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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지혜 Sep 07. 2016

서로에게 꽃이 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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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월의 첫째 주 토요일이었다. 늦은 오후의 번잡한 버스를 타고 용산 시내를 달리고 있었다.  

 오랜만에 찾아온 서울에는 벌써부터 봄이 한창이었다. 아직 가지에 새싹도 채 나지 않은 우리 동네와는 사뭇 다른 풍경이었다. 한 아름 만개한 벚꽃과 개나리, 파릇하게 흔들리는 푸른 잎사귀들. 아침부터 비가 왔고 해는 구름 어딘가에 묻혀 있었다. 그런데도 창가를 타고 끝없이 늘어선 풍경에선 따스한 봄볕이 묻어났다. 때마침 라디오에는 봄의 노래, 버스커버스커의 ‘벚꽃 엔딩’까지 울려 퍼졌다. 버스에 탄 그 누구도 창가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러나 내 시선만은 차마 창가를 향하지 못했다. 아니 그럴 수 없었다. 창가에 닿기도 전에 시선은 자꾸만 다른 곳으로 샜다. 이유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시선은 자꾸만 경치에 정신없이 시선을 빼앗긴 어느 할머니에게로 가 닿았다. 십 여분쯤 지났을 쯤, 깨달음은 문득 찾아왔다. 흐릿한 기억을 헤치고 자꾸만 떠오르는 사람이 있었다.  



  새해의 첫날, 그리고 우리 아버지의 생일이기도 한 1월 1일의 저녁이었다. 어머니는 다소 침착한 표정으로 내 방 문을 열고, 나의 친할머니가 요양원에서 갑자기 돌아가셨다고 말했다.  아는 사람의 죽음은 몇 번 있었지만 혈육의 죽음은 또 처음이었다. 정신이 바로 들지 않았다. 잠깐 말은 잃은 나는 ‘그럼 나는 뭘 하면 돼?’ 하고 물었다. 그러자 어머니는 오늘 말고 내일 쯤 언니와 함께 장례식장으로 오라는 말만 남기곤 아버지와 함께 서둘러 장례식 장으로 향했다. 잠시 후 도어락이 닫히는 소리가 문득 들렸다. 혼자 남은 나는 우두커니 침대 구석진 곳에 누워 할머니 생각을 했다.



  나의 친할머니는 오래 사신 분이셨다. 올해 나이는 아흔넷, 출생 신고가 잘못되어 호적상으로는 백 하나. 일제강점기 때 일본에서 사시다 히로시마에 투하된 원자폭탄으로 집을 잃고, 후에는 줄곧 서울에서 사시던 분이었다. 가장 막내인 우리 아버지가 막 마흔 살이 되었던 십여 년 전, 큰아버지 집에서 쫓겨날 때까지 그분의 집은 서울이었다. 그래서일까. 처음으로 친할머니를 봤던 날, 친할머니는 서울보다 훨씬 한적하고 따뜻한 인천에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하지만 어찌되었건 할머니는 우리 식구가 되었다. 보일러가 잘 닿지 않아 버려져 있던 작은 방에서 흘러나오기 시작한 티비 소리는 곧 익숙해졌다.


  친가를 통틀어 가장 고령이신 할머니와 가장 막내인 나의 만남은 뻑뻑하기가 이를 데 없었다. 나는 할머니의 많은 것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요리를 한다고 하면 부엌을 기름범벅 소금범벅, 설탕 범벅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 거슬렸다. 국을 끓여준다고 나서선 매번 불이 날 뻔 하는 것도 싫었다. 남들보다 다섯 걸음은 느린 발걸음도, 한 번에 딱딱 내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것도 죄다 싫었다. 


  허나 할머니는 그런 걸로 기죽을 분이 아니셨다. 할머니는 내가 화를 내면 마찬가지로 화를 냈고 내가 신경질을 내고 방문을 쾅 닫으면 어김없이 소리를 지르셨다. 저년, 저년. 저 버르장머리 좀 보라고. 결국 가운데 껴서 내내 울상이었던 엄마가 중재에 나섰지만, 이년 동안 우리는 서로를 없는 사람 취급하고 살았다.


