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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지혜 Dec 15. 2018

결국 내 손으로 나올 수밖에 없다.

(2) 가오슝에서, 두 번째

- 이 글에는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의 내용이 다수 존재합니다. 스포일러가 될 수 있어요



한 동안 인터넷을 켜면 온통 퀸(Queen) 이야기뿐이었다.

 최근에 개봉한 퀸과 퀸의 보컬 프레디 머큐리의 전기 영화 보헤미안 랩 소리 때문이었다. 평소에도 중독자 수준으로 인터넷을 많이 하다 보니, 어쩌면 한국 사람들보다 더 많이 퀸에 보고 들었을지도 모른다. 어떤 노래가 좋고, 어떤 사람들인지, 또 영화는 어떤지에 대해 매일 같이 듣다 보니 문득 영화를 보는 건 아주 당연해졌다.


대만의 영화관은 처음이었고 솔직히 자막 없이 영화를 볼 정도로 영어를 잘하지도 않았다. 게다가 영화는 미리 예매하고 가는 게 당연했던 한국과 달리, 여기 친구들은 미리 예매를 거의 해본 적이 없다는 것이다. 구글에 '보헤미안 랩 소리 대만'을 검색해서 지금 상영 중인 관을 봤다. 한국에는 10월에 개봉했지만 대만에서는 11월이 되어서야 개봉했기에 관은 많았다.


 몇 번 보다 보니 또 '여기까지 왔는데 대만 영화관 한 번쯤 가봐야지'부터 시작해서 '이렇게 좋은 환경인데? 게다가 다들 이렇게 좋아하는데?' 하는 감정까지, 오만가지 생각이 슬슬 영화 보는 걸 합리화 하기 시작했다. 덕분에 오전 수업이 없는 어느 목요일, 조금 일찍 일어나 버스를 타고 지하철을 한번 갈아타 보얼 예술특구 시작쯤에 위치한 영화관을 찾았다.


아침 10시부터 이런 가오슝 끄트머리까지 와서 영화를 보는 사람은 당연히 없었다. 영화를 시작할 때까지 나는 텅 빈 영화관을 찍으며 어딘가 걱정되고 또 흥분되는 감정을 자제할 수가 없어서 화장실도 한번 갔다 오고 바깥도 구경하며 정신없이 보냈다. 광고를 여러 개 보고 직원이 표와 함께 구매한 핫도그를 전해줄 때쯤, 중년의 부부 둘이 들어와 앉았고 마침내 영화가 시작했다.


가오슝의 영화 표. 아직말이 서툴러 어떻게 어떻게 표를 샀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두 시간 반쯤 되는 시간 동안 족히 한 시간은 울었다. 

스스로도 왜 그렇게 벅차오르는지 알 수 없이 숨죽여 훌쭉이다가 안경을 벗고 펑펑 울다가, 라이브 에이드 때는 울면서 감동도 받느라 바쁘게 보냈다. 그러다 마침내 영화가 끝났을 때는 탈진한 사람처럼 다리가 풀려서 흐물흐물 기어 나가는 바람에, 직원 말에 대충 고개만 끄덕일 수 있었다.


영화관을 나서서 다시 학교까지 같은 길을 또 한 시간 반 되짚었다. 돌아와서 수업을 들었고 운동을 갔으며 옆방 친구들과 중국어 수업을 하고 다시 방에 돌아와 앉았다. 그리고 퀸 노래를 쭉 들으며 다시 같은 생각을 했다.


친구들은 프레디를 더할 나위 없이 사랑했는데, 그는 결국 스스로의 우울을 극복하지 못했다. 결국 죽은 건 그 하나지만 친구들은 여전히 프레디를 기억하면 슬프고 기쁘고 미안하고 사랑하고. 


아주 오랫동안 내가 찾아 헤매던 답을 찾은 기분이었다. 그렇다. 나는 아주 오랫동안 내가 살아남아야 할 이유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었다. 

뭐가 문제인지는 알 수 없지만 기억나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사람들과 잘 섞이지 못했다. 서로 이름도 모르고 엉겨 놀던 초등학교 시절, 누군가가 집에 친구들을 초대하는데 내 이름만 쏙 빠져 있었다. 나도 가면 안돼? 하고 물으니 너는 재미가 없어서 안 왔으면 좋겠어. 오면 박수만 치잖아. 하고 조심스러운 대답이 들려왔다.


그 말은 아주 오랫동안 나를 붙잡고 있었다. 재미없는 친구. 재미있는 사람이 되면 잘 섞여 놀 수 있을까? 어딜 가도 재미있는 사람들이 너무 부러웠다. 모두가 부르고 싶어 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3학년 때는 반 친구들이 동그란 케이크 모형이 달린 내 샤프를 보고 예쁘다 하고 감탄했던 적이 있었다. 나한테 또 관심을 줬으면 해서 다음 날에는 지갑을 모두 털어 500원짜리 샤프 6개를 사 갔다. 친구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와서 나도! 나도! 하고 관심을 주던 게 너무 기분 좋았다. 아주 짧은 순간, 모두가 나를 원하고 관심이 쏠리던 그 기분이 좋았다.


