다.


김영하

기록한다는 것은 조수간만처럼 끊임없이 침식해 들어오는 인생의 무의미에 맞서는 일이기도 하죠.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정말로 진지한 소설에서는 진정한 갈등이 여러 이눔ㄹ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것이 아니라 독자와 작가 사이에서 벌어진다.


폴 발레리

작품을 완성할 수는 없다. 단지 어느 시점에서 포기하는 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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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완서

난 아무것도 쓰지 않고 그냥 살아왔던 시간도 중요하다고 말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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