  그러던 우리가 다시 대화를 하기 시작한 것은 아주 사소한 계기에서였다. 할머니는 갑자기 내게 요구르트를 하나씩 주시기 시작했다. 어느 날에는 본인이 ‘덴뿌라’라고 명명한 각종 튀김을, 또 언제는 유통기한이 한참 지난 사탕들을. 집안 형편이 유독 좋지 않던 때였다. 간식 한번 쉽게 먹지 못했던 나는 그렇게 쉽게 넘어갔다. 열세 살 무렵, 어느새 나는 집에 도착하면 늘 먼저 할머니 방으로 향해 인사부터 하고 내 방으로 향하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

  그해 겨울, 우리는 종종 함께 잤다. 보일러가 잘 닿지 않는 할머니의 방에는 유일한 전기장판이 있었고, 온도조절에 서툰 할머니의 전기장판은 늘 4도에서 7도를 맴돌았다. 나는 척추를 데우는 후끈한 온도가 좋았다. 이불에서 풍기는 할머니의 냄새도 좋았다. 손을 내밀면 꼭 맞잡아 주던 작고 쪼그라든 손길마저 좋았다. 언제든 상관없이, 할머니는 이따금 베개를 안고 찾아오는 나를 위해 기꺼이 옆자리를 비워주셨고 지나간 자신의 이야기들을 종종 해주셨다. 밤에는 지금도 기억하시는 사소한 일본어와 아버지도 기억하지 못하는 아버지의 어린 시절과 같은, 이제는 할머니만 기억하는 추억들이 오갔다. 그러면 나는 꼭 대화를 끝마치지 못하고 어느 순간 잠에 들었다.

  그게 할머니와 보낸 내 마지막 추억이었다. 중학교에 들어간 나는 좀처럼 적응을 하지 못했다. 할머니는 내게 점점 잊혀졌다. 그러다 열 여살 쯤, 할머니가 언젠가부터 내게 통 용돈을 주지 못한 것 같다며 한사코 안 받겠다는 내게 꼬박 열흘 동안 만원씩 주시는 일이 있었다. 어느 밤에는 허공에 대고 고모와 외할머니 또는 나는 모르는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기도 했고, 홀연히 집을 나가셨다가 거리에서 자기가 누군지 잊어버리는 일도 잦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할머니는 3급 치매 환자로 분류되었다. 그해 겨울에 요양원에 들어간 할머니는 고등학교 교복을 입은 내 모습을 끝내 보지 못했다. 고등학교에 들어가고선 일 년에 한번정도 할머니를 뵈러 갔다. 스무 살의 추석, 할머니는 아직도 내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때는 그게 참 기뻤다. 할머니 저 대학에 들어갔어요. 이 말을 살아 있을 때 전할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고 생각했다.


  그로부터 삼 개월도 채 되지 않은 날이었다. 할머니의 장례식은 빈소부터 입관까지 추웠다. 새해의 첫날이었는데도 어쩐지 생기가 없었다. 그 전날까지 떨어질 대로 떨어진 기온이 도통 오르질 않았다. 할머니는 결국 그렇게도 싫어하던 할아버지 옆에 묻혔다. 모든 것이 그렇게 일단락 됐다. 돌아오는 차에서, 나는 이번 겨울에 대한 생각을 했다. 이대로 영영 겨울이 끝나지 않을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얼마 후, 내 앞에 앉아 있던 할머니는 지팡이를 꼿꼿이 집고 일어섰다. 작은 체구에 어울리지 않는 강단 있는 몸짓이었다. 나는 곧 할머니의 자리에 앉았고, 그분이 버스에서 내려 사라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끝내 얼굴은 살피지 않았다. 시선은 다시 창가로 향했다. 흐드러지게 핀 꽃은 여전히 거리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봄은, 이제 막 시작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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