중학교 때까지는 누가 무슨 말을 해도 그래그래 하고 받아넘겼다. 교단에서 반 여자애가 나를 흉내 내며 웃을 때에도 못 본 척 있었다. 중학교 3학년부터는 아주 나쁘고 재수 없는 사람이 되었다. 나는 사랑받을 가치 있는 사람인데 세상이 나를 너무 잘못 대하는 것 같았다. 남들에게 심하게 굴었다. 오래 함께 다녀도 어색하지 않을 친구도 생겼고 어떤 친구들에게는 상처를 줬다. 대학에 와서도 비슷했다. 어떤 계절엔 넌 참 좋은 사람이야 소리를 듣기도 했고, 어떤 날에는 너는 사람들이 모두 네게 맞춰주길 바라는 이기적인 사람이란 소리를 들었다. 모두 맞는 말이었다.


지난해부터 모든 것들이 엉켜 들었다. 어느 날에는 인생을 제대로 사는 것 같다가, 어느 날에는 모두 엉망이었다. 가만히 앉아 있으면 내 치부가 기억나 책상에 쿵 소리가 날 정도로 머리를 박았다. 엉망으로 뒤덮인 책상 위 물건들을 모두 내던졌다. 의자를 발로 차 넘어뜨리고 아픔이 가실 때까지 기다렸다. 한바탕 그러고 나면 '내가 대체 왜 이러고 있지?' 싶어서 맥이 탁 풀렸다.


그런데도 사람은 여전히 엉망이었다. 나는 여전히 재수 없게 말했고 내가 하는 말이 다 맞는 것처럼 굴었다. 지난한 학기는 모두 엉망이었다. 육 개월 동안 준비하던 일이 모두 엉망으로 돌아갔고 침대에 누우면 하루를 산 게 아니라, 하루는 죽어나가는 것만 같았다. 


사는 것도 죽는 것도 힘들다면 나는 왜 죽지 않고 버티는 걸까?

 언젠가는 인생을 게임처럼 느꼈다. 정 너무 어려운 판을 깨고 있을 땐 전원을 꺼 버리면 될 테지. 그러면 되는데 내가 참 끈기가 있어 붙잡고 있는 거라고. 정 못 견디겠으면 그냥 전원을 꺼 버리자고. 

사진은 중앙일보에서 가져왔다.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의 클라이막스

그러나 보헤미안 랩소디를 보고,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프레디 머큐리는 아닐지라도 아무리 봐도 내 친구들은 프레디의 친구들처럼 좋은 사람들인데. 프레디도 나도 왜 이렇게 좋은 사람들을 두고 혼자 괴로워하는 걸까?


답은 단순하다. 결국 어떤 공허함과 우울에 있어서는 남들이 절대 채워 줄 수 없는 지점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남에게 하루 종일 사랑한다는 말을 들어도, 애정 어린 신뢰와 보살핌을 받아도 그 우물은 절대 채워지지 않는다. 결국은 다른 누구도 아닌 내가 극복해야만 하는 지점인 것이다. 


물론 어떤 사람들은, 멀리 갈 것도 없이 나부터 시작해서 거기서 발목을 잡히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는 그렇게 발목 잡혀 떠나간 사람들을 남겨진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아주 적나라하게 그린다. 


퀸의 실제 멤버인 '로저 테일러'와 '브라이언 메이', 그리고 프레디 머큐리의 친한 지인들이 영화에 대거 참여했다는 점이 이 영화가 가진 감정이 얼마나 진실되었는지 보여준다. 그들은 영화 내에서 스스로를 변호하지 않는다. 영화가 아름답게 그리고 싶은 건 오직 두 가지, 프레디 머큐리라는 사람과 그가 가진 무대를 향한 열정이다.


본인들도 결코 잊히지도 저평가되지도 않았음에도 다른 두 멤버들은 영화 속에서 자신들을 드러내지 않았다. 실제로 아무런 정보도 없이 영화를 봤더라면 기억에 남는 건 오직 프레디 머큐리뿐이었을 것이다. 함께 해서 좋았던 기억이 더 많았을 텐데 오히려 그들은 프레디가 외로움을 갈구할 때 함께 해주지 못했던 일들을 영화에 남겨둔다. 


특히 프레디가 오랜 연인과 작별을 고하고 새롭고 텅 빈 집에 갔을 때 로저 테일러는 유일하게 그의 집에 갔고 식사를 하고 가라는 끈질기고 장난스러운 요청에도 웃으며 거절했던 장면이 유독 기억에 남았다. 로저 테일러는 이 영화에 결코 가볍게 참여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넣어도 넣지 않아도 될, 또한 본인이 아니어도 될 장면을 굳이 애매하게 남겨 두었다. 둘은 무명시절부터 함께 놀았고 살았고, 일을 하기도 했는데 그런 일화 대신 아쉬웠던 일을 굳이 영상 속에 박제해 둔 것이다. 


프레디 머큐리는 당시로서는 도저히 고칠 방법이 없던 병, 에이즈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았음에도 멤버들에게 끝내 숨기고 숨기다가 죽기 5년 전쯤에야 귀띔했다. 그 사실을 알고 영화를 보면 라이브 에이드 공연 전, 멤버들에게 속 시원히 자신의 병을 고백하는 프레디가 괜스레 프레디 같지 않게 느껴진다. 


그는 생전 그렇게 당당했던 사람은 아니었다. 지독한 인터뷰에도 꼬박꼬박 장난을 치면서라도 분위기를 살리려고 노력했고, 자존심이 유난히 강했는데 주위 사람들에게 많이 휘둘리기도 했다. 그런데 영화의 프레디는 에이즈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고 병원을 나서며 복도의 환자에게 자신의 주특기 같은 말투로 화답해 주고 직원과 멤버들에게 즉시 알린다.


처음에는 전혀 프레디 답지 않아 별로라도 생각한 장면들이었다. 그러나 다시 볼수록 그랬을 면 어땠을까? 하는 멤버들의 속내가 느껴졌다. 프레디가 그랬다면 어땠을까. 우리에게 먼저 이야기해줬더라면. 프레디가 조금 더 먼저 용기를 냈더라면. 죽은 지 30년 가까이 된 사람인데도 금방 있었던 일처럼 아쉽다. 그랬더라면 더 좋았을 텐데. 그 순간 영화는 전기영화에서 한 발짝 나아가, 내 안에서 다른 의미로 특별해졌다.

영화 <보해미안 렙소디>의 한 장면. 배우들은 실존인물들을 많이 연구한 티가 났다

신기하게도 나 같이 재수 없고 이기적인 인간에게도 프레디의 친구들과 비교하여 손색없는 친구들이 있다. 

내가 어리석은 선택을 하고 뒤늦게 후회하고 질척거려도 기다려주는 이들이 있다. 내가 파놓은, 나만이 건널 수 있는 구덩이를 건너면 그들이 주는 사랑이 지척에 있는데 여기서 주저 않아서야 되겠는가? 그건 민폐라기보다는 안타깝다는 표현이 더 알맞다. 안타까운 일이다. 좋은 사람들을 두고 그렇게 스러지는 건.


고등학교 3학년 때, 자기소개서를 쓰는 게 너무 힘들어 담임 선생님 앞에 앉아 있다 문득 펑펑 울었던 적이 있다. 답이 없는 거 같아요 전혀 모르겠어요. 그런 말들을 중얼거리며 울 동안 선생님은 그저 물끄러미 나를 보셨다. 대신 내가 우는걸 모두 끝내자, 

"하지만 네가 선택한 길이잖아. 쉬울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잖아. 아무도 이 이상 널 도와줄 수 없어." 

하고 덧붙이셨다. 그러자 웃기게도 눈물이 쏙 들어갔다. 그러게요. 하고 다시 눈물을 닦고 여전히 답이 없는 자기소개서에 눈을 돌렸다.


어떤 지점, 어떤 슬픔은 결국 스스로 극복하는 수밖에 없다. 물론 우습게도 이렇게 말하는 나 역시도 약의 도움도 받고 전문가의 도움을 받고도 어느 지점부터는 더 이상 나아가지는 못했다. 앞에 선 구구절절한 일들은 아주 최근에 있었던 일이고 여전히 나는 재밌는 사람이고 싶고, 사실 세상 사람들은 모두 매일 나 없는 파티를 즐기고 내 빈자리를 즐기지 않을까 하는 피해망상에 빠져 산다.


그럼에도 결국은 내가 가야 할 길이기는 하다. 살아있는 한, 내 옆에 사랑하는 친구들이 함께하는 한, 포기할 수 없는 길이기도 하다. 


최승호 시인의 시, '눈사람 자살 사건'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더 살아야 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 자살의 이유가 될 수는 없었으며 죽어야 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 살아야 할 이유 또한 될 수 없었다.'


그건 참 맞는 말이다. 그런 고민 속에서 욕조에 누은 눈사람은 결국 뜨거운 물을 튼다. 그 결정에는 다음과 같은 이유가 있다.


'나는 따듯한 물에 녹고 싶다. 너무 오랫동안 춥게만 살지 않았는가'  


눈사람은 결국 죽음을 선택했다. 겨울을 버티지 못하고 그대로 녹아 사라지기로 했다. 눈 사람이 조금 더 버텼더라면 어땠을까. 지천에 가득한 친구들과 꼭꼭 손잡고 얼었다가 그대로 녹아 봄볕을 맞이했더라면, 봄꽃도 여름꽃도 될 수 있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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